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샘과 레이먼, 두 남자가 조리대 앞에 나란히 섰다. 적막을 깨고 조리도구와 냄비가 부딪치며 쨍그랑 소리를 낸다. 오늘의 재료는 고르곤졸라 치즈, 생크림, 배, 자몽, 브랜디, 오렌지주스, 호두, 망고가 짝을 이룬다. 배와 설탕을 간 것이 접시에 얇게 깔린다. 고르곤졸라 치즈는 휘핑한 생크림에 녹아든다. 생크림이 풍성하게 일어서고 호두가 뜨거운 물에 들어가 쓴맛이 빠진다. 프라이팬에서 알코올기를 날려보내는 브랜디. 오렌지주스와 설탕을 넣고 조리면 시럽이 된다. 어느 순간 냉동실에서 얼린 접시 위에 이 모든 것이 차곡차곡 쌓인다. 조리대 위에 두서없이 널려 있는 듯하던 짜고, 시고, 달고, 고소한 맛의 재료들이 한데 섞였다. 하나의 요리를 만드는 과정은 스펙터클한 서사가 되어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제 요리 프로그램은 정보성을 넘어선 유려한 이야기며 본능을 자극하는 쇼다.
요리쇼를 봤다고 부엌으로 가진 않는다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다른 채널이 꺼지는 시간, 요리채널들의 불이 켜진다. 케이블 푸드채널 올리브TV의 신종수 팀장은 “동시간대 다른 채널과 비교했을 때 요리 프로그램 시청률이 압도적이다. 레시피 프로그램을 몇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볼 수 있도록 배치했다”고 말한다. 시즌2까지 제작되는 등 인기를 끌었던 이나 영화 등의 요리를 연출한 일본의 푸드스타일리스트 겸 요리사 이이지마 나미 등이 출연하는 등이 이 시간대 단골 프로그램이다. 허기를 채우기 어려운 시간에 음식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신종수 팀장은 “사람들이 음식 콘텐츠를 보며 심정적 허기감을 채우는 듯하다. 마음의 위로를 얻는 도구로서 요리를 활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9월27일엔 두 개의 영화 다큐멘터리가 스크린에 걸렸다. 미국 감독 데이비드 갤브가 만든 과 그보다 2주일 앞서 개봉된 이다. 은 지로의 스시 가게를 비춘다. 오노 지로는 레스토랑 평가서 의 최고 등급을 받은 여든 줄의 최고령 셰프다. 그가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는 왕국은 작은 교회와도 같은 곳이다. 지로는 더없이 경건한 표정으로 김을 굽고 생선을 자르며 초밥을 쥔다. 수습생들이 수건짜기와 생선 손질로 10년을 보내야만 서볼 수 있다는 주방이다. 영화는 특별한 줄거리도 갈등도 없이 참치와 전어로 시작해 대합, 줄무늬 전갱이, 보리새우를 거쳐, 박고지 김말이, 달걀, 연어알과 붕장어로 막을 내리는 지로의 스시 연주를 장중한 음악과 함께 중계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수십 년 동안 꿈에서도 스시를 만든다는 노인과 음악처럼 역동적으로 등장하는 스시에 바쳐지는 경배다. 지로의 지하 가게가 교회 같은 곳이라면, 스페인 레스토랑 ‘엘 불리’는 셰프 페란 아드리아가 통치하는 왕국이다. 아드리아는 영화 내내 먹고, 기록하고, 마시고, 까다롭게 주문하며 아무도 모르는 수십 가지의 레시피를 만들어간다. 작은 얼음 조각, 전분, 바늘나무, 질소까지 동원되는 이곳은 주방보다는 실험실에 가깝다. 영화 속 아드리아는 이렇게 단언한다. “아방가르드 레스토랑에 식사하러 가는 건 창조적인 감정을 얻기 위한 거죠. 뭔가를 느끼고 ‘죽인다!’ 생각하기 위한 거예요. 맛이 좋으냐 나쁘냐는 상관없어요.”
배를 채우고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요리의 시대는 이미 멀리 지나갔다. 사람들은 이제 음식 뒤에 숨은 이야기, 요리적 은유에 대한 관심, 서로 다른 재료가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며 한 접시의 요리로 만들어지는 창의적 과정에 집중한다. 개인 블로그에 음식 만드는 과정을 클로즈업해서 올리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푸드채널을 라디오 듣듯 종일 틀어놓거나, 소설이나 영화 속 음식이 나오는 장면을 탐독하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잠들기 전 요리책을 들여다보고, 밤과 아침의 어슴푸레한 경계에서 TV 앞에 앉아 요리쇼를 구경하는 이는 침을 삼키며 부엌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고르곤졸라치즈 무스를 완성한 두 남자가 주방 뒤로 사라진 이후 다음 요리사가 나타나 새로운 쇼를 열어주길 기다릴 뿐이다. 이들은 혀의 미뢰를 자극하기보다는 상상 속의 미뢰를 자극한다. 포르노그래피를 보며 성적 대리만족을 느끼듯, 요리를 묘사한 각종 서사를 들여다보며 식욕의 대리만족을 느낀다. ‘푸드포르노’ 중독자들의 등장이다.
“해먹는 것보다 사먹는 것을 믿는다”
푸드포르노는 음식이 욕망의 대상이 되도록 침샘과 위장을 자극하는 글이나 사진, 영상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모든 선한 것의 시작과 끝은 위장의 쾌락이다. 현명하고 정선된 모든 것은 위장과 관련돼 있다”고 했지만 그 후예들은 탐식을 넘어 탐독거리를 찾는다. 김아무개(39)씨는 얼마 전 맞벌이에서 전업주부가 되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1년 동안 그는 100권 넘는 요리 관련 책을 읽고, 수십 곳의 식당을 돌았으며, 50편이 넘는 음식 관련 영화를 섭렵했다. 틈날 때마다 요리 강좌와 음식 도서관 등을 찾는다. 그의 꿈은 요리사가 되는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음식 이야기를 모으는 것이다. 요리만화 등을 펴낸 조경규씨는 요리책 마니아다. 모르는 언어로 쓰인 책이라도 음식 이야기라면 일단 산다. 이미 출간한 책에서 음식 이야기를 세세하게 나열했지만 그가 앞으로 쓸 음식 이야기는 세상의 부엌 수만큼이나 많다. “어릴 적부터 끼니때마다 식구들과 오늘은 무얼 먹을까 의논하는 환경에서 자랐다. 자연스럽게 맛있는 것을 먹고 즐기는 식사를 하게 됐다. 해먹는 것보다는 사먹는 것을, 새로 문을 연 식당보다는 오래된 식당을 믿는 편이다. 전문적으로 오래 요리한 사람들이 만든 음식은 맛있을 수밖에 없다.” 조경규씨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독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제공하며 탐독을 권한다.
푸드포르노를 즐기는 사람들은 무라카미 류의 책에서도 유독 ‘프랑스산 새끼 토끼의 리예트’를 몇 번이고 되새김질한다. 신경숙의 소설 에서 길 떠나는 주인공에게 엄마가 마지막으로 차려준 밥상에 올라앉은 새하얀 쌀과 찌개, 육것들의 세세한 묘사, 대하소설 에서 꼬막과 소간 이야기를 숙독하며 지식을 캐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얼마 전엔 아예 소설에서 맛있는 대목만을 간추린 이라는 책도 나왔다. 한국에서 음식 이야기의 부흥은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시작됐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당시 ‘하루키 충격’ 중 하나가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비싼 수입 맥주나 치즈를 찾게 되는 경험이었다. 그의 글에서 예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미각을 자극하는 묘사를 발견하고 이후 하루키 문체를 흉내내는 유행이 시작되며 음식 에세이 붐이 일었다”고 했다.
지금 음식 에세이의 큰 줄기는 ‘힐링’이다. 성석제·백영옥·김창완 등이 쓴 에 이어 시인 곽재구·김용택, 농부 최성현,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 등 14명이 쓴 도 나왔다. 두 책 모두 위가 아니라 영혼을 달래던 음식 이야기를 풀어쓰고 있다. 온라인 도서판매 사이트 예스24(www.yes24.com)에는 와 함께 등이 상위권을 점하고 있다. 소설가 성석제의 음식 에세이 등을 낸 문학동네의 한 편집자는 “음식을 매개로 삶에 대한 입맛을 돋우는 이야기가 대세”라며 “실제 팔리는 것은 맛집이 아니라 사람 이야기”라고 분석한다. 마린 쿨란스키는 에서 “음식은 섹스만큼이나 작가들에게 무궁무진한 기회를 제공하는 소재다. 음식에 관한 글은 그 소재가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상당히 개인적이다. 음식에 관한 글을 읽으면 인류가 걸어온 길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독특한 취향까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한미화씨는 “블로거들의 사진 취미가 가세하자 ‘음식 에세이’라는 장르가 풍성해졌다”며 “문인들이 쓰는 음식 에세이는 주로 40대 이상 남성 독자들이 좋아하는 반면, 일반인들이 쓰는 음식책은 20~30대 여성 독자들에게 팔린다. 음식을 자아의 한 표현으로 생각하게 된 세대들이 자라 화려하고 유행을 타는 요리책 시장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텍스트나 장면에서 음식만 쏙 빼서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는 요리문화와 마니아층이 넓어지는 현상에 대해 “음식은 쾌락 중추를 강하게 자극한다. 그러나 먹는 행위 외에 음식을 만들거나 그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창조적 욕망을 자극할 수 있다. 과학에서도 날마다 작은 실험을 한다는 의미에서 요리는 매우 창의적인 작업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독립출판 시장에서도 요리 콘텐츠는 우위를 점하고 있다. 서울 홍익대 인근에서 국내외 소규모·독립 출판물을 판매하는 ‘유어마인드’ 대표 이로씨는 “최근 등 음식을 다룬 해외 잡지에 관심을 보이는 소비자가 많이 늘었다”며 “제작자나 소비하는 사람들 모두 음식문화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유어마인드는 독자들의 관심을 반영해 지난해부터 요리그림책을 직접 만들어 펴냈다. 11월 세 번째로 발간될 예정인 의 주제는 ‘주말의 점심’이다. 11명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레시피 하나를 선정해 그림으로 표현한다. 화려한 요리 사진집보다는 정적이고, 텍스트보다는 극적인 방식으로 요리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셈이다.
푸드포르노 중독자들은 자신만의 부엌을 꿈꾼다. 어릴 적부터 먹는 이야기를 좋아했다고 말한 의 저자 정은지씨는 일찍이 “종이 위의 음식들이 주는 흥분과 위로”에 매료됐다. 그는 “푸드포르노를 보는 것에 만족 못하고 직접 나서” 결국은 음식을 묘사하는 텍스트를 모아 책을 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정씨는 박경리 작가의 에 담긴 길고 긴 서사 안에서 함안댁이 김평산에게 끓여준 계란국 이야기를 끌어다 계란에 대한 ‘썰’을 한참 풀어낸다. 의 주인공 세라의 고단한 현실보다는 배고픈 세라 앞에 나타났던 판타지 같은 음식들을 기억한다. 그는 평소 혼자 먹는 식탁에서 이미 여러 번 읽어 외울 지경이 된 소설의 음식 묘사 장면을 반찬 삼아 읽는다. 정씨는 “밥을 먹으며 안전한 쾌락을 즐기고 싶은 욕구 때문인 것 같다”고 스스로 분석했다. 그는 최근 몇 년 사이 인터넷 게시판이나 블로그에서 자신과 닮은 사람들을 자주 발견한다. 음식을 다루는 텍스트나 장면을 논하며 서로의 식욕을 부추기는 현상이 흥미롭다.
웹툰 를 그리는 정다정씨는 평범한 식도락가에서 음식 만화가로 직업을 찾은 경우다. 만화에 대해 어떠한 정규 수업이나 훈련도 받지 않은 그는 식당과 요리 이야기를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던 것이 호응이 높아지자 블로그로, 나중에는 네이버 웹툰으로 옮아가며 만화가로 자리잡았다. 만화보다는 요리 사진이 주가 되는 그의 만화의 특징은 평범한 일상 요리로 구미를 당긴다는 점이다. 정 작가는 “유학 시절 친구들이 집에서 구운 브라우니와 케이크를 가져와 나누는 문화를 접하자 베이킹에 대한 환상이 시작됐다”며 “음식을 통해 장벽을 낮추고 숟가락과 말을 섞게 되는 과정이 웹에서도 통했다”고 되돌아봤다.
기억과 언어를 공유하며 취하다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이탈리아 요리책의 서문을 쓴 일이 있다. 책에서 그는 “(이탈리아인은) 왜 음식 이야기를 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일까?” 하고 묻는다. 음식 이야기를 하며 많은 기억을 떠올리고 새로운 어휘를 즐기며, 자신과 타인의 달변에 취하고 휴양지에서 맛본 음식의 감격을 지인들과 공유하며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지금 음식 이야기는 다른 사람과 힘들이지 않고 어울릴 수 있는 긍정의 말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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