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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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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구

제4회 <한겨레21> 손바닥문학상 가작
등록 2012-12-15 01:59 수정 2020-05-03 04:27

어릴 적, 동네 어귀에 자그맣게 흐르던 개천이 있었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서 꼭 한 번은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개천은 정말 볼품없이 작은 물줄기였다. 개천 곳곳에는 색이 바랜 잡초가 제멋대로 자라서 무성했고, 동네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온갖 쓰레기를 처음에는 숨기듯이 버리다가 곧 아무렇게나 버려두곤 했다. 여름이 되면 쓰레기가 썩는 냄새 때문에 학교 가는 길이 고역이었다. 어느 날 개천 쓰레기 더미가 쌓인 곳에 개 한 마리가 자리를 잡았다. 어디서 온지 알 수 없는 떠돌이 개였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기 싫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가다 보면 꼭 한 번씩 그 개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작고 야위었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노란 털을 가진 개. 그야말로 황색 개, 황구였다. 아침에 학교 갈 때는 보이지 않다가 저녁때만 되면 나타나서 쓰레기를 뒤지며 사람들 눈치를 살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작고 약한 것들은 곧잘 그것보단 조금 더 센, 하지만 결국 약한 것들의 표적이 되곤 했다. 개천 위 길가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개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다. 흔한 풍경이었다. 그 정도 폭력은 너무도 흔해서 그것이 폭력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조그만 짱돌에서 시작한 돌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개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꼬리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잔뜩 말려 있었고 온몸의 털은 곤두섰다.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대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돌을 피하던 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곳까지 몰렸다.

동네 골목대장 같은 목소리 큰 아이가 자기 머리통만 한 돌을 던졌다. 결국 개는 갈비뼈 어딘가에 돌을 맞았는데 자지러지는 비명이 발작적으로 터져나왔다. 동시에 아이들 입에서도 웃음소리가 발광적으로 튀어나왔다. 입에서 눈으로, 콧구멍에서 귓구멍으로, 가슴팍에서 모든 가죽 껍데기에서 웃음이 쏟아져나왔다. 그러곤 더 큰돌을 들어 개의 머리에 조준했다. 개는 비명을 지르다 한쪽 구석에서 있던 나를 보았다. 동시에 아이들의 눈도 내게 향했다. 갑자기 더 큰 웃음이 나를 향했다.

휙 돌아서 집으로 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온 사위를 물들였고 모든 사물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 선혈과도 같은 핏빛이 달려가는 내 그림자와 접붙여졌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비명도 이어졌다. 모퉁이를 돌아 골목길로 들어서자마자 집까지 뛰어갔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돌아보면 개의 눈이 바로 뒤에 붙어 있을 것 같았다. 대문을 밀치고 들어가 곧장 방에 누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다. 숨이 막혀 갑갑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이불을 벗어던지려고 해도 이불은 떨어지지 않았다. 천근에 가까운 무게로 나를 눌렀다. 소리를 지르려 해도 이불 속 어둠이 입을 잡고 열지 못하게 했다. 어둠은 점점 커져가서 입의 형상이 되어갔다. 황구의 입이다. 한쪽 머리가 터진 채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내 눈 앞에서 침을 줄줄 흘리며 커다란 입이, 커다랗고 검은 입이 나를 핥는다. 그것을 피해보려 하지만 조금씩 끌려갔다. 허우적대며 끌려갈 뿐이다. 그대로 커다란 입에 빨려 들어갔다. 꿈이란 걸 알면서도 꿈인지 확신할 수 없는 꿈속에 빠져 허우적댄다. 그러다 눈이 번쩍 떠졌다.

한참을 눈만 말똥말똥하게 뜨고 천장만 바라본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근육통이다. 천장엔 아무런 무늬조차 없다. 천장을 뚫고 방들을 지나 옥상 너머 하늘을 상상해본다. 온통 희뿌옇다. 석 달째 편의점 야간 알바는 낮과 밤의 감각을 없앴다. 점장은 교대 시간을 줄여준다고 했지만 오히려 오늘은 오전 10시가 되어야 퇴근할 수 있었다. 커튼을 쳐도 한낮의 햇빛은 얇은 천을 뚫고 들어온다. 피곤해 눈이 감겨도 쉽사리 잠은 오지 않는다. 결국 몸을 일으켜 일전에 사둔 검은색 도화지를 사다가 창문에 붙인다. 아주 좁은 틈으로도 빛은 새어 들어온다. 감은 두 눈 사이로도 얇은 빛이 파고든다. 그래도 잠을 청해본다. 자야 한다. 잔다. 자자.

얼마나 지났을까. 벨 소리가 머리맡에서 울려댔다. 엄마다. 액정을 멍하니 쳐다만 본다. 휴대폰은 춤을 추면서 한 바퀴 돌아간다. 춤은 멈추지 않는다. 몇 시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간신히 전화를 받자마자 왜 이리 전화를 안 받니, 집에는 언제 오니, 너 일은 잘되고 있니, 아버지도 예전 같지 않다, 졸업은 언제 하니, 절대로 대기업에 가야 해, 라는 말이 쏟아져나온다. 대화가 아닌 대사다. 엄마라는 배역을 맡은 배우처럼 항상 이렇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느리게, 빠르게, 엄격하게, 흐느끼듯, 심각하게 톤을 바꿔가며 대사를 읊는다. 일방적인 통화가 끝나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일할 시간이다. 편의점, 자취방, 쪽잠. 이 수레바퀴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질문은 쌓여가지만 대답을 찾을 수 없어 결국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여름의 야간 편의점 알바는 쉽지 않다. 술집 알바도 겸하기 때문이다. 야외 테이블에서 술 마시는 손님이 늘어갈수록 소주병, 맥주캔 따위를 치우는 시간도 길어진다. 치우는 일은 어렵지 않은데 반드시 하루에 한 번은 술 취한 놈들이 시비를 걸었다. 욕먹는 거야 그냥 참고 넘어갔지만 뒤통수를 맞기도 할 땐 분노보다 지쳐간다. 점장은 무조건 네가 참아, 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기계처럼 술병의 바코드를 찍을 때 어, 너 여기서 일하냐. 별로 친하지도 않은 기껏해야 몇백 명이 모이는 개강 총회에서 술 한두 번 같이 먹었던 선배였다. 힘들겠다.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은데, 여기보다 벌이 더 좋은 알바자리 하나 소개해줄까? 이제는 만성이 된 피로감 때문인지, 아까 먹은 유통기한 지난 김밥 때문인지 심장이 벌렁거렸다. 귓바퀴에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석 달만 하면 등록금 1년치는 물론 더 잘 버티면 조그만 사업도 하나 할 수 있을 정도의 목돈을 만질 수 있다고 한다. 조심스레 불법적인 일이냐고 물으니 선배는 곧장 불같이 화를 냈다. 합법적인 일이라고 한다. 몸만 멀쩡하면 대한민국 대학생 남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한몫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했다. 그는 한턱 쏜다며 날 억지로 데려간 삼겹살집에서 바짝 구워진 고기 한점 한점 집어먹을 때마다 합법을 강조했다. 삼겹살 기름으로 반짝거리는 입술은 계속 쉬지 않았고 ‘돈은 그렇게 벌어야 해’라고 주문을 외우는 듯했다.

그가 소개해준 자리는 경비업체 용역이었다. 기본적인 업무는 말 그대로 교대로 경비를 서는 것뿐이었다. 하루에 기본 수당은 15만원 이었지만 그건 원청에 해당하는 경우고 제일 큰 경비업체에서 하청을 준 것을 다시 재하청을 준 갑을병정, 정의 위치였던 우리에겐 온갖 수수료를 제하고 8만원이라고 했다. 다른 일 없이 24시간 맞교대로 경비를 서기만 하는 일에 8만원은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다음날, 편의점 월급이 들어왔는지 현금인출기로 확인했다. 교대하러 10시30분에 온 점장에게 오늘부로 알바 그만둔다고 말했다. 개새끼, 소새끼, 말새끼 온갖 새끼들이 나오다가 시급 올려준다며 인생치사하게 살지 말라고 한다. 심장이 쿵쾅쿵쾅 울렸다. 머릿속에 여러 새끼들이 떠다녔다. 안녕히 계세요. 뒤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휴대폰 전원을 끄고 달렸다. 심장이 아파왔다. 심장 끝부분이 콕 콕 찔리는 듯했다. 내가 나쁜 놈이다. 오늘은 내가 나쁜 놈 역할을 한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역을 하려다 보니 이렇게 심장이 아픈 것이라 생각했다. 길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의 눈빛이 나를 비난하는 듯했다. 나를 피해서 걸어가는 듯했다. 아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처음엔 다들 마약이라도 하나 생각했다. 다들 하나같이 눈빛은 흐리멍덩하고 꿈을 꾸는 듯 잠을 자는 듯했다. 자세히 보면 그냥 잠을 자고 있었을 뿐이다. 잠이 오지 않더라도 억지로 자야 했고 잠을 자고 싶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배가 알려준 주소대로 사무실을 찾아갔다. 별다른 인사나 소개도 없이 곧장 주차장의 승합차로 향했다. 흰 셔츠와 잘 다린 검은 바지를 입은 나와 똑같은 차림의 남자들을 만났다. 서로 뭔가 어색한 눈빛을 교환하며 승합차에 탔다. 몇 년 전에 산 구두가 맞지 않아 발가락을 계속 압박했다. 한참을 가다 서다 한 차는 강남 어딘가의 빌딩 앞에 섰다. 차에서 내리자 멀리서 선배가 웃으면서 손짓했다. 오늘은 일단 하루 정도 다른 곳으로 지원 나가는 일이라고 옆에서 선배가 설명해줬다. 일하기 전에 대기하는 곳이라며 여러 대의 관광버스를 가리킨다. 버스에 올라타니 우리와 비슷한 나이대의 젊은 사람들이 창가에 붙어 눈을 감고 있다. 처음엔 다들 마약이라도 하나 생각했다. 다들 하나같이 눈빛은 흐리멍덩하고 꿈을 꾸는 듯 잠을 자는 듯 아무것도 안 하는 듯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자세히 보면 그냥 잠을 자고 있었을 뿐이다. 잠이 오지 않더라도 억지로 자야 했고 잠을 자고 싶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잠자코 몇 시간을 그렇게 앉아 있자니, 아니 사실 몇 분일 수도 있다. 버스 안에서의 시간이 제멋대로 한없이 길게 늘어졌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의 비율은 점점 올라갔다.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그것보다는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찾아왔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사람 많은 곳, 특히 밀폐되었다고 느껴지면 이산화탄소가 거품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거품이 한없이 커져가서 나를 감싸고 결국에는 깔아뭉개며 짓이겼다. 실제로 그런 적은 없었지만 거품이 나를 덮치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잠깐 버스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딱 봐도 팀장급처럼 보이는 사람이 버스에 올라왔다. 돼지새끼들 이제 일어나, 긴장해라. 바로 투입된다. 바로 옆에 있던 청년의 머리통을 퍽 소리 날 정도로 세게 내리치며 그는 계속 소리쳤다. 모두 어리둥절해 버스에서 내리니 그 앞에는 붉은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다. 같은 색의 머리띠를 한 사람들이 춤추고 있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붉은 깃발이 물고기가 되어 허공을 유영했다. 물속에서 춤추며 헤엄치고 있다. 검은색과 붉은색의 대비가 거리를 가득 메운다. 큰 소리가 들린다. 여러 가지 함성이 뒤엉킨다.

확성기가 울린다. 정당한 권리 행사를 방해하는 용역깡패, 물러가라. 불법적인 용역깡패는 당장 사라져라. 용역깡패는 불법이다. 용깡놈들 너거들은 양심도 없느냐. 용깡, 용깡, 무슨 새로 나온 과자 이름인 줄 알았다. 정신 못 차리고 뒤에 어정쩡 서 있을 때 팀장의 한바탕 욕설이 우리들로 하여금 저절로 대열을 만들게 했다. 이열 종대로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이들이 섰다. 뭔가 모를 긴장감이 목을 마르게 했다. 땀이 연신 흐르는 얼굴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앞만 바라본다. 그럴 때 머리 위로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대로 밀어버린다. 명심해, 우리는 사 측에서 합법적으로 관리를 위임받았다. 저들은 불법노조, 불법 빨갱이들이야. 밀어, 밀어버려. 대신 다치면 너네 손해다.

뒤에서 밀고 앞에서 밀고, 옆으로 갔다가 우르르 몰려가서 붉은 머리띠 한 사람을 들었다. 선배가 소리친다. 한쪽 다리 들어. 밖으로 내보내. 정당한 권리를 막지 마라, 이 깡패 새끼들아. 이 개 같은 용깡놈들.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진다. 때리지 마. 손대지 마.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어차피 이 새끼들 아무것도 못해. 어떻게 이렇게 서로 모순된 말들이 부딪치고 있을까. 순간 편의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익숙한 곳이 그리워진다. 붉은 물고기는 그들이 모여 있는 바닷가로 내던졌다. 나와 선배는 열심히 물고기들을 내던진다.

“네가 먹는 것이 곧 너다.” 유통기한 지난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먹을 땐 꼭 한 번쯤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 해장국을 먹고 있다. 24시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빨갛고 뜨거운 이 탕이 곧 나다. 뭐가 뭔지 모를 시간을 보내고 간신히 먹는 이 한 그릇이 나다.

비가 그쳐간다. 한여름의 소나기였다. 선배와 지쳐 있는 내 곁으로 팀장이 다가왔다. 네가 데려온 놈 오늘 열심히 하더라. 다른 애들보다 조금 더 챙겼다. 앞으로도 우리 잘해보자. 팀장은 내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파이팅을 외친다. 선배가 옆에서 수고했다며 봉투를 건넨다. 두툼함이 느껴진다. 확인해보지도 않고 누가 볼세라 땀 냄새 잔뜩 밴 바지 안쪽의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넣는다. “네가 먹는 것이 곧 너다.” 언제인가 수강 신청을 실패해 아무 생각 없이 들었던 교양수업 중에 들었던 어떤 철학자의 말이다.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유통기한 지난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먹을 땐 꼭 한 번쯤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 해장국을 먹고 있다. 24시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빨갛고 뜨거운 이 탕이 곧 나다. 뭐가 뭔지 모를 시간을 보내고 간신히 먹는 이 한 그릇이 나다. 고추인지 캡사이신인지 모를 시뻘건 게 둥둥 떠다니다가 훌훌 넘어간다. 속이 뜨겁다. 열이 순식간에 올라온다. 캡사이신 덕분에 위는 피를 흘리고 있을 것이다. 봉투에는 하루 일당 12만원이 들어 있다. 2만원은 1천원짜리 스무 개였다. 그중 한 장은 심하게 찢겨서 스카치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나가면서 그 한 장을 중간에 섞어서 냈다.

우리 팀장, 김 프리는 자신을 꼭 김 프리라고 부르게 했다. 프리, 에프, 아르, 이, 이. 얼마나 좋으냐. 자유, 김 프리는 정말로 프리한 게 좋다고 했다. 얼굴선도 고왔고 몸도 날렵한 그는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친형한테 하듯이 자신을 프리하게 하라고 자주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 오래 있었던 동생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형, 담배 한 대만요. 처음 온 신입이 저런 말을 했다가 하루치 일당 대신 주먹세례를 받고, 욕은 세트로 받으며 쫓겨났다. 발길질은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옵션이었다. 요즘 새끼들은 다 저래, 하나같이 다 돌대가리야, 머리 없어? 어? 그런 거야? 너도 그러냐? 사실 김 프리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며 흥분할 때는 하청을 준 업체에서 입금이 원활히 되지 않을 때다. 그러다 김 프리와 눈이 마주쳤다.

한 대 맞을까봐 움츠리고 있는데 머리를 쓰다듬는다. 너 생긴 거하고는 다르게 오래 버틴다. 돈 많이 필요한가 보다, 열심히 해. 그러다 보면 언젠가 인생에 꽃핀다. 그때까지 뒈지지 말고 말없이 도망가지 말고 잘해. 그렇게 말하며 멀어져갔다. 너 의외로 인정받나 보다. 김 프리 옆에 딱 붙어다니는 똘마니가, 그를 보면 딱 똘마니란 단어가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딱 전형적인 똘마니의 모습이다. 어쨌든 김 프리가 의외로 자상한 말을 했다고 놀랐는지 말을 걸어온 것이다. 한번 시작한 그의 수다는 멈추지 않았는데 그는 김 프리를 보자마자 저 사람이 내 운명이란 예감이 있었다 한다. 이런 얘기를 대기시간 때마다 떠들어댔고 심지어 현장에 투입되어도 했다. 심지어 대치 중일 때도 귀에 대고 소곤소곤거렸다. 결국 그의 말에 의하면 김 프리는 거의 맨주먹으로 이 바닥에서 지금의 위치까지 오른 신화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비범한 인물이었다. 업계에서 독립해서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다른 프리 팀과 프리 팀들을 흡수하고 헤쳐나가면서 그가 보여주는 절묘하고 아슬아슬한 협상 능력과 거리낌 없는 폭력에 일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범죄의 역사에서 분명히 작더라도 하나의 축을 담당할 것이라는 확신을 그의 주변 모두에게 갖게 했다. 나는 센 놈이다, 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다니는 그 였다.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나갔다. 통장에 돈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쌓이는 돈만큼 그만큼의 용기도 생겨났고 달라져가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뭐가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그저 희망이, 작은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나도 언젠가, 어디에선가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늦게 출발한 시합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 다른 사람들과 같이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소박한 희망. 어느 날, 김 프리가 환한 얼굴로 와서는 비수기인 겨울이 오기 전에 돈 되는 재개발구역에 투입된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밖에 없는 동네라고 한다. 그냥 조심히 들어서 옮기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이번엔 원청에서 아주 두둑하게 보수 책정을 했다고 한다. 다른 프리팀과의 경쟁에서 우리의 김 프리가 그 일을 따낸 것이다. 우린 운이 좋다. 선배가 중얼거렸다. 이건 확실히 큰돈 된다. 김 프리가 모두를 돌아보며 외쳤다. 모두 같이 환호했다.

김 프리는 그때부터 열심히 준비했다. ‘스펙’ 쌓기 위해 온다는 지방의 경호학과 학생들도 동원했다. 경호학과 학생들은 이런 재개발 구역에서 용역 알바 한 것이 취업할 때 훌륭한 경력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용, 호랑이, 곰, 뱀, 봉황들이 나타났다. 온갖 동물들이 으르렁거렸다. 등과 팔에 목에 새겨진 그것들이 소화기와 각목을 든 이들과 함께 들썩였다. 기와가 널브러져 있고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다. 시뻘건 페인트칠이 이곳엔 아무도 있으면 안 된다고 증명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있다던 그곳엔 마스크 낀 사내도 아주 많이 있었다. 선배가 옆에서 저놈들 조심해, 라고 귀띔했다. 엄폐물이 세워져 있고 그곳에서 볼트가 날아왔다. 화염병도 날아오고, 욕도 날아오고, 벽돌도 간간이 날아왔다. 그런 대치가 계속되다 갑자기 군화 소리가 들리고 전경들과 경찰들이 뒤에 몇 겹으로 섰다. 순간 놀랐지만 김 프리가 무전기를 들고 있는 경찰 간부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 둘은 큰 소리로 웃고 간부는 김 프리의 어깨를 친밀하게 두들긴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한참 얘기를 나누던 김 프리가 돌아와서는 얘들아, 우리 오늘도 돈 열심히 벌자, 자본주의 만세, 라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다 같이 따라서 웃었다. 그때 선배가 다가와서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팍을 보여줬다. 3천만원, 1천만원짜리 수표 세 장이었다. 나 그동안 정말 열심히 했다.

이거, 이 돈 부적 삼아서 오늘로 이 일 마무리지으려고 한다. 오늘 일끝나면 어머니랑 조그만 가게 하나 알아보려고, 고생 많이 하셨거든 우리 엄마. 우리 오늘 열심히 하자. 이따 일 끝나고 내가 거하게 술 한잔 살게. 선배는 환하게 씩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희망에 가득 차서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저렇게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희망이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것이다. 희망은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 어떤 아저씨가 사제로 만든 화염 방사기를 휘두르면서 위협한다. 그러자 용 문신을 한 어떤 이가 등의 용 문신을 꿈틀거리며 소화기를 쏘아댔고 호랑이 문신은 각목을 던진다. 죽창이 답례로 날아온다. 그 뒤로 볼트와 너트가 새총에 끼워져 날아온다. 내 옆에서 할머니 어깨를 잡아끌던 동료가 머리에 너트를 맞았다. 악 소리와 함께 피가 주르륵 흘러나온다. 김 프리가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전경이 군화로 땅을 쿵쿵거리며 찼다. 방패를 두들기며 온 사위를 그들의 소리로 가득 차게 한다. 정신없이 움직이는데 누군가 목을 잡아 끌어당긴다. 선배였다. 일단 뒤로 빠지자 한다. 위험하다고, 상황이 너무 안 좋다고. 그렇게 말하는 선배의 턱 부분에 내 주먹만 한 너트가 와서 박힌다. 그 장면이, 그 공간이 순간 흐르면서 천천히 퍽 하는 소리와 동시에 선배가 풀썩 쓰러진다. 뒤를 돌아보니 어떤 할머니는 우산 끝으로 동료의 눈을 찌르려 한다. 그가 우산을 빼앗아 얼굴을 가린 채 때린다. 누군가 사진을 찍고 있다. 찍혔을까. 보너스가 나온다고 했다. 내일까지 철거 완료하면 보너스가 나온다고 했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동네에 살던 작은 개가 달려들었지만 볼품없는 개는 누군가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진다. 그 녀석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소리는 모든 곳에 넘쳐나고 숨이 막혀온다. 이산화탄소는 거대한 거품이 되어 하늘에서부터 나를 짓이겨간다.

선배의 축 늘어진 몸을 부여잡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전경들이 벽을 만든다. 그들의 그림자로 사방이 어두워진다. 저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선배의 벌어진 품속에서 지갑이 보인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이 모르게, 절대로 내가 아닌 것처럼 지갑에 손을 올린다. 지갑 뒤로 선배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닌 척 지갑을 갖고 뛰어갔다. 저 멀리 김 프리가 보인다. 반사적으로 죽자 사자 뛴다. 넘어졌다. 일어났다. 쫓겨났다. 걸어갔다. 밀려났다. 움직였다. 숨이 찼다. 땀이 났다. 다시 뛴다. 소리 지른다. 쪽잠을 잔다.

영원 갔던 잠 속에서 눈을 떴다. 사방에는 소주병이 굴러다녔고 과자 부스러기들이 머리카락에 엉겨붙어 있다.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자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다. 어제에 이어 시뻘건 고춧가루가 떠다니는 매운탕을 떠먹는다. 머리를 울려대고 생선 비린내가 확 콧속을 파고든다. 속이 울렁거리다 못해 쏟아져 나오려고 해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걸 그대로 게워낸다. 게워낼 게 없어져도 한참을 변기를 붙잡고 앉아 있다. 화장실 문에 농장일 할 사람 급구, 휘갈긴 글씨가 눈길을 끈다. 일을 하면, 무슨 일이든지 하면 아무 생각도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식당집 주인 아주머니는 이 농장은 바다를 떠나 산속으로 꽤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두 번의 버스를 갈아타는 동안 아침 일찍 출발했던 길이 어느새 저녁 무렵이다. 인적도 없고 농장으로 가는 길은 엉망이다. 아주 드물게 있는 안내 표지판이 아니었다면 그냥 돌아갔을 것이다.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계속 길을 걸었다. 철망으로 된 문이 나왔다. 자물쇠가 걸려 있어 약간 흔들어보자 개들이 짖어댔다. 수십 마리의 개들이 동시에 짖어댔다. 고요한 산속에서 울림은 더 커져갔다.

개들의 소음 속에 사람의 소리도 조그맣게 들렸다. 누구야. 어떤 놈이야. 날카로운 말투에 놀라 어물거리며 간신히 말한다.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기에 왔는데요. 그거 붙여놓은 지가 언젠데.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야. 이런 일 할 수 있겠어. 영감이 알아서 처리해.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사내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사람이 같이 나왔다. 중년의 사내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차를 몰고 사라진다. 영감이라 불린 사람이 자기를 관리인이라 부르라며 따라오라고 한다. 그 와중에도 개들은 짖어대는 걸 멈추지 않는다. 관리인이 쇠꼬챙이를 들고 나오자 그제야 한 마리씩 조용해졌다가 작은 개 한 마리가 끝까지 멈추지 않는다. 우리 안으로 쇠꼬챙이를 찔러넣는다. 그러자 산속 농장에 고요가 찾아왔다. 일단 자고 내일부터 일하자. 창고 같은 곳에 담요 하나 던져주면서 관리인은 사라졌다. 창고에서는 개 냄새와 개털, 처음 보는 온갖 도구들이 뒤엉켜 있다. 그래도 이상하게 대충 정리한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스르륵 찾아온다. 몇 달 동안의 불면증이 무색하게 잠이 쏟아진다.

근데 투견에서 진 개는 그냥 버려져. 보신탕도 되지 못해. 바깥, 인간 세상하고 똑같지. 한 번 싸움에 진 개는 영원히 진 거야. 다시 이길 가능성은 없어. 너나 나처럼, 나나 너처럼 영원히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도망만 치다 어딘가에 나자빠져서 죽고 말겠지.

개 짖는 요란한 소리에 정말 오랜만의 달콤한 잠에서 깨어났다. 밖으로 나오자 관리인이 아직 있었느냐는 눈으로 쳐다본다. 일은 쉬웠다. 때 되면 개들에게 밥을 챙겨주면 되는 일이었다. 밥 주는 시간 말고는 개들의 짖는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각각의 소리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처연하기도 했고, 무섭게 혹은 무서워하며, 밥 먹을 때 말고는 소리가 그치는 일은 없었다. 관리인이 쇠꼬챙이로 철창을 두드릴 땐 산속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일을 한 지 며칠이 지났을까. 관리인이 밥을 먹다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점차 그 눈빛을 견디기 힘들어질 때 그가 말했다. 여기서는 두 종류 개가 키워진다. 투견하고 보신거리지. 그러고는 한참을 말없이 밥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근데 투견에서 진 개는 그냥 버려져. 보신탕도 되지 못해. 바깥, 인간 세상하고 똑같지. 한 번 싸움에 진 개는 영원히 진 거야. 다시 이길 가능성은 없어. 너나 나처럼, 나나 너처럼 영원히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도망만 치다 어딘가에서 나자빠져서 죽고 말겠지. 관리인이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할 때 농장 주인이 찾아왔다. 개들을 꺼내서 따라오라고 했다. 잔뜩 경계한 개 두 마리를 끌고 주인과 관리인을 따라가자 여러 가지 기구들이 보였다. 그러자 개들이 낑낑거리며 힘을 주며 버텼다. 아무리 목줄을 잡아당겨도 소용없다. 주인이 몽둥이로 개들을 후려친다. 질질 끌려가면서도 개들은 한사코 기구 근처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관리인이 개 한 마리의 목줄을 작은 컨테이너 벨트 같은 것에 연결한다. 그리고 스위치를 누르자 벨트가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헬스장의 러닝머신처럼 개는 달리기 시작했다.

개는 벨트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몸부림을 시작했다. 필사적이다. 미친개처럼 사방으로 몸을 뒤틀었다. 관리인은 익숙한 듯 몽둥이로 갈비뼈 부근을 사정없이 내리친다. 개는 흰자위만을 드러냈고 침이 튄다. 다른 개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훈련을 한다. 맞은 곳에서 피가 나온다. 관리인이 녹색 페인트 같은 것을 마구 뿌린다. 약이야. 너도 이렇게 해. 관리인이 내게 통 하나를 건넸다. 녹색의 약품을 발랐던 상처에는 다시 피가 나와 녹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다. 하루 종일 개를 바꿔가면서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됐다. 개들은 짖었고, 체념했다가 다시 짖었다. 멈추지 않는 벨트 위의 개들처럼 내 눈도 풀려갔다. 그런 내게 관리인이 자그맣게 귓속말했다. 벨트 위에서 뛰는 개가 불쌍해? 그래도 그놈들이 한 번이라도 크게 이기면 대우받는다. 언제까지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 번도 못 이겨보고 보신거리가 되는 것보다야 낫지.

그 뒤로 나를 잊고 열심히 일을 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일을 했다. 다시 하루하루 진부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며칠 동안 이곳에 있었는지, 몇 년이 지난 건지 알 수 없다. 시간관념이 점점 사라진다. 시간을 알고 싶어 항상 품 안에서 만지작거렸던 휴대폰을 꺼낸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전원을 켠다. 삐 하는 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개들도 조용했다. 한참 같은 순간이 지나고 문자가 왔다는 알림음이 계속 울린다. 스팸과 광고. 고시원 월세, 엄마의 돈 내놓으라는 문자가 차례대로 왔다. 저주의 말들이 차근차근 다가왔다. 나를 걱정하는, 나를 찾는 연락은 없었다. 그리고 전화가 왔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망설이다 결국 귀에 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선배였다. 너이 새끼, 언젠가 전화 될 줄 알았다. 너 거기 어디냐, 좋은 말로 할 때 말해라. 내가, 너 꼭 찾아낸다.

농장에는 철창이 많았지만 가장 깊숙한 곳의 철창에는 자물쇠가 여러 개 달려 있었고 그 굵기도 엄청났다. 하루는 관리인에게 그 철창 우리에 대해 묻자 화를 벌컥 냈다. 신경 꺼. 너 따위가 들여다볼 것이 아냐. 한참의 침묵 후에 관리인은 횡설수설하듯 읊조렸다. 저건 사람을 먹는다. 사람만을 먹어. 사람을 먹기 전에는 죽지도 않아. 절대 죽지 않지. 사람을 먹기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 먹힌 사람은 다시 저놈이 된다. 저놈은 그런 놈이다. 죽기 위해 먹는다. 벗어나기 위해 기다린다. 저주, 한마디로 저놈은 저주야. 가까이 가지 마.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한 관리인의 말이었다. 그러곤 한참을 잊고 지냈다. 세상의 목소리에, 내가 두고 온, 끝까지 외면하고 싶던 목소리 때문에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그 철창 안이, 그 안이 너무도 궁금해졌다.

때마침 관리인이 개들 줄 먹이가 없다며 텅 빈 짬통을 들었다. 통을 싣고 트럭에 오른다. 엔진의 요란한 소리가 산자락을 때린다. 비가오기 시작한다. 더욱 커지는 빗소리에 엔진 소리는 곧 묻힌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웃자란 잡초들 사이의 좁은 산길은 곧 진흙탕이 되었다. 굉음과 빗소리가 섞인다. 길에는 깊게 파인 구덩이가 생겨났다. 구덩이가 생기는 것보다 더 빨리 빗물로 채워졌다. 작은 호수들이 생겼고 금세 연결되어 큰 호수가 되어갔다. 그러곤 늪이 된다. 진흙은 장화 밑바닥에 달라붙는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더욱 내린다. 빗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숲 속 한가운데에 나는 장화를 신고 엉거주춤 서 있다. 한 발짝 움직이자마자 미끄러져버린다. 넘어질 뻔했지만 다른 발로 중심을 잡는다. 빗물이 눈 속으로, 귓속으로 스며든다. 가만히 서 있다가 땅을 향해 몸을 맡긴다. 진흙탕 물이 튀어올랐다가 온몸을 향해 달려든다. 저절로 눈이 감겼고 찰나의 순간 동안 눈물이 나온다. 눈썹에는 누런 물이 묻어 있고 역시 찰나의 순간에 빗물에 의해 씻겨나간다.

몸을 일으키자 개들이 보인다. 철창 우리들이 더욱 가까이 다가와있다. 더 큰 비가 올 것 같다고 저 멀리서 관리인이 소리치는 것이 어렴풋이 들려온다. 꿈결인가. 길게 자란 잡초들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빗방울은 땅에 흡수되지 못하고 튀어 올라와 나를 공격한다. 비를 피하려고 움직이지만 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신에 달라붙는다. 철창 안은 어떻게 생겼나. 오히려 지금 이곳보다 아늑하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개보다 못한 놈이다. 철창에 갇힐 자격도 없는 놈이다. 우리의 자물쇠들을 하나씩 풀기 시작한다. 개들이 한 마리씩 나오며 나와 같이 비를 맞는다. 수십 마리의 개들이 내 주변에 모인다. 순간 따뜻하다는 생각이 든다. 손을 내민다. 따뜻함을 더 느끼고 싶다. 개들이 점점 더 몰려든다. 손가락을 물린다. 하나도 아프지 않다. 아무런 고통도 없다. 나는 애초부터 여기에 없다. 나는 한 번도 어느 곳에 있었던 적이 없다. 번개가 내리친다. 천둥이 친다. 농장의 모든 개들이 나에게 달라붙어 있다. 개들과 교감할 수 있어 기쁘다. 개들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이빨이 내게 박힌다. 내 피가 그들에게 뿌려진다. 그리고 세찬 비에 곧바로 쓸려 사라진다. 천천히 가장 깊은 곳의 철창으로 걸어간다. 개들도 따라오다가 하나둘 물러났다.

자물쇠 하나를 푼다. 두 번째 자물쇠는 길고 무거운 쇠사슬로 묶여 있다. 하나하나 인내심을 가지고 풀어나간다. 저 깊은 곳에서 푸른빛이 보인다. 개의 안광이다. 커다란, 정말로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크기다. 마지막 자물쇠를 풀고 철창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을 뻗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팔을 흐느적거린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휘두른다. 퍼덕거린다. 손가락 끝에 차가운 것이 느껴진다. 침 같은 것. 차갑고 끈적끈적한 침. 손가락 한 마디씩 먹혀간다.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자 내 몸에서 털이 나기 시작한다. 뼈가 바스러지고 있다. 갑자기 이빨이 커다랗게 쑥 자라난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햇빛이 났다. 빛이 나를 지나 철창 안을 비춘다. 마침내 가장 깊은 철창 안이 보인다. 나는 잠시도 쉬지 않고 소리를 지른다. 우리 가장 깊은 어둠속에서 내가 소리를 지르고 있다.

나는 잠시도 쉬지 않고 비명을 질렀다. 멈추지 않고 계속 소리친다. 목이 아플 정도로 길게 울부짖는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돌 던지기를 계속한다. 시큼한 하천의 냄새가 밀려 들어온다. 간절한 울음에도 상관없이 돌은 날아온다. 눈을 감았다 뜨자 집채만 한 돌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그 돌은 더욱 커져서 지구보다 더 커진다. 지구보다 더 커진 돌은 곧바로 우주보다 더 깊고 더 검으며 더 거대한 것이 되어 다가온다. 너무도 두려워 눈길을 돌리자 개천 위에 아이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눈이 마주치자 그 아이는 많이 놀랐는지 곧바로 뒤돌아 마구 달리기 시작한다. 아이의 발자국 소리가 크게 개천을 따라 울린다. 계속해서 울린다.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멀리멀리 퍼져나간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제야 모든 것이 사라졌다.

윤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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