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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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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는일

스님이 먼저인 타이, 도장을 찍지 않는 이스라엘, 집에서도 모르는 도경을 아는 외교부…누군가에겐 너무 쉽고, 누군가에겐 ‘넘사벽’인 국경
등록 2013-06-27 11:47 수정 2020-05-03 04:27

바다로 국경을 건너고 있었다. 2011년 11월, 말레이시 아 랑카위에서 타이의 리뻬섬으로 가는 길이었다. ‘스피 드 보트’라 불리는 배에 앉아서 바닷물로 샤워를 하는 참이었다. 고속 엔진을 단 작은 배가 파도를 가르자 바 닷물이 끝없이 비를 뿌리듯 얼굴로 몰아쳤다. 어느덧 해 수 샤워도 익숙해질 무렵, 주머니 속 휴대전화의 진동이 느껴졌다. 아니, 누굴까. 집에는 지방출장 가듯 눙치고 왔는데, 누굴까. 손으로 물살을 가리고 휴대전화 문자 를 확인했다. ‘귀하는 지금 여행 위험지역 포함 국가 여행 중….’ 회사에도 휴가를 내면서 어디 간다고 말하지 않아 서, 여기에 와 있는 걸 아는 이가 없었는데 ‘빅브러더’ 외 교부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자동로밍 휴대 전화의 통신망이 말레이시아에서 타이로 바뀌면서, 외 교부는 친절하게도 타이 영사관의 전화번호 등을 알려 주었다. 아무리 뛰어봤자, 외교부 손바닥. 철조망은 물론 경계 표시도 없는 바다로 국경을 넘는 경험은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국가가 무서웠다, 고마웠다.

돈으로 ‘빨리’ 해결하는 발리 서비스

어김없이 돌아온 휴가철, 국경을 넘는 이가 많다. 2012년, 한 차례 이상 해외여행을 다녀온 인구는 1373 만여 명에 이른다. 한국을 찾은 외국 관광객도 지난해 처음 1천만 명을 돌파했다. 이제 국경을 넘는 경험이 일 상을 파고들었다. 출입국 심사를 받기 위해 늘어선 줄 에서 하릴없는 시간을 보내고, 국경에서 보았던 풍경과 국경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국경은 여러 가지 가 응축된 곳이다. 어떤 여권을 가졌느냐가 어떤 사람인 지의 기준이 되는 지구적 불균형이 드러나기도 하고, 지 금 가려는 나라의 문화적 특색이 처음 감지되기도 한다. 2008년 9월, 앙코르 유적이 있는 캄보디아 시엠레아프 를 출발해 타이 방콕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좌석이 바닥에 제대로 붙어 있지도 않은 미니버스를 5 시간 동안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캄보디아 국경 포이 펫에 마침내 이르렀다. 먼저 캄보디아 출국 심사를 마치 고, 버스를 탔다. 타이로 가는 짧은 길에 탄 차량은 서울 에서 마을버스로 수고하다 ‘이주’해온 중고 버스였다. 저 옆으로 서울과 분당을 오가던 1005-1번 좌석버스도 보 였다. 하여튼, 이런 풍경을 잠시 지나쳐 타이 아란의 출 입국사무소 앞에 이르렀다.

우기의 절정, 태양은 머리 위에 작열하고 후텁지근한 공기가 몸을 감싸는데, 맙소사 줄이 길었다. 내 평생, 이 주노동을 가장 원망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앞에 늘어선 이들을 보니 관광객 못지않게 타이로 일하러 가는 캄보 디아인이 많았다. 이들은 대개 손에 서류를 가지고 입국 심사를 받았다. 이들에 대한 심사는 오래 걸렸다. 때로 문제가 있는지,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어딘가로 데려가는 이들도 있었다. 다리는 아프지, 태양은 뜨겁지, 죽을 맛 이었다. 1시간 넘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가끔씩 누군 가 줄도 서지 않고 앞으로 가 입국 심사를 받았다. 붉은 가사를 입은 스님이었다. ‘스님 먼저’, 불교의 나라에서는 그렇게 스님을 공경하고 있었다. 외국인도 감히 왜 새치 기하냐고 말하지 못했다. 타이에서는 타이 법을 따라야 하니까.

여권에 남편 이름… 알아야 넘는다

비행기가 한꺼번에 사람들을 쏟아내는 시간, 공항의 입국 심사는 괴롭다. 금쪽같은 휴가, 시간은 정말로 금 이다. 공항에 일단 내리면 종종걸음으로 출입국 심사대 를 향해 달려간다, 눈을 굴리며 사람들의 인종과 국적을 스캔해 빨리 심사가 끝날 줄을 찾는다… 이렇게 잔머리 를 굴려도 현실은 기대와 다르다. 머피의 법칙처럼, 내가 선 줄의 심사는 유독 느리고, 심지어 나보다 늦게 온 옆 줄 사람이 먼저 나가는 ‘슬픔’도 맛본다. 인도네시아 발리 의 오후 시간대, 세계에서 밀려온 비행기 덕분에 출입국 심사는 1시간 이상 걸리기 십상이다. 여기엔 스님이 아니 라도 빨리 들어갈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돈이다. 발리에 는 ‘패스트 트랙’(Fast Track)이라고 불리는 제도가 있 는데 미리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출입국 심사를 쾌속으 로 해줄 사람이 기다린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이름표를 들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비용을 지불한다. 짐을 찾는 사 이, 그가 비자를 받아주고 입국 심사를 빨리 받게 해준 다. ‘그분’을 쫓아가면 짐도 옮겨주고 택시까지 잡아준다. 이렇게 걸리는 시간은 빠르면 5분. 인터넷에 여러분이 ‘강추’하는 서비스다.

필리핀에 이모가 조카를 데리고 가는데, 대책 없이 가 면 낭패다. 부모를 동반하지 않은 15살 미만의 한국인이 필리핀에 입국하려면, 부모의 영문 동의서가 있어야 한 다. 그것도 ‘가까운 법률사무소’에서 공증을 받아야 한 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도착해 3120페소(필리핀 화폐) 를 내야 입국 절차가 끝난다. 어학연수 비자를 받지 않고 들어와 어학원에 다니는 한국 학생이 많아서 생긴 제도 라고 한다. 엄마와 함께 간다면? 성(姓)이 다르니까 영문 가족관계증명서가 있어야 한다. 물론 방법이 있다. 2012 년 6월, 필리핀 세부에서 입국 심사를 받는데 옆줄에 있 던 여성이 남자애들과 함께 아무런 서류도 보여주지 않 고 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이상해 물었다. 그는 “여권 에 남편의 영문 이름을 적어두면 된다”고 했다. 이렇게 알아야 국경도 넘는다. 한국 사람들이 오죽했으면 저런 제도가 생겼을까 싶지만, 조카에게 아름다운 필리핀 바 다를 보여주고 싶은 경향 각지의 이모삼촌들, 이런 장벽 앞에서 기가 죽는다.

입국 비자에 얽힌 이런 경험담도 있다. 입국하려면 전 자여행허가서(ETA)를 받아야 하는 나라가 있는데, 인 터넷으로 신청해 받으면 조금 싸고, 공항에 도착해 받으 면 30달러를 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지인과 함께 그 나 라에 갔다. 그 나라를 잘 아는 지인은 공항에서 ETA를 받으러 가려는 사람을 막았다. 그냥 입국 심사를 받자고 했다. 자신에게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권 사이 에 10달러 지폐를 슬쩍 넣어주었다. 그들의 순서가 됐는 데, 금방 입국이 끝났다. 나중에 지인은 “그 출입국 직원 이 ‘다음에 오면 꼭 자기를 찾으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 렇게 가난이 부른 풍경은 국경에서 시작된다.

여행자에 대한 배려로 출입국 도장을 여권에 찍지 않 는 나라도 있다. 이집트에서 요르단을 가려면, 반드시 이 스라엘을 통과해야 한다. 이집트 타바를 출발한 여행자 들은 국경에서 출국세를 내고 이집트를 떠난다. 한참을

걸어가면 이스라엘 에일라트 초소에 이른다. 2002년 이 곳을 지난 사람들에 바탕하면, 이스라엘 출입국사무소 는 여권에 이스라엘 도장을 찍지 않고 그냥 입국 종이를 준다. 이스라엘 도장이 여권에 있으면 입국을 거부하는 나라가 많기 때문이다. 여행자들이 다른 종이에 찍어달 라고 하소연해서 생긴 변화다. 이렇게 입국해 택시를 타 고 한참을 가면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에 이른다. 이스 라엘에서 출국세를 내고 다시 공동경비구역을 걸으면 드 디어 요르단 국경 초소가 나온다.

한국을 가기 위해 온 라오스 국경

전쟁의 세기, 나치에 쫓겨 독일을 떠나 “구두보다 나 라를 더 자주 바꿔가며” 떠돌았던 베르톨트 브레히트 같 은 시인도 있었다. 그는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 친구 발 터 베냐민 등을 생각하며 을 썼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 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오랜 세월 이 지났지만, 지금도 살아남기 위해 국경을 넘는 이들이 있다.

인터넷 여행자 커뮤니티 ‘태사랑’에는 탈북자를 만났 다는 이야기가 있다. 메콩강이 가까운 라오스나 타이 북 부는 탈북 루트다. 이곳을 여행하다 중국에서 넘어온 탈 북자를 만나는 일도 생긴다. 가끔은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는 사람도 있다. 환갑을 기념해 배낭여행을 떠난 부부 의 2008년 라오스 경험담이다. “루앙남타에서는 말로만 들었던 탈북자 가족과 만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길 가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는 데 청년 하나가 들어와 주인에게 무언가를 묻는데 주인 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 뒤 그 청년 이 다시 오더니 우리를 향해 다가와서는 한국어로 혹시 한국분이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하면서 제발 자기를 도와달라고 합니다.”

듣고 보니, 그 사람은 탈북자 아내를 둔 조선족 남편이 었다. 중국에 살던 부부는 신분이 불안해 살기가 어려웠 다. 부부는 아내가 한국으로 가면 가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내는 한국에 입국할 길이 있는

타이로 가려다 라오스 국경에서 이민국에 붙잡혔다. 남 편은 아내를 구금하고 있는 라오스 이민국 직원의 이름 도 몰랐다. 오직 전화번호만 알고 있었지만, 당시 전화마 저 불통이었다. 애타게 아내의 행방을 찾았지만, 중국어 가 통하지 않아 애끓는 남편을 부부가 도왔다. 함께 라 오스 이민국을 찾아헤매 결국 아내의 소재를 알게 됐다. 그들의 이야기는 “일이 잘되기를 빌면서 아쉬운 작별을 하고 나서도 아내는 그 청년의 속이 새카맣게 탔을 텐데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 먹여 보낼 걸 그랬다고 안타까워 하더군요”라고 끝난다.

불법체류 단속에 걸린 이주민

언젠가, 인천공항에서 방콕행 비행기를 타다가 비행기 입구 앞에서 어두운 얼굴의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마치 조회를 하듯이 줄을 맞춰 늘어선 30~40명 사람들 의 손이 부자유스러웠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 만 그들의 체념한 눈빛은 아직도 또렷이 떠오른다. 그들 은 한눈에 보기에도 추방당하는 사람들이었다. 불법체 류 단속에 걸린 이주민임이 분명했다. 사열종대로 늘어 선 그들 앞에는 경찰이 있었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있었 지만, 이렇게 처지가 달랐다. 누군가에겐 너무 쉽고, 누 군가에겐 ‘넘사벽’인 곳, 여기가 국경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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