“나는 이해받고 싶은 사람, 그러나 당신의 맨얼굴을 보고는 뒷걸음질치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그 사랑이 ‘나는’으로 시작되는 사람이 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나는 ‘그래도 나는’이라고 말한 뒤 주저앉는 사람, 나는 한 번 더 ‘나는’이라고 말한 뒤 주저앉는 사람,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는 사람,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처음부터 다시 말하는 사람이다. 하여, 우리는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지 않고도 칼을 씻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김애란, ‘영원한 화자’ 중
‘너와 나 사이 이해는 불가능하다’나는 대기업 홍보팀 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앞뒤 안 보고 하고 싶은 일을 따라 길을 틀었고, 그 길목마다 많은 사람을 만났다. 대기업에 다닐 때는 인간관계가 어렵지 않았다. 각자의 직급이 정해져 있었고, 직급에 따라 써야 하는 사회적 가면이라는 게 있었다. 불쑥불쑥 진심이 튀어나온다 해도 아직 사회생활에 서툰 사원이라 용서받는 지점도 있었다. 다시 말해 공은 공으로, 사는 사로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인간관계가 어려워진 건 조직에서 나와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모든 결정을 혼자 해야 하는데 내 결정을 믿기도 어려웠고, 그게 옳은지 틀린지를 따지느라 보편적인 상식의 기준을 점검하는 일이 많아졌다. 내게 요구하는 것이 그에 비춰 부당하다면 화를 낼 수 있는 정당한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거였지만, 선배들의 조언은 선배들의 수만큼 다양했다. 공적인 기준이라는 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내 경험치는 턱없이 부족했고, 내 능력을 믿을 수 없는 차에 내 감정은 더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일대일로 대면할 때는 ‘저 사람이 맞겠지’ 하고 모든 걸 받아들이고, 뒤늦게 그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식으로 감정을 풀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원하는 걸 상대에게 말하는 법을 잊었고, 설득하기를 포기하게 되었으며, 부당하다 느껴져도 화를 낼 수 없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예술과 상업의 경계가 모호한 영화 일에서는 공사의 구분도 모호해졌다. 어느 정도 이기적일 만큼 일에 매달려야 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부터, 사적인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는 차츰 멀어졌다. 오랜 세월 함께했던 친구들 몇 명 외에는 일로 얽힌 관계들이었다. 그러니 내게 의미 있는 관계를 그 안에서 찾고 싶어졌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상대가 나에게 허용하는 만큼 다가가면서, 많이 허용하는 사람은 내게 마음을 내준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개인적인 상처나 가정사에 대해 털어놓는 사람들, 일과 관계없이 인생에 대해 조언해주려고 마음 쓰는 사람들. 그러나 이내 그것 역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사적으로 허물없이 굴며 별 얘기를 다 하던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배려조차 없어지는 경험을 통해 점점 마음을 닫게 되었다. 우리의 관계는 매끄럽게 표면 위를 미끄러져갈 뿐이었다. 결국 모든 사람과 일이 잘되면 좋은 관계, 일이 잘못 풀리면 틀어지는 관계라는 식으로 정리됐다. 거기에는 진심을 전할 필요도, 관계를 유지하려 애쓸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식의 대처는 다른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내 마음은 내 것이고 다른 사람 마음은 다른 사람 것이고, 우리 사이에 어차피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식의 체념. 누군가가 내게 부정적인 말을 하거나 진심을 드러내면,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자체가 두려워 관계를 끊어버리기도 수차례였다. 본격적으로 외로워진 것이다.
내가 나를 잘 몰라서 생긴 일들그렇게 외롭게 혼자 갈무리하고 흘러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자석에 달라붙는 철가루처럼 누군가의 작은 호의나 관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됐다. 그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지나치게 감사하거나 미안해하는, 관계 안에서 ‘나’가 지워지는 이상한 상태였다. 그 두 가지의 극단적인 마음 때문에 올 한 해 나는 몇 번의 실패와 이별을 겪으며 지독하게 마음이 아팠고, 불면증과 우울증 치료를 받기도 했으며, 중요한 일을 수행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고, 한 번 행동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열 번 물어봐야 하는 이상한 인간으로 변해갔다. 물론 이 모든 생각을 이렇게 정리된 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다만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나마 이렇게 애쓰는 나를 안쓰럽게 보아준 친구 한 명이 ‘마인드프리즘’의 심리 치유 프로그램인 ‘홀가분워크숍-나’를 신청해줬다. 얼핏 정보를 찾아보았는데, 정신과에서 상담을 하고 약을 받아먹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 입문자 코스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사용되는 표현들이 다정하고 예쁜 것이 내심 ‘오글거려서’ 나와는 맞지 않겠다 망설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워크숍에 참여하게 된 건, 워크숍에 앞서 받아본 ‘내마음보고서’를 읽고 나서였다. 마인드프리즘 누리집에서 신청하고 8만원을 내면 심리검사지를 보내준다. 거기에 답을 체크해 다시 보내주면 110쪽가량의 한 권의 책으로 된 결과를 받아볼 수 있다. 학교 상담센터나 정신과에서 받아봤던 검사지와 크게 다르지 않아 뭐 특별한 게 있을까 싶어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충격을 받았다.
‘내마음보고서’ 1부의 ‘나는 누구인가’에서는 나의 여러 심리 특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 다른 사람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다섯 가지 심리 코드를 알려준다. 이것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될 수도, 싫어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안내가 쓰여 있었다. 그중 내가 고민하던 인간관계와 관련된 이야기가, 한 번도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어보거나 내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한 적 없는 것이었다. 첫째, 기본적으로 생생한 감정이 우러나는 관계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가족 등 친밀한 관계에서도 감정적인 따뜻함이나 깊은 안정감보다 의무나 책임감이 지배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해 불만이 생기더라도 억제하거나 회피한다는 것. 둘째로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나 사람들에게 민감한데, 액면 그대로 믿기보다는 한발 뒤로 물러나 무슨 의도가 숨어 있지 않나 생각해보는 편이라는 것. 이렇게 예민한 나머지 중립적인 의미가 있는 자극이나 정보, 행동을 위협적이거나 공격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억울함이든, 분노든, 객관화든, 누군가와의 어떤 사건에 대한 모든 감정이 다른 사람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내마음보고서’는 내가 느낀 이 문제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내가 나를 잘 몰라서 생긴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각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전문가의 진행하에 모여 이야기하는 워크숍이 궁금해졌다.
남들도 나처럼 서툴다는 것의 확인지난 11월16일 오후 1시, 서울 강남구 역삼동 마인드프리즘 내 카페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4~6명씩 한 조를 이루어 앉았다. 워크숍은 6시까지 진행됐다.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알코올중독자들의 모임’이나 ‘암환자 가족들의 모임’처럼 둥글게 앉아 돌아가면서 자기의 힘들었던 경험을 이야기하고, 박수를 쳐주거나 안아줘야 하는 식의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일대일로나 다대일로나, 그런 식의 프로그램은 상처나 고민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털어놓는 데서 오는 후련함 외에 어떤 걸 남기기 힘들었던 것 같다. 끝없이 상처를 곱씹으면서 자기가 정리해놓은 만큼만 이야기하기 쉽기 때문이다.
홀가분워크숍은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내내 어떤 자극에 대한 나의 현재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힘들었던 때의 내 모습에 대해 그때의 감정이 아니라 표정이나 옷차림까지 세세하게 되짚어보며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에 맞춰 나도 모르던 내 감정이나 문제점을 발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내 이야기를 할 때, 해서는 안 될 것과 해야 할 것을 알려주는 식으로 제한을 둠으로써, 일상의 대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게 하기도 했다.
그 과정을 통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다고 말한 것은 한 가지 깨달음이다. ‘나만 이렇게 혼란스럽고 나만 이렇게 힘든 것이 아니구나.’ 이건 사실 다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문제로 닥치면 제일 먼저 잊게 되는 것이다. 짝을 지어 혹은 조원끼리 서로 다른 경험과 서로 다른 감정을 이야기하고 나서, 다 같이 돌아가며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우린 서로 성격도 다르고, 문제도 다르고, 다른 얘기를 했는데 결국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그게 엄청나게 위로가 되었다. 사실은 다들 서툴다는 것,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내가 겁이 나고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만큼 상대도 그렇다는 것, 너무 잘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과 다른 내 감정을 솔직하게 느끼고 드러내도 괜찮다는 것.
그래서 워크숍을 시작할 때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들어 서로의 눈을 피했던 사람들은 쉬는 시간마다 시키지도 않은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면서 편안해져 있었다. 나와 함께 이야기했던 우리 조원들은 5시간 동안 그 많은 활동을 하고도 ‘이제야 시동이 걸린 듯한 느낌’이 못내 아쉬워 쉽게 헤어지지 못했다. 우리는 꼭 그 시간만큼 진하게, 닭볶음탕에 소주를 마시며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지만 이 마법 같은 시간이 지나면 서로가 알고 있는 것 때문에 서로를 어색해할 수 있다는 걸, 그래서 연락하는 일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하며. 그 시간만큼은 어떤 비난도, 충고도, 조언도, 거리감도 없이 서로에게 충실하면서.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모두 스쳐갈 것그날 이후 내가 얻은 결론은 그것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내 성격과 경험에서 나온 문제들을 쉽게 고치지 못할 것이고, 또 사람들은 각자의 문제를 안고 나를 대할 것이고, 나쁜 상황이든 좋은 상황이든 그렇게 우리를 스쳐 지나갈 것이다. 나는 사소한 일에도 잠 못 이룰 것이고, 전하지 못한 진심은 아쉬울 것이고, 전해진 진심은 부끄러울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겁을 내고 도망치는 것보다는 그때의 내 감정을 어떤 정당성 없이도 솔직하게 표현하게 될지 모른다. 그게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그리고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경계하기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리라고 생각한 것만으로도, 나와 상대가 크게 다르지 않은 지점에 서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아닐까.
김지현 프리랜서 작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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