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유진상가, 비루하고 데데한 유신 건축물의 비애

등록 2012-09-04 18:27 수정 2020-05-03 04:26
통일로변에서 바라본 유진상가의 입면부. 7개 콘크리트 기둥에 의해 6칸으로 구획된 1층은 좌우 측면부의 1칸씩을 필로티 구조로 비워 홍제교와 만나는 건물 후미까지 보행로와 주차 공간을 조성했다. 오른쪽 측면(A동)보다 왼쪽(B동)이 낮은 것은 1994년 개통된 내부순환로가 상부를 지나게 돼 B동의 4,5층을 철거했기 때문이다. B동은 사무용 공간으로 리모델링돼 서대문구 신지식산업센터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통일로변에서 바라본 유진상가의 입면부. 7개 콘크리트 기둥에 의해 6칸으로 구획된 1층은 좌우 측면부의 1칸씩을 필로티 구조로 비워 홍제교와 만나는 건물 후미까지 보행로와 주차 공간을 조성했다. 오른쪽 측면(A동)보다 왼쪽(B동)이 낮은 것은 1994년 개통된 내부순환로가 상부를 지나게 돼 B동의 4,5층을 철거했기 때문이다. B동은 사무용 공간으로 리모델링돼 서대문구 신지식산업센터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유진상가는 서울 서북권역의 교통 요충인 홍은동 네거리에 있다. 폭 50m의 입면부는 통일로와 면하고, 5층 높이의 상자형 몸체가 세검정길을 따라 200m 남짓 이어진다. 1970년 지어졌으니 햇수로 42. 사람이라면 불혹의 완숙함이 느껴질 법한 나이지만 이곳을 감도는 건 쇠진과 몰락의 기운뿐이다. 단조롭고 특징 없는 입면부, 오랜 세월 때와 흠집으로 누더기가 된 외장은 머잖아 폐기 처분될, 방치된 인공물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타워팰리스식 고급 주상복합의 아비뻘

유진상가는 서울에 몇 안 남은 상가아파트다. 1층 전체와 2층 일부가 상가로 쓰이고 나머지는 주거용이다. 건축학적 계보를 따지자면 2000년대 주상복합의 아비뻘이다. 상가아파트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종로 세운상가(1967년 완공)는 벌써 일부가 헐려나갔다. “녹지축을 훼손하고 교통 흐름을 방해하는 흉물 장벽”이란 비난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악기 판매로 특화된 종로 낙원상가(1968년 완공)도 철거 여론에 시달린 지 오래다. 주변을 슬럼화하고 남산 조망을 가로막는다는 이유였다.

유진상가 역시 재개발 민원이 제기된 지는 10년이 넘었다. 건물 전체가 홍제천을 복개한 상판 위에 자리잡은 탓에, 도심 하천을 원형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진 1990년대 말부터 철거론이 힘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시가 2003년 유진상가를 포함한 홍은사거리 일대를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한 것도 이런 기류를 의식해서다. 그로부터 9년 만인 지난 5월16일 ‘홍제1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 계획안’이 서울시 건축심의를 통과했다. 계획안은 유진상가를 헐어 홍제천을 복원한 뒤 천변을 따라 업무·판매·문화시설을 짓고 그 배후에 최고 48층짜리 주상복합아파트 3개 동을 신축하는 게 골자다.

흥미로운 대목은 도심의 다른 상가아파트들과 달리 유진상가에 대해서만큼은 철거를 반대하는 어떤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운·낙원상가의 경우, 개발주의 시대 도심 건축의 일단을 드러내는 상징물로서 의미가 만만찮고 건물의 내구성도 뛰어난 만큼 리모델링해 재활용하자는 의견이 건축계와 시민사회 일각에서 꾸준히 제기돼왔다. 실제 세운상가 4개 동 가운데 ‘다’동(삼풍상가·풍전호텔) 구간은 이미 막대한 비용을 들여 리모델링 공사를 마쳤다.

이 건물들이 누리는 특별대우는 설계자가 한국 근대건축의 한 시대를 풍미한 건축가 김수근이란 점과 무관하지 않은 것같다. ‘족보 있는’ 건축물이 누리는 특권이다. 건축물의 기획·설계·시공 과정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 공간을 점유하고 이용해온 방식 또한 한국의 근대성이 작동해온 독특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철거 계획이 알려진 뒤 두 건물을 찾는 건축학도와 연구자, 문화활동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2층 기단부의 아파트동 사이에 마련된 중정 형태의 옥외공간. 관리실과 놀이터, 자전거 거치대, 체육시설, 간이 정원 등이 조악한 형태로나마 들어서 입주민의 교류 공간 구실을 해왔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2층 기단부의 아파트동 사이에 마련된 중정 형태의 옥외공간. 관리실과 놀이터, 자전거 거치대, 체육시설, 간이 정원 등이 조악한 형태로나마 들어서 입주민의 교류 공간 구실을 해왔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유진상가가 겪는 푸대접에는 사실 부당한 측면이 없지 않다. 설계자가 누구인지 불명확하고 건물에 구현된 이념과 조형미가 세운·낙원상가에 비해 처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진상가 역시 동시대 다른 상가아파트들과 구분되는 독특한 형태미학과 조형원리를 내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건물의 특징을 보려면 통일로 건너편에 서서 건물의 입면부(파사드)를 바라보면 된다. 7개 콘크리트 기둥에 의해 6칸으로 구획된 1층은 좌우 측면부의 1칸씩을 필로티(기둥) 구조로 비워 홍제교와 만나는 건물 후미까지 보행로와 주차 공간을 조성했다. 2층 기단부에 확보된 인공대지는 길게 3분할해 ‘아파트A동-공중정원-아파트B동’ 순서로 1층 기둥 간격에 맞춰 2칸씩 배열했다. 이 때문에 인공대지 양 측면에 조성된 아파트동은 바닥 절반이 허공에 뜬 채 필로티만으로 지탱되는 아슬한 모양새다.

초기 입주자들 고위 공무원, 법조인 다수

필로티가 지지하는 넓은 인공대지 위에 중정(中庭) 형태로 확보한 옥외공간(공중정원)은 김수근이 설계한 세운상가에서도 볼 수 있는 건축요소다. 김수근은 필로티 구조로 확보한 지상공간을 보행로와 주차장뿐 아니라, 종로~청계천~퇴계로를 세로축으로 연결하는 차량용 도로에 할당하려 했다는 점에서 필로티의 활용에 더 적극적이었다. 나아가 4개의 세운상가 건물군을 지상 15m 높이에서 연결하는 공중보행데크, 실내광장, 채광용 아트리움(중앙홀) 등 당대 서구 건축의 첨단 어휘들을 과감히 도입했다.

형태와 구조에서 드러나는 세운상가와의 유사성은 시공업체인 신성건설이 김수근의 세운상가 기본 디자인을 의도적으로 차용해온 결과로 보인다. 신성건설은 유진상가에 앞서 세운상가 ‘라’동(신성상가)의 시공에 참여한 업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모방 역시 유진상가의 건물 폭이 세운상가보다 5m 이상 넓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사한 선형(線形) 상가아파트인 동대문·삼선·서소문아파트에 비해서도 유진상가의 건물 폭은 2~3배가량 넓다. 덕분에 유진상가는 2층 인공대지 위에 여유 있는 옥외공간을 사이에 두고 2동의 아파트를 마주 보게 배치할 수 있었다. 옥외공간에는 관리실과 놀이터, 자전거 거치대, 체육시설, 간이정원 등이 조악한 형태로나마 들어서 입주민의 교류 공간을 제공했다.

세대별 분양 면적이 다른 상가아파트들에 비해 월등히 넓다는 점도 유진상가만의 특징이다. 유진상가는 홍제천 복개도로의 상판 위에 지어진 까닭에 불량주거지구를 철거한 뒤 건축된 다른 아파트들과 달리 철거민 지분이 따로 없었다. 30평 이상 중대형으로 분양면적을 공급하는 게 가능했던 이유다. 가장 작은 규모가 33평, 큰 것은 68평이었다. 난방도 기름을 사용한 중앙집중식이었다. 상가아파트임에도 당시 고급 공동주택을 일컫던 ‘맨션’이란 명칭이 붙을 만했다. 분양가는 33평형이 360만원, 68평형이 780만원대에서 형성돼 당시 비슷한 규모의 일반주택보다 3배가량 비쌌다.

입주자들의 학력·소득 수준도 높았다. 1987년의 한 조사를 보면 유진상가 세대주 가운데 대졸자 비율이 71.3%다. 세운상가(60.9%)나 낙원상가(48.2%)보다 높다. 유진맨션 주민자치회장 박을용(78·1986년 입주)씨는 “1980년대만 해도 청와대, 정부청사, 법원, 검찰청 등이 가까워 고위 공무원과 법조인이 많이 살았다”며 “시간이 흐르자 인근 시장과 상가에서 장사로 돈을 모은 사람들이 차츰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초기 입주자들의 세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한 주민의 증언이다.

“옆에 있는 인왕시장이 농산물을 취급하는 서울 서북권의 거점 시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김장철이면 새벽부터 소음이 심했다. 1972년쯤 여기 살던 청와대 경호처장이 새벽에 경찰서장과 구청장을 불러다 몇 번 호통을 쳤다. 그럴 때마다 경찰과 계도 공무원이 출동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군 고위급도 많이 살았는데, 여기 사는 장성들 별을 모으면 12개쯤 된다는 우스개 얘기가 있었다.”(봉봉원, 1972년 1층 상가 입점)

군사적 방어 용도로 튼튼하게 지어져

하지만 유진상가에는 동시대 다른 상가아파트와 구별되는 또 다른 용도가 있었다. 군사적 방어 기능이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직후 도심의 군사시설물 존폐 논란을 다룬 기사를 보면 유진상가와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유진상가 건물은 서울 서북 지역이 뚫렸을 경우 시가전을 벌이기 위한 군사 겸용 건물로 홍제천을 복개한 위에 당시 일반적인 건축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졌다. 유사시 적의 공격에 대비, 은폐 엄호용 목적을 갖고 있는 이 육중한 건물은 지은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견고함에 있어서는 서울에서도 손꼽힌다.”(1993년 8월28일치)

유진상가의 오른쪽 측면. 홍제천을 복개한 자리에 들어선 이 건축물은 기둥과 상판뿐만 아니라 외벽까지 철근콘크리트로 축조돼 견고함을 자랑한다. 수평띠 모양의 창이 콘크리트 외벽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형태는 전후 국제주의 건축 양식의 전형이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유진상가의 오른쪽 측면. 홍제천을 복개한 자리에 들어선 이 건축물은 기둥과 상판뿐만 아니라 외벽까지 철근콘크리트로 축조돼 견고함을 자랑한다. 수평띠 모양의 창이 콘크리트 외벽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형태는 전후 국제주의 건축 양식의 전형이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취재차 만난 유진상가 주민들도 이 사실을 대체로 인지하고 있었다. 34년째 살고 있다는 ㅊ씨는 “1979년 나한테 집을 팔고 나간 장성급 군인은 이 건물이 전시에 탱크 진지로 계획된 곳이라고 했다”며 “1층 필로티 공간의 천장이 높은 것도 탱크의 포탑 높이를 계산해 넣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신성건설(2008년 부도로 법정관리 중)의 한 관계자도 유진상가에 북한 전차부대 진입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시설 용도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그는 “당시 서울시내의 어떤 건물보다 단위면적당 철근과 콘크리트 투입량이 많았다”고 말했다.

민간 건설사가 지은 상가아파트에 군사 기능이 부여된 배경에는 건설 당시의 국내외적 상황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신성건설이 유진상가 건축에 착공한 1969년은 ‘서울 요새화’가 선포된 원년이었다. 당시 한반도 정세는 1968년 1월 북한 무장공작원의 청와대 기습(1·21 사태)과 미군 정보선의 동해 피랍(푸에블로호 사건), 11월 울진·삼척지구 북한 무장공작원 침투 사건으로 군사적 긴장이 어느 해보다 고조된 상태였다. 국내적으론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움직임에 야당과 학생·재야세력의 저항이 격화돼 집권세력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박정희 정권은 군사력 증강과 함께 각종 방위 계획을 마련해 안보 위기에 대응하는 한편, 안보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을 활용해 정치적 저항을 억누르는 이중 전략을 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구호가 ‘싸우면서 건설하자’였다. 1968년 2월 초 박정희의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기념사에서 처음 나온 이 구호는 그해 3·1절 기념사, 6·25 담화, 8·15 경축사 등에 빠짐없이 등장하더니 이듬해 대통령 신년사를 통해 공식 통치 슬로건으로 공표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은 5·16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군부세력이 1963년 민정 이양을 통해 마련한 자유민주주의 정부로서의 성격을 벗어던지고 ‘준전시 동원체제’에 기반한 종신독재(유신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내부순환로 탓에 B동 절반 뜯겨나가

서울의 공간적 재편도 이런 움직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육군 준장 출신의 서울시장 김현옥은 1·21 사태 직후인 1968년 2월 ‘방어 및 관광 목적의 스카이웨이’ 건설 계획을, 3월에는 지하대피시설 8개소 설치 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이듬해 1월과 3월에는 ‘서울 요새화 계획’과 ‘남산 요새화 계획’을 잇따라 내놓는다. 이렇게 탄생한 게 남산 1·2호 터널이었다. 터널은 평시엔 교통시설로, 유사시에는 30만~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시설로 활용한다는 게 당시의 구상이었다. 한강다리도 폭격 피해를 입을 경우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복구할 수 있는 형태를 염두에 두고 설계가 이뤄졌다.

휴전선에서 서울로 통하는 주요 도로상에는 5겹의 주방어선이 새롭게 구축됐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방어선이 구파발의 전차방어선이었다. 구파발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 전차 부대가 청와대나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방면으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유진상가가 있는 홍은동 네거리를 거쳐야 했다. 이곳은 구파발에서 6km 남짓 떨어져 있었는데, 여기서 세검정길을 거쳐 청와대까지는 5km, 의주로를 거쳐 세종로 정부중앙청사까지는 4km 거리였다. 도시 내 거점 방어에 적합한 전략 요충이었던 셈이다.

북한 전차의 기동을 저지·지연하려고 만들어진 건물답게 유진상가는 기둥과 상판뿐 아니라 외벽까지 견고한 철근콘크리트로 축조됐다. 건물 전체가 거대한 토치카였다. 1층 필로티 공간에 대해선 유사시 아군 기갑차량의 엄폐호 기능을 염두에 둔 것이란 말이 있는데, 신빙성이 상당해 보인다. 외부로 트인 1층 공간이 적의 곡사화기 공격으로부터 내부 차량을 보호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깊고 높기 때문이다.

다른 견해도 있다. 최악의 경우 필로티를 폭파해 상부의 아파트 건물이 도로를 덮치도록 함으로써 전차의 기동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일종의 ‘대전차방호시설’이라는 것이다. 실제 1층의 필로티는 전방 지역의 도로나 철로 위에 설치된 낙석형 장애물의 지지대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아파트동 전체가 초대형 낙석 구실을 하도록 설계됐을 가능성이 충분하단 얘기다. 이런 점에서 유진상가는 ‘싸우면서 건설하자’ ‘총력안보’라는 유신(維新)식 구호가 물질화된 준전시 개발동원 체제의 상징물이었다. 세운상가가 변방 국가의 성장 기적을 과시하는 기념비이자 근대성의 승리를 고지하는 정치적 오브제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졌던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대목이다.

유진상가 왼쪽 측면부 지상에 조성된 필로티 공간. 폭 8m, 길이 200m의 이 회랑형 공간은 보행로와 주차 공간으로 사용 중인데, 유사시 아군 전파의 엄폐호로 활용되거나 기둥을 폭파해 도로 쪽으로 건물을 붕괴시킴으로써 적 전차의 기동을 원천 차단할 용도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유진상가 왼쪽 측면부 지상에 조성된 필로티 공간. 폭 8m, 길이 200m의 이 회랑형 공간은 보행로와 주차 공간으로 사용 중인데, 유사시 아군 전파의 엄폐호로 활용되거나 기둥을 폭파해 도로 쪽으로 건물을 붕괴시킴으로써 적 전차의 기동을 원천 차단할 용도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이처럼 긴요한 용도를 지녔던 유진상가는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 강도가 완화되고 남북 간 화해 무드가 조성되자 전술적 효용 가치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부도심에 위치한데다, 지하 주차장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편의시설도 없고 소음과 분진으로 인한 고통이 심각하다는 점은 주거 공간으로서의 매력마저 떨어뜨렸다. 설상가상으로 1994년 내부순환로가 건물의 상부를 지나가게 되면서 B동 아파트의 절반(4~5층)이 뜯겨나가는 비극을 겪는다.

잔여수명은 부동산 수익률에 달려

2000년대 중반 신자유주의 토건국가의 등장은 이 불임의 기형 건축물에 내려진 시한부 판정서나 다름없었다. 부단한 파괴에서 성장 동력을 취하는 이 체제 아래서 자본의 순환과 축적에 봉사하지 못하는 낡은 고정자본은 필연코 일소돼야 할 운명인 까닭이다. 이제 이 건축물의 남은 수명을 결정지을 변수는 변덕스런 부동산 시장의 수익률 그래프 뿐이다. 애도의 대상도, 멜랑콜리의 공간도 되지 못하는, 이 비루하고 데데한 유신 건축물의 비애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