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일 저녁 7시30분, 해가 저물고 하늘이 깜깜해졌다. 어둠은 낮은 곳 높은 곳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내려앉았다. 서울 종로1가, 술집과 밥집으로 조밀한 골목길에는 사람들이 이 가게 저 가게에서 우르르 쏟아져나왔다가 쏟아져들어가곤 했다. 번잡함을 뒤로하고 초대받은 13층짜리 건물 옥상에 올랐다. 옥상에 밤이 내려앉자 옥상 한켠에 걸려 있던 스크린도 내려왔다. 맞은편 울타리를 따라 설치된 벤치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여기는 옥상 극장, 버려진 문짝으로 벽을 꾸미고 공사장에 팽개쳐진 나무 팔레트, 낡고 닳은 플라스틱 박스로 벤치와 의자를 만든 이 공간에 스피커가 놓이고 스크린이 걸리더니 영화관이 되었다. 공중에 걸린 화면에서 영화 이 시작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집은 집이되 집 안이 아니라 집 바깥</font></font>강연 전문 기업 ‘마이크임팩트’가 손님들에게 열어둔 공간인 옥상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옥상TV’가 열린다. 이번달은 소설이 원작인 영화를 튼다. 먹고 싶은 음식과 맥주를 싸와서 스크린 앞에 자리를 펴고 앉아도 되는 극장이 열린다. 입장료도 없고, 보다 중간에 나가도 상관없는 자유로운 극장이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낭만적이다. 각박한 일상과는 왠지 동떨어진 듯한 도시의 옥상은 안도 밖도 아닌 곳, 아무리 올려보아도 들여다볼 수 없는 곳, 도시에서 가장 버려지기 쉽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곳이다. 이중성의 공간인 옥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발견한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옥상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전상인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와 김미영씨가 (아우리 펴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옥상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반드시 건물의 꼭대기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점은 옥상이 건축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구축된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옥상은 건축 행위에서 ‘목적 결과물’이 아니라 ‘부산물로 생겨난 사이 공간’일 개연성이 크다. …무릇 건축 공간이란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옥상에는 오직 바닥만 주어질 뿐, 벽도 없고 천장도 없다. …건물은 건물이되 건물 자체는 아니거나, 집은 집이되 집 안이 아니라 집 바깥인 것이다.” ‘집 안’이 아니므로 이런 일도 벌어진다. 9월28일 토요일 오후, 부슬부슬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질수록 서울 용산구 이태원2가 어느 건물의 옥상에 오른 사람들의 손은 바빠졌다. 이날 저녁 6시엔 동네 잡지 을 만드는 이들의 잡지 발간 기념 파티가 예정돼 있었다. 동네 곳곳에 포스터를 붙여 주민들을 초대해둔 터라 취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옥상에 세워진 구조물에 대형 비닐을 덮는 것으로 겨우 비막음을 했다. 처마 아래 바비큐 그릴을 갖다놓고 숯에 불을 붙여 고기를 구웠다. 기름내가 퍼지면서 파티가 시작됐다.
잡지 만드는 이들의 지인, 포스터를 보고 찾아온 동네 사는 외국인 등 여러 사람들이 비를 뚫고 파티에 참여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 때는 몸이 으슬으슬할 정도로 추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처음으로 동네 정경을 제대로 본다”거나 “계단 몇 개 오르면 이렇게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는 둥 공간 구석구석을 훑으며 감탄하고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남산타워, 남산 비탈을 따라 빽빽하게 앉은 주택에서 뿜어져나오는 가정집의 불빛 따위를 가로막힌 것 하나 없이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니 도시의 옥상을 연구한 책 (조경 펴냄)에서 영국 메트로폴리탄대학의 코스 기획자 케이 뉴먼은 독일 시인 노발리스의 시를 빌려 이렇게 쓰기도 했나보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시가 된다네. 멀리 있는 산들, 멀리 있는 사람들, 그리고 멀리 있는 사건들 모든 것이 로맨틱해진다네.”
<font size="4"><font color="#008ABD">변화 가능성이 있는 숨겨진 공간 </font></font>옥상 파티를 기획한 배영욱씨에게는 그런 로망이 있었다. “2007년 봄 해방촌에 처음 이사 오면서 옥상을 유독 자주 마주치게 됐다.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 그런지 옥탑방이 임대 1순위라고 하더라. 다른 동네에서 옥탑방은 비교적 임대료가 저렴한 편인데 여기는 그렇지 않다는 말도 들었다.” 그에게 언젠가부터 남의 집 옥상에 올라가보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그 공간에서 파티를 하거나 텐트를 치고 놀거나 거의 채소 공장 수준의 텃밭을 일구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 동네는 공간에 대한 열망을 옥상으로 해소하는 듯했다.” 도시 공간을 연구·기획하는 그는 건축기획자의 시선으로 옥상을 말하기도 했다. “건축에서 옥상을 제5의 입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빈 땅이 없거나 공간의 여지가 부족할수록 더 적극적으로 논의되는 공간이다. 2011년 미국 뉴욕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 이른바 핫플레이스라는 곳은 다 옥상에 있더라. 뉴욕은 두루두루 옥상을 잘 활용하는 도시 중 하나다. 뉴욕이 전세계적으로 도시 농업이 가장 잘된다는 이유도 아마 옥상을 텃밭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까닭 때문일 거다. 뉴욕에선 옥상이 하나의 문화 코드이기도 한데, 이런 소스들이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도 건너와 다양한 활용 예가 눈에 띄는 듯하다.”
에서 김홍기 교수(동양미래대학 디자인학부)가 쓴 설명을 요약하면 옥상은 ‘다양한 진화 과정을 거친, 여전히 변화 가능성이 있는 숨겨진 공간’이다. 다시 마이크임팩트의 옥상 영화관으로 돌아가보면 그렇다. 그곳 옥상은 영화관 외에도 공연장이나 강연장으로 활용하고 파티나 프로포즈 장소로 사용되는 등 다양하게 변주된다. 지난 10월2일 과 만난 마이크임팩트 이은경 매니저는 “최근에는 표창원 교수의 책 출간 이벤트를 아래층 실내 공간 대신 옥상에서 열었는데 독자의 반응이 좋았다”고 전했다. 이 매니저는 “프라이빗한 공간이라는 옥상에 대한 로망, 도시 한복판에서 열린 공간을 만날 수 있다는 이점, 건물을 통해 올라가서 예상치 못한 공간을 만난다는 반전 같은 것이 사람을 매료하는 것 같다”고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날씨의 지배에서 놓일 수 없는 옥상에서 겨울에도 계속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마이크임팩트는 올겨울 옥상을 전시장으로 활용하는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풍경이 입체 화면처럼 펼쳐진다</font></font>옥상의 가장 생산적인 활용 예인 소규모 텃밭을 응용해 좀더 큰 규모의 공동 경작지로 운영하는 사례도 눈에 띈다. 도시에서 농사짓는 청년들의 협동조합 ‘파릇한절믄이’(파절이)에게 올해는 도전의 해였다. 이들의 1호 ‘공중텃밭’은 땅보다 하늘과 더 맞닿아 있다. 공중텃밭은 서울 마포구 구수동의 한 건물 옥상을 빌려 만든 공동 텃밭이다. 264m² 남짓한 공간의 절반을 밭으로 가꿨다. 올해 첫 봄, 여름, 가을을 지냈다. 상자텃밭을 줄지어 세우고 서랍 등 폐품에 흙을 채워 거기에 씨를 뿌렸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는 흙을 쏟아부어 말 그대로 밭을 일구었다. 파절이 대표 나혜란(27)씨는 과의 전화 통화에서 공중에 일군 밭의 1년을 이렇게 전했다. “사실 수확량은 상자텃밭에서 더 많았다. 결과물로 봐서는 땅에서 작물을 기르는 노들텃밭, 상자텃밭, 옥상텃밭 순서였다. 흙을 깐다고 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흙이나 양분이 배수판 밖으로 다 빠져나갔다. 땅이야 지력도 있고 원래 지닌 힘이 있는데… 우여곡절이 많았다.” 어쨌든 파절이 회원들은 그렇게 거둔 수확물로 올겨울을 날 예정이다. 공중텃밭에서 생산한 작물들을 말리거나 절여 겨울을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다. 더불어 올겨울은 지난해 겨울과 마찬가지로 서울 홍익대 인근에 내년 봄 개장할 공중텃밭 2호를 준비하느라 바쁠 듯하다. 이렇게 도심 빌딩 옥상에 파릇한 작물들이 씨앗을 퍼트려가는 중이다.
도시·공간 기획자 배영욱씨는 옥상을 ‘알파 공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최근 주거공간 건축에서 그동안 버려지던 틈새 공간을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는 알파룸 구조가 주목받고 있다. 오래된 다세대주택이 모인 동네에서는 옥상이 알파룸으로 쓰이는 듯하다”고 했다. 남산 아래 사는 청년문화기획자 조한비(27)씨의 옥상이 그랬다. 10월3일, 조씨를 만나 구불구불 따라간 골목은 계속 오르막을 탔다. 골목 끝을 가로막고 세워진 집에서도 가장 위층이 조씨의 집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베란다를 통해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폭의 계단을 만나면 드디어 옥상이 등장한다. 풍경이 입체 화면처럼 펼쳐진다. 왼쪽에 남산타워가, 정면 저 멀리 하얏트호텔이, 오른쪽에 나무숲에 가려진 곳이 용산 미군기지다. 남산3호터널에 진입하고 빠져나오는 차들이, 늘어진 한낮의 햇살처럼 여유롭게 오가는 모습도 내려다보였다. 하지만 덩그러니 놓인 나무 테이블 하나와 벤치 두 개가 전부인 이곳이 동네에서 소문난 옥상이라고? 내심 실망하던 차에 조씨가 등 뒤에서 부스럭대더니 노란색 파라솔을 펼친다. 그 아래 캠핑 의자 두 개가 놓였다. 아래층에서 길게 연결한 전선에 스피커를 연결해 음악도 튼다. 어느새 옥상은 카페 못지않은 인터뷰룸이 되었다. 태생적으로 별다른 용도 없이 펼쳐진 옥상은 마음먹기에 따라 새로운 장소로 재탄생했다. 조씨는 옥상에서 낮에는 파라솔 아래 누워 일광욕을 하고, 밤에는 친구들을 모아 술과 음식을 먹었다. “한 번도 마당이 있거나 옥상이 있는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요. 계속 아파트에서만 살았으니까. 이런 호사가 어디 있겠어요? 욕조를 갖다놓고 반신욕도 하고 싶었고, 주방 공간을 마련해 옥상에서 음식을 해먹고, 캐노피를 치고 생활해보고 싶기도 했는데…. 자발적 노숙이라니, 그랬다면 진짜 특이한 인터뷰이가 되었겠지요?”
<font size="4"><font color="#008ABD">개인적이거나 상업적이거나</font></font>조씨의 옥상에서 여러 종류의 옥상이 내려다보였다. 바람에 빨래가 나부끼기도, 장독이 올려져 있기도, 고추나 상추 모종이 심긴 화분과 스티로폼 박스가 줄을 서 있기도 했다. 물탱크만 덜렁 놓인 채 비어 있기도 했고 커다란 광고판을 힘겹게 짊어진 옥상도 있었다. 우리는 남산 자락 아래 저 멀리 어딘가 캠핑장으로 꾸며놓은 어느 카페의 옥상과 전망이 좋기로 소문난 바의 옥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개인적이거나 상업적이거나. 생산적이거나 소비적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곳처럼 버려져 있거나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거나. 가을 뙤약볕에 얼굴을 덩그러니 노출한 채 도시 공간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옥상은 그렇게, “공중의 땅”이자 “도시의 마지막 미답지”()로 남아 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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