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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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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은 잠을 자도 돼요, 당신”

등록 2013-05-11 16:23 수정 2020-05-03 04:27

햄릿이 ‘죽는 것은 잠자는 것’이라고 말한 이후, 잠은 죽음과 같은 시간으로 생각돼왔다. 꿈꾸는 일이 없다면, 죽음과 잠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의식의 중지와 망각으로서의 잠은 죽음에 대한 은유이며, 죽음의 예비적인 체험이다. 그런데 이런 장면이 반복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잠들어 있다. 그 잠든 사람을 보는 시선은 어떠한가? 사랑하는 연인과 어린아이의 잠든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의 의식이 중지됐을 때만, 완전하게 그를 나의 시선 안에서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장면에는 언제나 약간의 슬픔이 묻어나온다. 잠든 사람의 생과 죽음의 아득한 순간이 문득 날카로운 실감으로 전해져온다면?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김충규, 문학동네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김충규, 문학동네

아까운 나이의 봄날에 돌아간 시인이 마지막으로 발표한 게 ‘잠’에 관한 시였음은 다만 우연일 것이다. 김충규의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라는 시에서 ‘당신’은 내내 잠에 빠져 있다. “매우 상냥한 것이 당신의 장점이지만/ 잠자는 모습은 좀 마녀 같아도 좋지 않을까 싶지”기도 하다. ‘당신’은 너무 많이 자기 때문에 “아침의 창가에서 요정의 빛으로 뜨개질을 하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마부가 석탄 같은 어둠을 마차에 싣고/ 뚜벅뚜벅 서쪽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지 못하지만 꼭 봐야 할 건 아니지”라고 생각한다. 내내 잠에 빠져 있는 ‘당신’이 “잠자면서 잠꼬대를 종달새처럼 지저귈 때/ 바람 매운 날 이파리와 이파리가 서로 입술을 부비듯/ 한껏 내 입술도 부풀”게 된다. 이 상냥하고 몽환적이며 에로틱한 시에서 내내 잠들어 있는 당신은 과연 살아 있는 존재일까? 이 질문을 너무 진지하게 던져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잠든 연인들의 얼굴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누워 있는 것이니까. “죄를 키워서/ 내 몸은 참호입니다”(‘불행’) 같은 또 다른 아픈 문장들도 오래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세상의 모든 시집은 유고 시집’이라고 말한 것은 장정일이었다. 이 말은 문학적 글쓰기의 비유로서는 매력적이지만, 살아 있는 자의 언어와 이미 돌아간 자의 언어 사이의 간격 앞에서는 무력할 것이다. 언어를 남기고 돌아간다는 것은 친절하고도 가혹한 일이다. 그의 원고는 그의 부재를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그가 ‘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내 곁에서 잠든 사람도 어쩌면 부재하는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다만 “더 깊은 잠을 자도 돼요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만이 내게 허락돼 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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