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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떨어진 대장

검찰 조사 받으며 찌라시 탓, 부하 탓한 ‘무대’ 김무성 의원
‘사고’쳤는데 ‘님’은 모르쇠에 당내 태클만 잔뜩
등록 2013-11-19 15:11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김경호

한겨레 김경호

11월13일 자정을 5분가량 앞둔 시각. 이날 오후 3시께 검찰 조사를 받으러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왔던 ‘무대’(‘무성대장’의 줄임말,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의 애칭)가 약 9시간의 조사를 마치고 느릿느릿 걸어나왔다.

“선거 당시에… 찌라시 형태로 대화록 중 일부라는 문건이 들어왔습니다. …(출처는) 지금 알 수가 없습니다. …찌라시, 일종의 그런 것(증권가 정보지)인데, 그것을 밑의 사람들이 내용을 파악해서 거의 사실과 같다는 보고서 형태의 문건이었습니다.”

‘찌라시’라는 표현에서, ‘대장’이란 호칭이 무색해졌다. 찌라시에 주인공으로 나오면 모를까, 공개 석상에서 찌라시 내용을 그대로 읊는 건 대장이 할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입수 및 확인 과정의 책임은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겼다. 지난 6월 “정문헌 의원이 말해준 내용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을 종합해 문건을 만들었다”고 할 때만 해도, 주어는 무대 자신이었다. 기업가 집안 출신으로 키 181cm에 천하의 호인이라던 무대가 어쩌다 이리 잔뜩 쪼그라들었나.

무대는 2007년 당 대선 후보 경선 땐 ‘친박근혜계 좌장’으로 불렸다. 2008년 총선에선 당의 공천을 받지 못했다. 친이명박계의 ‘친박 공천 학살’이라 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힘이 없어서 미안하다. 꼭 살아서 돌아오라”고 했다. 많은 이들이 당을 떠나 ‘친박’ 깃발로 싸워서 살아 돌아왔다. 무대는 친박무소속연대의 대표선수였다.

하지만 무대는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 추진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박 대통령과 갈라섰다. 친박의 시선은 싸늘해졌다. 무대는 자기 길을 갔다. 2010년 친이계 지원을 받아 원내대표가 됐다. 친박을 떠나서도 잘 살 줄만 알았다.

세상이 바뀌었다. 2011년 말 박 대통령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으며 당권·대권을 모두 거머쥐었다. 무대는 이듬해 총선에서 또 공천을 받지 못할 판이 됐다. 무대는 이번엔 탈당 대신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그가 보수 분열을 막았다고들 했다. 그 덕인지 보수가 총선을 이겼다.

대선을 두어 달 앞두고 무대는 총괄선대본부장으로 캠프에 합류했다.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놓고 기거하며 세세한 것까지 직접 챙겼다. 캠프가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대선도 이겼다.

분명 개국공신이지만, 박 대통령과의 관계는 아직 물음표다. 여의도 정가에선 10월 재보선으로 국회로 돌아온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를 ‘무대 견제 카드’로 본다. 서 전 대표는 무대와 같은 상도동계(김영삼계) 선배다. 견제 카드를 꺼내든 건 박 대통령이다. 무대의 당권설과 대권설이 공공연히 나도는 마당에, 그를 가만둘 리 없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측근 정치’를 허용치 않는다. 자신을 업고 ‘자기 정치’에 나선 이들을 강하게 경계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 끝내 아버지를 배신하는 걸 보고 배운 학습 효과다.

무대는 주요 고비 때마다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대장이다. 하지만 그런 탓에 친박 쪽에선 ‘자기 정치’를 한다는 의심을 계속 샀다. 심지어 한때 친박을 떠났던 인물이기도 한 탓에, 박 대통령의 신뢰도 아직 되찾지 못한 것 같다. 무대의 위축,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래서이리라. ‘사고’는 쳤는데 돕겠다는 이는 뵈지 않고, 주위에선 당권입네 대권입네 태클만 잔뜩이다. 찌라시 탓, 부하 탓 하는 가운데 대장의 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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