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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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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기술

등록 2012-11-29 23:36 수정 2020-05-03 04:27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사진 한 장을 잊을 수 없다. 지역 국회의원과 찍은 사진이었다. 그는 꽤 오랫동안 여당의 실세였고, 네 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우리 동네의 국회의원은 늘 그 사람이어서 어릴 때 나는 국회의원이 종신직인 줄 알았다. 그가 그렇게 기골이 장대한 사람인 줄 사진을 통해서 알았다. 아버지가 작은 편이기는 하지만 옆에 서 있으니 정말 난쟁이 같았다.
 
유혹의 기술이 부족한 주자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그게 뭔가 인생을 풍자하는 것 같아 조금 슬펐다. 아버지는 대체 언제 그 사진을 찍었을까. 아니 어떻게 그 사진을 찍었을까. 자동차 정비공으로 시작해 택시 기사로 살았던 사진 속의 아버지는 수줍어 보이기도 했고, 자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언제, 왜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선거 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사진 한 장 때문에 아버지는 그해에도 그 사람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다. 그런 표를 모으겠다고 선거 때마다 높은 양반들이 국밥집에 가서 국밥도 먹고, 시장에 가서 어묵 꼬치도 먹는 거겠지. 그렇게 환심을 사는 거겠지. 생각하면 씁쓸하다. 혹세무민이 별건가.

여권 대선주자가 모교를 방문하던 날, 나는 그곳에서 100여m 떨어진 지역 문화원에 있었다. 그 문화원은 대부분의 강좌 수강료가 3만원 안팎이어서 지역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가는 골목이지만 평소에는 한적해 운전 초보인 젊은 엄마들도 더러 차를 가지고 다니는데, 그날은 언론사 차량을 비롯해 수행원 차량, 그를 보러 온 지지자들의 차량까지 골목마다 북새통을 이뤄 난리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차를 가져온 이들마다 진땀을 흘렸다. 차들은 어찌나 또 고급인지. 즐비한 외제차 중 한 대와 기어이 접촉 사고를 낸 이도 있었다. “왜 왔대?” 누군가 물었다. “여고 동창회.” 다른 이가 대답했다. “여기도 사람 많은데, 여기는 안 오나.” 또 누군가 물었다. “다리 아파서 못 와.” 내가 대답했던가. 전날 나는 그이가 손이 아프다며 시장 상인들과 악수를 마다한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봤다. 고작 몇 달 동안 사람들과 나누는 악수가 힘든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이끌겠다고 큰소리칠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다. 당신의 고단함을 어루만지는 일보다 내 손의 피로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당당한 의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혹세무민하려는 척도 안 했으니 차라리 정직하다고 해야 하나.

정치란 기본적으로 유혹의 기술이 아닐까 싶다. 설득하고 설득하여 그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믿게 하는 것이 바로 정치 리더십의 기본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주자들은 표를 결정할 국민은커녕 힘을 모아 함께하자고 한 이의 마음도 제대로 얻지 못하는 것 같다.

 

받아야 할 자가 기울여야

어제는 아이가 동네 문화원에서 발표회를 했다. 날씨가 제법 추워져서 친구들과 나눠먹으라고 코코아를 가득 끓였다. 다 끓인 코코아를 보온병에 나눠 담는데 따르기 편하라고 만들어진 뾰족한 주둥이 방향으로 부었는데도 자꾸만 보온병 밖으로 코코아가 쏟아진다. 이러다 가득 끓여서 반도 못 가져가게 생겼다 싶어 이리 기울이고 저리 기울이다 마침내 원인을 알았다. 보온병을 함께 기울이지 않은 게 문제였다. 코코아만 담긴 팬을 제아무리 기울여봐야 보온병이 뻣뻣하게 서 있으니 담아지지 않았던 거다. 보온병을 깊숙이 기울여 코코아를 따르니 한 방울도 넘치지 않는다. 받아야 할 자가 기울이지 않으면 제아무리 좋은 걸 많이 줘도 담을 수 없다니. 단일화 문제로 서로 뻣뻣이 서서 표만 질질 흘리는 이들에 대한 은유 같아 코코아 한 병 따르며 마음이 울컥한다.

이 글이 실릴 때 즈음에는 단일화 주자가 결정됐을까. 70%는 일치한다는 후보들의 공약은 비로소 그 차이점을 드러낼 수 있을까. 대선은 한 달 남았고, 마음은 미혹될 준비가 돼 있는데 유혹하는 자가 없으니 마음이 참 갈 데가 없다.

한지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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