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지옥으로 가는 스쿨버스

등록 2012-08-29 20:13 수정 2020-05-03 04:26
영화 <디태치먼트>

영화 <디태치먼트>

부모 세대는 학교를 ‘닫힌 교문’으로, ‘죽은 시인의 사회’로 기억한다. 지금 아이들은 학교를 ‘정글’이라 부른다. 야생성도 자생력도 잃은 아이들이 배회하는 폭력과 경쟁의 정글이다. 학원폭력과 집단괴롭힘, 자살 문제로 얼룩진 학교를 적나라하게 그린 영화들이 관객을 찾았다. 미국에서 만들어졌지만 우리 학교의 모습을 보는 듯 동시대적 교육의 풍경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22년 전 보다 더욱 숨통을 조이는 교육의 반시대성을 폭로한다.

폭력과 죽음에 무감한 아이들

제12회 교육방송 국제다큐영화제(EIDF) 개막작 (Bully)는 한 소년의 무덤에 꽃을 얹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기 땐 보는 사람마다 미소를 머금게 했던 소년이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만나는 친구들한테 괴롭힘을 당한다. 2009년 10월 미국 남부 조지아주 머레이 카운티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던 타일러 롱이 자기 집 벽장에서 목을 매서 숨졌다. 그가 목숨을 끊고 나서야 부모는 타일러가 학교에 가면 사물함에 머리를 쑤셔 박히고 죽기 전날까지 같은 반 친구들에게 “목이나 매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피를 흘리며 집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아들은 학교에서 매일 무시무시한 정신적 학대를 견뎌야 하는 ‘걸어다니는 과녁’이었단다. 운동신경이 떨어지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별종으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사상자가 속출하는 정글 속에서 아이들은 폭력에도 다른 아이들의 죽음에도 무감각해진다. 타일러가 죽은 다음날, 목에 밧줄을 걸고 코스프레하듯 등교한 아이들도 있었다. 학교와 교사들도 집단괴롭힘을 호소하면 “남자아이들은 원래 그렇다” “네가 더욱 강해져야 한다”며 손을 놓았다.

왕따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사회가 갈 길은 어디인가. 2009년 9월1일 저미야 잭슨은 스쿨버스에서 “놀리지 마, 놀리지 말란 말이야”라고 소리를 지르며 가방에서 총을 꺼냈다. 다행히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운동선수로 수많은 트로피를 받은데다 우등생이었던 저미야가 엄마를 위해 하루빨리 해군이 되겠다며 꿈꾸던 시절은 끝났다. 저미야를 기소한 검사는 “아무리 정신적 학대를 당했어도 매일 가혹한 신체적 폭력을 당한 게 아니라면 아이들을 총으로 위협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며 45건의 중범죄 항목으로 그를 기소했다. 오클라호마주 퍼킨스에 살던 타이 스몰리는 결국 자신에게 총을 겨누었다. 학교에서 집요하게 괴롭힘을 당하던 타이는 단짝 친구가 자신을 대신해 복수해주겠다고 하자 “그러지 마, 그러면 너도 그들과 똑같아지는 거야” 하며 만류했다.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던 12살의 타이는 자신을 처벌했다.

영화 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스크린 속 이야기가 모두 ‘실제 상황’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자유와 인권을 제일의 가치로 여기는 미국에서 학교와 공동체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희생된 5명의 아이들을 1년 동안 따라다녔다. 그중에는 타일러 롱과 타이 스몰리처럼 이미 집단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은 학생 2명이 포함돼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광고기획자로 알려진 리 허쉬 감독은 자신도 학교 때 왕따였다고 밝히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대상으로 가이드북을 만들어 배포했다. 가이드북에서는 2011년 미국 중학생의 89%가 집단괴롭힘을 목격한 일이 있고 그중 49%가 괴롭힘을 당해보았다고 한다. 다큐멘터리에서 부모들은 “우리는 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느냐”고 몇 번이고 묻는다. 아이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눈을 비비고 타는 스쿨버스에 지옥이 있다.

영화 <불리>에서 스쿨버스 뒤편에서 힘이 약한 아이가 짓밟혀도 버스 기사나 다른 친구들은 돌아보지 않았다. 학교 왕따는 약육강식의 사회를 닮았다. 사진 EIDF 제공

영화 <불리>에서 스쿨버스 뒤편에서 힘이 약한 아이가 짓밟혀도 버스 기사나 다른 친구들은 돌아보지 않았다. 학교 왕따는 약육강식의 사회를 닮았다. 사진 EIDF 제공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시들어가는

한국만큼 대학입시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미국에서 왜 집단괴롭힘 문제가 그토록 심각한 걸까. 답은 어른들이 사는 사회에 있을지 모른다. “제가 미국의 왕이라면 인기라는 걸 없애버릴 거예요. 모두가 평등해지게 할 거예요.” 자살한 아이의 유일한 친구였던 한 아이는 영화에서 말한다. 붕어처럼 생겼다며 늘 괴롭힘을 당하는 알렉스는 집에서는 별로 말이 없다. “왜 네 문제를 털어놓지 않느냐”고 타박하던 부모들은 막상 알렉스가 물어오자 대답할 말을 잃는다. “그들이 모두 제 친구가 아니라면 제 친구는 어디 있어요?” 남들과는 다른 성정체성을 커밍아웃하자 자신은 물론 부모까지 마을의 왕따가 된 켈비는 어떻게든 이사 가지 않고 버티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서 켈비 가족은 학교 중퇴를 결심한다. “우리는 이 도시를 바꿀 수 없어요.” 왕따를 견디다 못해 학교를 찾아가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교장을 보며 부모는 정치인들의 헛된 약속을 떠올린다.

그러나 학교의 속사정도 부모만큼이나 심각하다. 8월23일부터 29일까지 열리는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는 무기력하게 병들어가는 미국의 어느 고등학교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들은 교실에서 뭔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부모가 달려와 교사 뺨을 때리는 학교에서 교사들은 “나는 아이들을 가르칠 의무가 있는 게 아니라 지시만 따르면 된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누굴 죽이지만 않게 하자”고 다짐한다. 주인공인 임시교사 헨리(애드리언 브로디)도 “우리 사고에 침투하는 바보 같은 생각들과 싸워야 한다. 우리 자신만의 이미지를, 의식을, 시스템을 만들자”고 수업 시간에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실은 학생에게나 동료 교사에게나 가출 청소년에게나 거리를 두려고 애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쓴 전직 교사 칼 룬드나 미국 사회의 그림자를 입체화했던 영화 를 만든 토니 케이 감독이나 학교에 희망 따윈 남겨두지 않는다. 영화에서 한 교사는 “이런 삶은 끔찍하다”며 “감옥보다 더하다”고 되뇐다. 차라리 ‘아이들에게 자유를 허용하라’고 외치던 시기의 교육운동은 행복했을지 모른다. 지난 시기의 영화에서 아이들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교사들이 교단에서 쫓겨나는 수난을 겪었다면, 에서 교사들은 ‘수준 미달’ 아이들의 손을 잡았지만 대체 어디로 구조해야 할지 모르는 총체적 난국이다. “이 직업이 가장 나쁜 점은 아무도 우리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시들어가는 곳이 학교다. “우리 아이가 매번 욱하고 흥분하는 건 다 학교에서 대접을 못 받아서 그런 거라고.” 학교는 교사 탓만 하는 부모나 무력감에 시달리는 교사와 아이들이 서로 치고받는 정글이다.

영화는 평균 성적이 하위인 학교를 무대로 공공연히 교사들을 무시하는 학생들을 그린다. 얼핏 성취욕 낮은 학교에서 시들어가는 교권을 개탄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 반대다. 학교의 가치를 성적으로 측정하는 학교 밖 교육시장과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학교는 서서히 무너져내린다. 관료주의의 압박이 없었어도 시장에서 아무 승산이 없는 아이와 부모의 삶이 이미 예비한 결과인지 모른다. 영화의 비유를 따르자면, 학교는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에 나오는 ‘어셔가’처럼 절망적인 곳이다. ‘영구적인 해결책’을 찾겠다며 자살한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이 사회의 테두리에서 밀려나고 결국 부서져버리는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다”던 교사는 울부짖는다. “오늘에서야 알았어요. 난 사람이 아니에요. 난 허상이에요.”

영화 <불리> 사진 EIDF 제공

영화 <불리> 사진 EIDF 제공

학교 밖 사회의 공감을 호소하다

영화 가 전하는 메시지는 헨리가 무너진 교실에 홀로 앉아 학교를 지키는 영화 포스터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남은 것은 별로 없지만 우리가 한 짓을 마주해야 한다”는 교사 헨리의 메시지기도 하다. “세상을 떠난 아이는 곧장 신께로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뒤에 남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에서 자살한 아이의 부모는 되묻는다. 폭력을 외면하기 쉬운 구조에서 영상은 피해자의 어떤 증언보다 힘이 세다. 국제다큐영화제에 따르면, 2011년 미국에서 가 개봉되자 단체관람 운동과 ‘반왕따 캠페인’이 일었다. 학교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영화들은 지금 학교 밖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감을 호소하고 있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등급을 없애라고 외치는 영화”
청소년영화 만든 고등학생 감독 윤호준


정글의 법칙은 약육강식이라고? 살 수 있는 전략은 공생이다.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 출품된 청소년들이 만든 학교 영화를 보면 어두운 학교 공동체에서도 아이들은 기발한 해법을 내놓는다. 그중 성적 문제를 다룬 이 꿈꾸는 학교가 재미있다.
청소년영화 경쟁 부문에 선정된 단편 은 성적 때문에 자살하려는 친구를 위해 아이들이 아직 채점하지 않은 답안지를 훔치는 작전에 나선다는 이야기다. 수위실에 잠입해서 전산실 열쇠를 훔친 뒤 전산실 캐비닛에서 전교생 답안지를 훔쳐낸다는 조악한 계획에다 영화 에는 비길 수 없는 초라한 장비지만 아이들의 표정만큼은 특수요원 못지않다. 성적이 사라지자 아이들은 좋아 날뛰고 선생님조차 흐뭇하게 웃는다. “전교 꼴등이든 일등이든 한 가지는 분명했어요. 답안지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아이들은 모두 행복하고 자유롭게 웃는다는 것.”
영화의 각본을 쓰고 만든 사람은 경기고 3학년인 윤호준(사진)씨다. 윤씨는 “교육열 높기로 유명한 학교다 보니 학교 생활의 전부가 등급을 매기는 일이었다. 차별은 선생님한테만 받는 게 아니라 아이들 사이에도 있다. 등급을 없애라고 주문을 던지는 영화로 만들었다”고 했다. 영화 의 미션에는 세계의 운명이 달려 있지만 에는 아이들의 판타지가 달려 있단다. 그러나 서울 강남의 한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고3 친구 여러 명이 모여 학교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영화감독이 하고 싶은 윤씨가 감독과 제작을 맡고, 음악에 관심 있는 친구가 영화 배경음악 전부를 작곡했다. 학교 쪽의 촬영 허락을 받지 못했지만 선생님 몇 분과 매점 아저씨를 카메라 앞으로 모셔왔다. “우리 학교에서 영상 활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참혹했다. 어찌 보면 칭찬받을 수도 있는 일인데 학교에선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방해되니 아예 눈에 띄지 말라고 했다. 죄인 같았다”고 석 달 동안의 제작기를 쏟아냈다. 윤씨는 영화에서는 전교 1등으로 출연하지만 현실에선 당연히 뒤쪽에 가깝단다. “‘어쩔 수 없다면 스스로 개가 되지 말고 바꾸려고 노력하란 말이야’ 했던 영화 속 대사, 그거 제 말이에요.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칠판만 봤을 텐데 제도권 경쟁에서 떨어지니까 그런 것도 보였어요.”
제14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는 청소년 부문에선 국내외 총 350편 영화 중 24편이, 일반 부문에선 885편 중 20편이 선정됐다. 이 영화들은 8월29일까지 서울 고려대 인촌기념관, CGV 성신여대 등에서 상영된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