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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손바닥문학상 -‘나’를 꼬아 논픽션이 픽션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

체험기·수기·생활글까지 망라해서 공모… 절실한 삶의 이야기, 자기자신을 소재로 한 치유의 글, 그것이 ‘소설’ ‘문학’이 되는 이유
등록 2012-10-23 21:07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김봉규

한겨레 김봉규

“가끔 개집 안쪽을 살피다 자정쯤 잠들었다 눈을 뜨니 새벽이다. 개집 안을 보니 뭔가 움직이는 게 있다. 드디어 백구가 새끼를 낳았구나. 아직 어두컴컴해서 개집 안이 정확히 보이지 않아 몇 마린지 모르겠지만 뿌듯한 마음이었다. 날이 훤해지자 개집 안이 보였다. 헉-, 이럴 수가. 새끼 색깔이 검은색이다. 아이고, 그럼 그 작고 까만 발바리 놈하고 붙었단 말인가. 순간, 실망이 몰려오고 배신감이 들었다.”(최만정의 ‘백구 새끼 낳기’)

스트레스다, 그래도 쓴다, 왜

최만정씨는 충남 아산에서 노동조합 일을 한다. 최씨는 2년5개월 전 글쓰기 모임을 만들었고, 회장 자리를 내놓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다. 술 마시자고 하면 12명 나오고 그냥 모일 땐 7~8명, 글을 써서 갖고 오는 사람은 4~5명인 작은 모임이다. 이렇게 모임을 부러 꾸미고 유지하고 있지만 최만정씨한테는 글 쓰는 게 스트레스다. “모임이 잡히고 마감이 있으니까 쓰는 거지 아니면 쓰지 않을걸요. 맞춤법, 띄어쓰기 신경 안 쓴다고 하지만 또 그대로 무시하면 안 되잖아요. 합평회를 하면, 남의 글에는 다들 칼칼해요. ‘네가 한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부터 ‘거짓말을 좀 보탠 것 같다’는 말까지 쏟아집니다.” 이런 괴로움을 겪으니 ‘사세 확장’도 힘들다. “그런 말 있잖아요. 노동자가, 서민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뀝니다. 사람들한테 멋지게 잘난 척하며 모임 권하고는 하는데, 다들 그러죠. 학교 때 일기 쓰기가 죽기보다 싫었는데 사회 나와서 그런 걸 왜 하냐, 술이나 한잔 하자.”

그런 걸 왜 쓰고 있을까. “뿌듯해요. 퇴고를 여러 번 하라고 글쓰기 선생님이 가르치는데 그러지는 않지요. 퇴고 않더라도 두세 시간을 꼼짝없이 앉아서 써야 합니다. 그게 다섯 편, 열 편 쌓입니다. 인생이 남는 거지요. 요즘 사진에도 추억이 안 담기잖아요. 글에는 그대로 남아 있지요. 가족이나 주변 사람한테 서로 복사해서 묶음을 주면 오래 알았던 사람은 이런 일도 있었네 하고, 모르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네 하죠. 문장이 좋든 안 좋든 해놓으니까 뿌듯하죠.”

그의 글쓰기 모임은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글쓰기 충남지부다. 도시마다 지역마다 하고 싶은 사람이 모임을 꾸리고, 홈페이지(sbook.co.kr)에 글을 올리며 교류한다. 서울지부는 편집부가 있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모이고, 편집인 겸 발행인인 안건모씨가 강의도 하고 주재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안건모씨는 버스기사 출신 ‘글쟁이’다. 버스기사를 하던 중, 1996년 광고를 보고 글로 쑥 들어갔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한다.’ 마음이 동해 산 에는 이오덕 선생의 글 권하는 짧은 글이 실려 있었다. 이오덕 선생은 “일하지 않는 사람은 밥을 먹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일하지 않는 사람은 글도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무엇을 써야 하나? 이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 언제나 첫째로 부딪치는 문제입니다. 새삼 말할 것도 없이 사람마다 가장 쓰고 싶은 것,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 절실한 삶의 이야기를 써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쓰는 글은 생활에 필요하기도 하지만, 우선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이요, 본 대로 들은 대로 생각한 대로 한 대로 정직하게 쓰는 글입니다. 그래서 그 글을 쓰는 데서 기쁨을 느끼고, 가슴이 후련해지고, 그리고 자신을 살펴보면서 삶과 마음을 가꾸어가는 데 그 목표가 있고 길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처음부터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해서 쓰는 소설이나 동화보다 생활글을 쓰는 동기가(마음이) 훨씬 더 깨끗하고 사람다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오덕, 전태일문학상 글쓰기 부문 최우수상 ‘추천하는 말’, 1997년)

세상을 다시 보고 내면을 다시 보고

안건모씨는 지난호까지 사다가 글을 읽기 시작했다. 을 읽고 ‘쿠바혁명’ 책을 읽었지만, 에 실린 청계천 노동자의 연재글은 “나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주부들에게 주부 글을 보여주는 게 가장 빠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글을 보면서 배우지요. 노동자들한테는 노동자들의 글을 보면 가장 빠릅니다.”

안건모씨는 노동자들이 쓰는 글이 ‘생활글’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노동자들의 삶이 치열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현실이 소설보다 심각한데 소설을 쓰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문학’이라는 건 주눅만 들지요. 노동자들이 쓴 소설이라고 묶여나오는 걸 읽으면 생생한 것과 지어낸 것이 확연합니다. 자기 이야기가 그렇게 생생한데 거기다가 지어낸 이야기를 쓸 필요가 있을까요.”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이오덕 선생의 생활글에 동감하며 이런 말을 한다. “농민들이 그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 일기나 편지를 쓴다는 것이 사실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도 시골 고향에서 중학교까지 다니면서 온갖 험한 농사일을 해보았지만, 농사일이란 참으로 고단해서 일이 끝나면 밥 먹고 그대로 쓰러져 자야 하는 것이기에, 일기 따위를 생각해보는 것이 약간은 사치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2007년 5월28일) 이런 사정에 ‘소설’은 노동자들이 열 번 찍어 노동해도 안 넘어가는 나무다.

이 또한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안건모씨는 글을 쓰며 “못나서 못사는구나”라는 체념의 도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세상을 다시 보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지요.” 글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계가 밖으로만 열려 있는 건 아니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긴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어머니가 오기를 바라고 있었던 거예요.” 수강생 김종일(가명)씨의 질문에 소설가 이남희씨가 답해주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글은 마음과의 숨바꼭질이었다. 집을 나간 어머니는 가끔 학교를 찾아왔다. 전학간 학교에서 교실의 위치를 그렇게 자세히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교실로 들어가는 복도가 복잡했다. 어머니를 기다렸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어머니가 못 찾아오실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이 파란만장했어요. 과제로 글을 쓰고 나를 돌아보면서 풀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글을 쓰면서 기억이 살아났습니다. 새엄마가 여동생을 보라고 하면서 10원을 준 것도 기억이 나고.”

10월16일 저녁 ‘치유하는 글쓰기: 자기 이야기 쓰기’ 마지막 시간. 강의는 예정된 시간보다 30분을 훌쩍 넘어 끝났다. 8강 동안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고 자기에 관한 글을 썼다. 강의의 목적은 ‘치유’도 있고 ‘글쓰기’도 있다. 목적대로 나누면 수강생은 반반씩인데, 글쓰기는 치유에 마음을 주고 치유는 글쓰기에 길을 내주었다. 강의를 들은 국어 교사 노현식씨는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다. “두려워하는 부분을 돌아보는 것에 대한 저항이 강합니다. 어린 시절을 비춰보는 것을 불편해했어요. 짐작만 하던 것을 글로 정리해보니 마음이 정리가 되더라고요.”

피부 트러블이 완화되는 글쓰기?

‘치유’에 관심을 가지고 이전에도 여러 관련 강의를 들었던 오혜경씨는 이번 강의가 ‘효과’가 좋았다고 한다. “신랑이 공격적인 사람이고 나는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성격 분석을 해나가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나는 고립형으로 상대와 단절된 상태를 편하게 생각합니다. 상황을 돌아보며 글을 쓴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최미경씨는 새로운 ‘아이’를 만났다. “나는 불쌍하고 가여운 어린 시절을 가진, 그래서 현재도 괴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내 기억 속의 중구난방인 기억들을 구체적으로 다듬어나가자 내가 오해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족과의 마찰을 떠올릴 때 억울하기만 했는데, 오해였던 부분을 가리게 되었고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러고 나서 꽤 잘살았구나, 난 괜찮은 애였구나 인정하게 됐습니다. 계속 꾸준히 해나가며 알아가고 아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치유하는 글쓰기’ 강의는 인생의 공허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중년기를,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청년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심리치유라는 것은 자기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이루어진다. 몸의 상처는 ‘보이니까’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으면 되지만, 마음의 상처는 드러내는 것이 먼저다. 이렇게 확연히 상처가 여기 있구나를 들여다보는 게 치유 글쓰기”라고 말한다.

이남희씨는 미국 오스틴대학의 제임스 페니베이커 박사가 정리한 글쓰기 효과를 소개해주었다. 1. 신체의 면역기능 강화 2. 혈압과 근육긴장, 피부 트러블 완화 3. 스트레스와 고혈압, 만성질환, 천식, 류머티즘성 관절염, 암의 신체적 고통 증상 완화 4. 비밀을 품은 사람이 마음의 안정을 맛봄 5. 원만한 사회적 관계 6.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 강화 7. 미래에 대해 긍정적 생각 등등. 대조군을 설정하고 혈압도 재고 피부 트러블도 검사한 엄밀한 실험이라지만 ‘만병통치’를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최만정씨는 스트레스를 받는다지 않나.

무턱대고 글을 쓰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자기를 알고 싶다면 일기를 쓰라는 충고가 있다. 그런데 자신의 감정을 막연히 늘어놓기만 해봐야 자신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 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일기를 쓰면 그렇게 된다. 일기를 쓰느라 기분 나빴던 일을 곱씹는 바람에 나쁜 기분이 강화되는 것이다.”(이남희, (가제)) 그가 조언하는 ‘약발’ 좋은 일기 쓰기는 ‘내 관점’을 보태서 쓰는 것이다. “내 눈에 비친 그날의 사람이며 사건들, 내게 부딪쳐온 세상사를 자세하게 관찰하듯 쓰는 것이다. 나에게 부딪쳐온 세상이 내 눈에는 어떻게 보였고, 나에게는 어떻게 느껴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쓴다면, 바로 그 속에서 자기라는 사람이 드러난다.” 자기를 쓰되 자기만으로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글’은 곧 ‘소설’이다. 나를 소재로 꼬고 나면 논픽션은 픽션이 되고 픽션은 논픽션이 된다. 뫼비우스 띠다. 가 1995년 창간한 뒤 세상에 분류해 내놓은 ‘자전소설’은, 소설가에게 논픽션과 픽션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요구하는 ‘소설’로 자리잡았다. 을 묶은 정홍수 도서출판 강 대표는 말한다. “소설은 어떻게든 자전적인 요소를 변용하는 건데, 그걸 자전소설이라는 타이틀로 내놓으니까 게임을 벌이는 양상이 되었다. 확 드러내고, 많이 숨기고 그걸 구경하는 게 재밌다.”

최인석은 이 의뢰를 받아 쓴 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제 태어난 그에게 어제 자전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서가 날아들었다. ‘자전소설’이라는 단어를 목격한 순간 그는 이제까지 써온 소설들과는 그 방법을 썩 달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듯 진정한 소설은, 작가가 현재 서 있는 자리의 모든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이미 하나의 자전이다. 자전이 아닌 소설은 소설이라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게 다 자전소설이라는 용기

김윤식은 2012년 가을호 ‘계간 문학동네의 자전소설과 그 소설사적 의의’에서 은희경이 자전소설로 상재한 ‘서정시대’를 풀어가는 중, 자전이 소설이 되는 진입을 ‘뻔뻔스러움’ 정도로 정리하고 만다.

“‘진지함의 시대’ 곧 ‘서정시대’의 끝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소설(산문)이라는 것. 어느 각도에서는 뻔뻔스러움으로 보이는 것 곧 전면적 진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적 진실(일면적 진실)이 극복된다는 것, 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대머리가 될 각오가 요망된다는 것. …요컨대 소설 쓰기란, 전면적 진실이기에 그 대가는 자기 머리칼을 뽑아내는, 대머리 되기를 각오한 연후라는 것. 작가 은희경이 내세운 것은 어떤 소설이든 자전소설임을 각오한 용기 있는 고백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전 드라마에서 죽었던 배우가 다른 드라마에 나오면 “죽은 아가…”라며 시큰둥하던 할머니와 비슷하다. 소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할 때 그것은 어느 만큼의 창조일 것인가. 지어낸 얘기, 심지어 SF에도 우리는 왜 얼마나 진짜 같냐고 물을까. ‘치유하는 글쓰기’ 강의를 들은 수강생은 설핏 이런 이야기를 흘렸다. “자기를 다 보여주는 소설가란 어떤 존재인지 궁금했고, 그만큼 용기 있다고 생각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소설가 이남희가 말하는 글쓰기 팁
마음을 따라가며 글을 써라


1. 최초의 아이디어를 소중히 한다.
최초의 아이디어를 따라서 쓰기 시작하면 분량과 상관없이 이야기가 끝날 때 글도 끝낸다. 분량 조정은 수정과 퇴고에서 할 수 있다. 최초의 아이디어에는 다른 사람을 끌어당기는 열정이 들어 있게 마련이다.
2. 내 마음의 코드를 따라간다.
쓰기 머뭇거려지는 부분일수록 더 감동적인 소재일 가능성이 있다. 머뭇거려지는 부분을 더 파고들어가본다. 치유를 위한 글쓰기에서 가장 강조해야 할 게 이 부분이다.
3. 첫머리에서 바로 사건으로 들어간다.
그렇지 못했으면 수정과 퇴고를 할 때 첫 부분을 확 들어내고 이야기를 읽어본다. 글이 훨씬 좋아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4. ‘텔링’(telling)할 부분과 ‘쇼잉’(showing)할 부분을 고민해본다.
서사(telling)가 잘되면 이야기가 재미있다. 보여주기(showing)가 잘되면 감정이입이 잘돼 감동을 준다. 따라서 핵심 부분은 ‘보여주기’로 쓰도록 한다.
5. 소리내어 읽으며 수정한다.
소리내어 읽으며 글을 고치면 문장이 자연스러워진다. 스토리가 막힐 때도 쓴 부분을 소리내어 읽으면 뚫리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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