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것, 입을 가진 것을 키우는 일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그래도 무언가를 키우는 일이 안겨주는 평범한 위로를 완벽하게 포기할 수 없을 때, 작은 화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죽은 식물을 화분에서 뽑아내고 새로운 식물을 옮겨 심는 일이 반복될 때마다, 생명의 사소함과 죽음의 평범성에 대해 무감해져갔다. 언제 어떻게 피어날지 알 수 없는 씨앗을 화분에 심은 일 따위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씨앗이란 지금은 보이지 않는 가능성의 이름이고, 씨앗을 심는 일은 그 가능성과 미래에 대한 소망스러운 행위다. “씨가 품는 것은 영원이요 무한이다”(함석헌)라는 말은 씨앗의 시간 속에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시간이 숨겨져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씨앗을 심는 일은 그 잠재된 것을 확인하려는 행위, 혹은 희망을 정당화하는 행위일까?
조경란의 창작집 (창비)에 실린 단편 ‘파종’은 담백한 톤으로 일상의 시간을 직조해내는 응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야기로 환원될 수 없는 이미지들의 세밀한 조형적 배치는, 칼날 같은 고독을 조용히 삼키고도 상냥한 문장의 리듬에 실려 있다. 사고로 남편과 아이를 잃고 부모와 함께 사는 여자가 도쿄에 살고 있는 동생 집을 아버지와 함께 방문하면서, 가족 각자의 상처의 몫은 교환도 공유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바다코끼리들이 송곳니 때문에 무심히 상대와 자신을 찌르게 되는 도입부의 이미지처럼, “우리는 찌를 때마다 좀더 오래, 몸속 깊이 서로의 송곳니를 작살처럼 쑤셔넣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가족이라는 무심한 가해의 공간. 도쿄의 이국적인 사물과 공기의 감각 속에서 이 가족은 다른 시간을 경험한다. 아버지가 시장에서 꽃씨인 줄 알고 사온 씨앗은, 시금치의 씨앗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이 시금치의 ‘파종’을 둘러싼 사소한 에피소드는 가족 사이의 새로운 매개의 가능성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 파종이 희망의 정당화와 소통과 화해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 것은, “회복은 시간에 비례하는 건 아니”며, “그동안 허공을 날고 있었던 게 아니라 이 세계서 자꾸만 미끄러지고 있었던 것”이라는 문장들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파종’이라는 의례 자체이며, 그 의례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미지의 순간으로 만들려는 수행적인 행위다. 그러니까 ‘씨앗’은 피어나지 않아도 괜찮거나, 혹은 피어났다가 필연적으로 죽어가게 될 어떤 것이다. 씨앗은 죽음과 재생의 아득한 시간을 품고 있다. 지금 볼 수 없는 것, 한계지을 수 없는 것을 ‘무한’이라 한다면, 4월의 씨앗은 그 무한을 향해 땅속에 묻히는 것들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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