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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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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자, 무엇도 하지 말자

고3 19살들 모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여러 갈래 질문의 길을 만들고 답을 스스로 선택하는 아이들
등록 2013-11-28 13:13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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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은 끝났으나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과의 만남은 이제 시작이다. 고등학교 3학년, 아니 19살들이 모여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를 차렸다. 작업장 학교 하자센터가 기획한 자리다. 30명의 스프링캠프 참가자를 몸으로 이끄는 청년 멘토도 함께했다. 지난 11월19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 하자센터 본관 999클럽은 19살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다.

19살, 나이는 같지만 처지는 다른

캠프 첫날, 공동워크숍 ‘청춘지도 맵핑-공동의 질문 만들기’가 한창이었다. 꼭, 잉, 흐, 와, 응. 참가자들은 독특한 이름의 조로 나뉘어 19살 앞에 놓인 5개 열쇳말을 생각했다. 사랑, 돈, 친구, 나눔, 손(일). ‘나눔’을 열쇳말로 택한 ‘꼭’팀이 문장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19살에게 나눔이란?” 질문에 답을 만드는데 ‘꼭’이라는 조 이름을 넣어야 한다. “꼭 필요하지만 봉사활동을 채우기 위해 하던 거지” “뭐가 생각나?” “유니세프” “진부해”. 잠시 말들이 오가다 금방 문장이 나왔다. “열아홉에게 나눔이란 빛이자 빚.” 빵긋이는 “그동안 자라면서 나눔을 많이 받았다”며 “이제는 우리가 나눔을 해서 그동안의 빚을 갚고 빛이 되자는 뜻”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서로의 별명을 부르며 웃었다.

19살, 나이는 같지만 처지는 다르다. 동주 마케팅고에 다니는 빵긋이는 대기업에 입사했고, 광신정보고에 다니는 엽기는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한다. 빵긋이가 대기업 이름을 말하자 친구들이 “와, 좋겠다” “연봉이 얼마냐” 질문을 쏟아냈다. 빵긋이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엽기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는 “군대를 다녀와 점주가 되고 싶다”고 한다. “패스트푸드점 관리직 말이냐”고 되묻자 “강아지를 좋아해 애견가게를 차리고 싶다”고 답했다. 대기업에서 일하든, 아르바이트로 시작하든 이들은 지금 심심하면 “아홉수라 그래”를 외치는 친구들이다. 꼭의 맞은편에서 ‘잉’팀도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사랑’을 열쇳말로 받은 잉팀은 이내 “19, 사랑은 잉여 탈출”이라는 문장을 만들었다. 혼자 있으면 잉여 같은 시간을 보내는데, 사랑이 있으면 같이 놀러도 다니고 의욕도 넘쳐서 그렇게 정했다. ‘돈’이란 주제로 문장을 만든 ‘흐’팀. ‘열아홉 나에게 돈은 기다림 흐~’라고 썼다. 사고 싶은 것은 많은데 사지를 못하니 ‘흐~’라는 탄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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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팀은 ‘친구란… ㅎ… ㅎㅎ… 응답하라 1995’라고 ‘친구’를 정의했다. 자신들이 태어난 해와 인기 있는 드라마를 합쳐 나온 문장이다. ‘응’팀의 문구를 설명하는 붕어빵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가 있다. 초·중·고 내내 함께 다닌 쌍둥이 동생이다. 아직 같은 침대를 쓸 정도로 사이가 좋다. 붕어빵, 별명도 동생을 생각해 지었을 것이다. 당분간 자매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붕어빵은 진학을 하고 동생은 취업을 했다. 오늘 붕어빵은 여기로 왔고, 동생은 첫 출근을 했다. 이렇게 갈림길에 선 아이들이 공동의 질문을 던지고 각자의 지도를 만드는 사이, 기말고사를 마친 부천공고 학생 7명이 도착했다.

시간을 견디고 있는 아이들

이번엔 질문 사이를 오가며 각자의 느낌을 적는 순서다. 먼저 문장과 문장을 잇는 길을 만든다. 꼭은 와를 신문지로 잇고, 와는 의자로 흐를 잇고, 흐는 다시 꼭과 끈으로 연결된다. 아이들은 각자의 길을 택하고, 문장의 팻말에 바람을 새긴다. 사랑의 팻말에 ‘공대에서 만나자’고 적은 친구가 있었다. 가슴에 적힌 별명이 공대다. 화장기가 비치는 얼굴과 대조를 이룬다. “왜 공대에 가고 싶냐”고 묻자 옆의 친구 너스가 “남자들한테 환호받고 싶어서”라고 냉큼 답했다. 문화고에 다니는 공대는 “공대를 나와 물류센터에 취업하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엔 놀리던 너스도 “사람 대하는 일을 잘할 것 같다”고 거든다.

요리팀 19살들이 직 접 만든 카나페와 과 일꼬치를 자신과 친 구와 멘토에게 대접했 다. 마지막 날 ‘블레싱 파티’는 ‘내 인생의 스 프링캠프’에서 배우고 익히고 느낀 것들을 나누는 자리였다.

요리팀 19살들이 직 접 만든 카나페와 과 일꼬치를 자신과 친 구와 멘토에게 대접했 다. 마지막 날 ‘블레싱 파티’는 ‘내 인생의 스 프링캠프’에서 배우고 익히고 느낀 것들을 나누는 자리였다.

공동워크숍이 끝나고 팀별활동에 들어갔다. 요리팀, 목공팀, 음악팀. 세 팀으로 헤쳐모여 하고 새로운 공동작업을 한다. 목공팀은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하늘공원으로 떠났고, 요리팀은 멘토를 만나러 카페 슬로비로 갔다. 음악팀만 하자센터에 남아 우쿨렐레 만들기를 시작했다. 인디밴드 몽구스의 리더 몬구가 멘토로 함께하는 작업이다. 몬구는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가수다’의 박정현씨 알지? 박정현씨 앨범의 한 곡을 작사·작곡 하고 프로듀싱도 했어. 그런 작업도 좋지만, 너희와 같이하는 시간이 더 좋은 것 같아.” 몬구는 고리볼트·와셔·나비너트 등을 보여주며 우쿨렐레 제작을 설명했다. 흑인 노예들이 음악이 너무 하고 싶어서 시가 박스로 세 줄 기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우쿨렐레는 하와이 말로 ‘뛰는 벼룩’을 뜻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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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우쿨렐레를 연필로 그려보는 시간, 유난히 정성을 기울여 그리는 친구가 있었다. 별명은 성공이. 세경고 건축과에 다니는 성공이는 “진로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우쿨렐레 제작을 택했다”고 말했다. 성공이는 졸업도 하기 전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이제 면접이 며칠 남지 않았다. 필기시험에 통과한 셋 중 한 명이 최종 합격자가 된다. 성공이는 “뭐라도 하려고… 착잡해서…”라고 말했다. 이렇게 19살의 끝자락, 아이들은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11월20일, 스프링캠프의 둘쨋날이 시작됐다. 초겨울 한파가 몰아친 이날, 서울 월드컵공원 주차장 한켠에서 목공팀이 시(詩) 상자를 만들고 있었다. ‘문화로 놀이짱’의 작업장 ‘공공 공방’에서 못을 박고 나무를 써는 소리가 들렸다. 문화로 놀이짱은 버려진 서랍 등을 수거해 새 물건을 만드는 사회적 기업이다. 아이들은 오전에 시를 읽고, 오후에 시집을 꽂을 서랍을 만들었다. 못질을 하는 엽기에게 “무슨 시를 읽었느냐” 물었다. “가을,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쑥스러운 표정으로 엽기가 시를 읊었다. 함민복 시인의 ‘가을’이란 시다. “어떻게 찾았냐” 물었더니 “포털에서 사랑시를 치면 먼저 나오는 시 중의 하나”라고 답한다. 쑥스러워하는 엽기에게 “목공 작업이 재미있냐”고 물으니 엄지를 척 든다.

어디로 갈지 방황하고 부딪히는

시는 엽기가 읊고, 일은 가시가 했다. 엽기도 열심히 했지만, 가시는 능숙한 솜씨로 못질과 망치질을 했다. 엽기도 가시를 가리키며 “에이스” 했다. 특성화고 건축과에 다니는 가시는 반지를 만드는 기능반에 한 학기 있었다. 덕분에 공구 다루는 솜씨가 늘었다. 시 상자를 만든 팀에는 소춘이라는 여학생도 있었다. 소춘은 책꽂이에 나무 버스를 만들어 붙였다. 버스에 603, 숫자가 보였다. 소춘은 “버스를 기다리는 척하면서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렸다”고 말했다. 이때 기다린 버스가 603번이었다. ‘작은 봄’을 뜻하는 소춘은 그의 온라인 필명이기도 하다. 소춘은 “고교 시절에 느낄 수 있는 것에 충실하려 했다”고 말했다. 공부에 치이는 대신 글을 쓰고 생각을 즐겼다. 진명여고를 다니는 소춘은 “동네가 교육열이 높은 목동이라 더 이상하게 보는 이가 많았다”고 전했다. 소춘은 이제 입시 공부를 시작할 생각이다. “문학을 전공하고 싶냐”고 물으니 “문학은 직업이 아니라 삶”이라고 답했다. 그는 경제학 공부를 하고 싶다. 결심이 섰으니 열심히 하려고 한다. 소춘은 여러 갈래 질문의 길을 만들고 답을 스스로 선택했던 어제의 워크숍이 “어디로 갈지 방황하고, 어디로 가도 부딪히는 현실과 비슷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입시를 위한 문학이 아니라 나와 닿아 있는 시 읽기를 시도했다. 마음을 담은 시 상자 안에서 시를 읽고 느 낌을 나누는 자리(위). 앞서 멘토와 함께 소 춘이 시 상자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하자센터 제공

입시를 위한 문학이 아니라 나와 닿아 있는 시 읽기를 시도했다. 마음을 담은 시 상자 안에서 시를 읽고 느 낌을 나누는 자리(위). 앞서 멘토와 함께 소 춘이 시 상자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하자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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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팀은 오롯이 혼자서 혹은 오붓이 둘이서 즐길 공간도 지었다. 시 상자가 들어갈 텐트다. 누구는 안에서 시도 읽고 ‘멍도 때릴’ 것이다. 목공팀 멘토가 “마이클, 여기 잘라” 하니까 “마이클이 아니라 마이콜인데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부천공고 화공과에 다니는 마이콜은 취업이 아니라 진학을 택했다. 가고 싶은 학교도, 하고 싶은 전공도 있다. 집에서 가까운 인천폴리텍 건축과가 목표다. “어제 기말고사는 잘 봤냐”고 묻자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고 답한다. 사실 반 친구들은 대부분 취업 나가고 기말고사도 끝났으니 학교에서 마땅히 할 것이 없었다. 마이콜은 “끌려온 거라 해야 되나…”라고 했지만, 끌려온 사람치고 너무 열심히 작업했다. 나무 텐트에 못을 박던 마이콜이 텐트 골격에 무언가 썼다. “야, 멋진데” “와, 짱이다”. 같이 작업하던 여학생 만두와 미래가 문장을 읽고 소리를 쳤다. “마이콜, 니 인생에서 너는 독자가 아니고 작가다.” 마이콜이 인용해 쓴 문장을 보고 멘토들도 “놀랍다”고 칭찬했다. 머쓱해진 마이콜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난로 곁에 마쎄가 앉아 있었다. 마이콜은 “마쎄가 취업을 나갔다 왔다”고 말했다. 내내 말이 없던 마쎄는 “한 달 반 회사를 다녔다”며 “박스를 접고 옮기는 일만 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원한 일이 아니었다.

이날 하자센터에서는 요리팀이 해물누룽지를 만들고 있었다. 오징어에 칼집을 내고, 호박을 썰고. 2명이 한 조로 작업을 했다. 빵긋이는 공대와 마주 서 “우리는 베스트 커플상을 노리는 환상의 커플”이라며 웃었다. 같은 학교에서 왔나 했더니 처음 보는 사이다. 요리팀은 이날 오전에 섭식명상을 하고, 5분 말하기를 하며 친해졌다. 어제 만난 붕어빵도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동생은 회사 대표님과 식사가 있어서 늦었고 나는 피곤해서 일찍 잤다”며 “오늘은 꼭 여기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고 말했다. 옆에서 유난히 진지한 눈빛으로 멘토의 요리를 지켜보는 지선은 홈스쿨링을 하고 있다. 그는 “학교 밖에 가니 또래 친구들 만날 기회가 정말 없다”고 말했다. 하자센터가 좋지만 경기도 안산에 사는 지선이 오기는 거리가 멀다.

매우 되바라지되, 매우 다정하자

마지막 날인 11월21일, 하자센터에서 19살들이 맞을 20대를 축복하는 ‘블레싱 파티’가 열렸다. 요리팀은 전날 배운 음식을 차렸고, 목공팀은 시 상자를 선보였고, 음악팀은 직접 만든 악기를 연주했다. 첫날보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더했다. 자몽주스를 들고 마지막 건배사가 한마디씩 이어졌다. “20대는 굳이 돌파하고 싶지 않으면 당당히 회피하자” “20대에는 매우 되바라지되, 매우 다정하자”. 19살들은 그렇게 “20대에 무엇을 하자, 무엇도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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