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님’이라는 말에 왜 ‘님’이 붙는지 알았다. 보고 싶어서, 그리워서, 가버리는 뒷모습에 애가 타서 ‘님’이다. 9월28일 낮 12시30분. 점심시간이 벌써 절반은 지났는데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 한켠에 서 있는 주황색 커피 트럭에는 사람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커피 트럭을 타고 전국 일주 중인 김태진·강선철(26)씨의 노상 카페 ‘끌림’은 개점 1시간 만에 휴업 위기를 맞고 있었다. 어제도 공쳤다더니 오늘 장사도 이러다 접겠구나. 기자와 사진기자가 아무리 트럭 앞에서 모델 포즈를 취해도, 어쩌면 그 때문에, 손님은 오지 않았다.
자리잡기, 3m의 경제학
보다 못해 제안했다. 저 앞 사거리엔 사람이 많다. 5m만 앞으로 가자. 트럭에서 내린 강선철씨가 고개를 흔든다. 다른 커피전문점이 보이는 자리는 안 된단다. 사거리에서 바라보니 얼추 3개의 커피전문점이 눈에 들어온다. 커피전문점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커피 노점의 불문율이다. 보이지 않는 지하상가까지 치면 대체 이 거리 안엔 몇 개의 카페가 있을까. 격론 끝에 트럭을 3m 앞으로 당겼다. 손님 눈에는 띄어도 가게 눈에는 띄지 않는 그 자리, 거기가 여길까. 자리를 옮기기 무섭게 오늘의 첫 손님이 들었다. 뒤를 이어 아까부터 멀리서 분위기를 살피던 손님도 트럭으로 다가왔다. 12시45분이었다.
지난 3월 중학교 친구인 김태진·강선철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광주에 커피 노점을 차렸다. 동원에프앤비에서 영업관리를 하던 김태진씨는 “새벽에 출근하고 밤중에 퇴근하고 술자리를 반복하는 생활에서 내 삶이 없어져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미술을 전공하고 편집 디자인을 하던 강선철씨는 “이러다가 사랑하던 디자인 일이 싫어질까봐” 회사를 그만뒀단다. 둘은 각자 1년 동안 회사를 다니며 모은 돈을 털어 오래된 1t짜리 트럭을 샀다. 6월8일 제주도로 떠나며 둘의 ‘커피로드’가 시작됐다. 70일 동안 제주도에서 커피를 팔며 여행을 했다. 8월 말 여름이 물러가자 그들도 뭍으로 건너왔다. 전라도 광양·순천만을 거쳐 목포, 전주, 대전, 청주를 지나 서울로 올라온 게 사흘 전이다. 올라오자마자 주차단속에 걸려 딱지를 끊었다. 각오했던 것보다 서울 길거리는 더 각박했다.
거리에 트럭을 세워놓고 커피를 파는 ‘이동 카페’가 등장한 것은 10년 전쯤이다. 그들 대부분은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때 회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리라. 서울 여의도에는 한때 15개의 커피 트럭이 있었고, 강남 테헤란로에도 그만큼이 있었다. 지금은 여의도에는 3~4개 트럭만 남아 있고 강남에는 아예 찾아보기 어렵다. 커피전문점이 크게 늘어났고 거리 단속도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도 가장 흔하게 시작하는 것이 커피 장사다. 통계청이 8월에 발표한 고용동향을 보면 올해 들어서만 40만 명이 자영업을 시작했고 가장 선호하는 업종 중 하나가 커피전문점이다. 스낵카 제작 지원 회사인 길벗의 황우연씨는 “경기가 어렵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상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는다”며 “5년 전에 비하면 스낵카 창업 문의는 30%가, 특히 커피 트럭 창업은 70~80%가 늘었다”고 했다. 황씨는 “한 커피 트럭은 전남 법성포 해변에 자리를 잡았는데 주말이면 하루에 손님 250명이 든다고 들었다. 요즘은 지방으로 많이 내려가고 지방의 커피 트럭이 더 잘된다. 서울은 경쟁이 심해서 자리잡기가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떠돌이는 밀려나는 거리의 법칙
기운을 찾은 진태씨가 두드리는 건반 소리에 몇몇 사람이 또 트럭을 기웃거린다. 지금까지 18명이 다녀갔다. 단속에 쫓겨 한 잔도 못 팔고 장사를 접은 날에 비하면 고무적이란다. 그래도 오늘 장사에 들인 재료값과 기름값에다 서울에서 먹고 자려면 하루 6만원은 벌어야 한다. 트럭 카페 ‘끌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아메리카노가 3천원이니 손님 두 사람만 더 있어도 좋겠는데 점심시간을 넘긴 사무실 지구는 아예 인적이 끊겨버렸다. 홍익대 앞으로 자리를 옮겨 도전해보기로 했다.
여행이든, 시위든, 장사든 거리에 서보아야 알게 되는 세상이 있다. 홍대 앞은 누구에겐 문화의 거리고, 누구에겐 전쟁터다. 노하우를 듣겠다고 찾아간 이곳 길거리 음식의 터줏대감 격인 한 상인은 “왜 젊은이들이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다니냐”고 되물었다. “낭만으로 여행하는 것은 좋은데, 돈 벌려거든 남달라야 한다”고 타이르기도 했다. 홍대 앞 골목을 돌고 돌아 현기증이 날 무렵 한적한 골목을 발견했다. 그러나 트럭 문을 열기도 전에 골목 앞 상인이 달려왔다. 아뿔싸, 2층 카페를 못 봤구나. 다시 서울을 도는 사이에 해는 지고 있었다.
운좋게 자리를 잡는다고 해도 손님들의 발길을 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없는 길거리 커피는 먼저 손님과 낯가림을 없애야 한다. 용기를 내서 거리로 나선 트럭 주인도 낯을 가리기는 마찬가지다. 이태원에서 ‘밴 카페’를 하는 김제명씨는 “매일 트럭 문을 열고 거리에 좌판을 벌일 때마다 두렵다. 내 가게였으면 이랬을까 싶다”고 털어놓았다. ‘인디 카페’ 경영자인 황송미씨는 커피 트럭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됐지만 실제 장사를 해본 것은 닷새밖에 안 된단다. 바리스타 일을 배우며 커피에 대한 공부를 쌓았지만 막상 필요한 것은 거리에 자리잡는 뚝심이었다. 미술치료사면서 주말 부업으로 커피 트럭을 구상한 황씨는 “노점으로 먹고살려고 장사를 했다면 몸과 마음이 더 힘들어 배겨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충남 서산을 도는 ‘인디 카페’는 2천원대의 저렴한 커피와 직접 만든 수제 쿠키를 싣고 다닌다. 적당한 길목을 찾거나 주변 상가와 타협하며 자리를 잡으려 애쓰는 중이라고 했다.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는 트럭의 비결은 무엇보다도 꾸준함이다. 서울의 오래된 커피 트럭 중 하나인 남산식물원 앞 커피 트럭은 11년을 넘겼다. 형이 하다가 동생에게 넘겼고 올해부터는 아들이 이어받았지만 밤이면 남산 앞에 정차하기를 거르지 않았다. ‘남산 벅스’라는 애칭을 지닌 이 커피 트럭의 주인 계종철씨는 “밤에 마시는 커피답게 연하고 부드럽게 만들고 과일주스, 차, 탄산음료 등 메뉴를 다양하게 한 것이 비결”이라고 했다. 낮의 커피 트럭은 좀더 진한 경험이다. 여의도의 ‘김약국’은 2년 만에 많은 단골과 입소문을 지닌 트럭 카페로 자리잡았다. 주인 방현주씨는 “깨끗하고 진한 커피를 내려고 보통 카페보다 원두를 2~3배 더 쓴다. 그날그날 남편이 하는 카페에 들어오는 원두를 쓰느라 커피 종류도 매일 바뀐다”고 했다. 이곳을 소개한 의 저자 김지현씨 말대로라면 “약처럼 여겨지는 드립 커피”가 사람들을 굳이 10차선 도로를 건너서 이곳에 들르게 한다. 점심시간 단 2시간을 열지만 약이 되는 커피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명소가 됐다.
주인 닮은 커피맛
밤 10시. 김태진·강선철씨의 트럭이 철교 아래 한강변에 자리를 잡았다. 운동 나온 사람들이 기웃거릴 뿐인 한적한 곳이다. 둘은 곧 서울을 떠나 동해안을 달린단다. 10월 말 부산에서 그들의 ‘커피로드’는 끝날 예정이다. 자정이 다가올수록, 28만km를 넘긴 그들의 트럭 소리만 커져갈 뿐 매상은 잠잠하다. “꼭 돈을 벌어야 제맛이냐. 이렇게 사는 게 재밌다.” 김태진씨의 말이다. 그들이 만드는 커피는 상큼한 향을 풍긴다. 커피 트럭의 커피맛도 주인을 닮는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독특한 노점 음식 열전
어디 새로운 음식 없소?
어디 새로운 음식 없을까? 유행에 민감한 길거리 음식은 늘 새로운 음식에 허기지다. 아이디어가 눈에 띄는 길거리 음식을 소개한다.
홍익대 앞에서 시작한 봉지 칵테일의 유행은 대학로로 번졌다. 대학로에서 4년째 봉지 칵테일을 판매하고 있는 ‘보난자 칵테일’은 주로 5~8월에 시원한 알코올 음료를 찾는 20대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얼음을 채운 칵테일 하나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1분 정도. 부산에서 오랫동안 바텐더를 했다는 주인은 “술집에서 만드는 정석대로 하면 길거리 칵테일은 안 먹힌다”며 “술은 그대로 들어가되 좀더 자극적이고 싱싱한 맛을 내야 한다”고 비결을 일러준다. 26가지 칵테일의 원료가 되는 것은 30여 가지 술과 주스, 탄산음료들이다. 이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미도리 사워다. 5분 사이에도 15명이 금세 긴 줄을 서는 이곳은 많을 때는 하루 200명이 다녀간다. 평일은 오후 5시쯤 문을 열어 새벽 1시까지 불을 밝힌다.
이태원역 2번 출구 앞은 자정부터 샌드위치를 파는 야식 1t 트럭들이 점거한다. 흰색 트럭들의 긴 줄 맨 끝에 있는 ‘밴 카페’는 검은색 밴자동차에서 샌드위치와 간단한 음료를 판다. 터키·모로코 등 각국의 이색적인 음식 트럭 사이에서 이제 4개월에 접어든 신참내기 샌드위치 트럭 ‘밴 카페’가 마련한 전략은 고급스러운 길거리 음식이다. 자동차 구입비만 3천만원을 넘겼다니 투자액이 만만찮다. 샌드위치는 말랑말랑한 식감을 위해 크루아상 빵을 쓴다. 무슬림들의 발길을 붙잡으려고 만든 안심 치킨버거에는 카르보나라 소스를 섞는다. 불고기버거에 들어가는 불고기는 모두 집에서 만든 것이란다. ‘밴 카페’를 운영하는 김제명(34)씨는 “식당에선 재료비가 가격의 30%를 넘지 말아야 하는 불문율이 있다는데, ‘밴 카페’의 재료비는 가격의 절반을 넘는다”고 했다. 매일 밤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영업한다.
철판에서 고기를 볶는 향이 길거리에 퍼지면서 배고픈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이집션 샌드위치’는 케밥을 바게트 사이에 넣은 샌드위치를 파는 트럭이다. 이집션이라고 이름 붙었지만 미국인과 한국인 손님들로 작은 트럭이 붐빈다. 양파·감자를 넣은 베지테리언 샌드위치나 양고기·쇠고기 등의 샌드위치에서 고를 수 있다. 치즈·양파를 섞은 샌드위치는 이국적이라기보다는 미국식 버거 느낌이 강하지만 기름지고 매콤한 맛이 중동의 향을 전한다. 이 집의 인기 메뉴는 양고기 샌드위치. 외국인들 중에도 매운 샌드위치를 고르는 사람이 제법 된다. 물론 우리의 고춧가루와는 달리 톡 쏘는 자극적인 매운맛 샌드위치다. 이집트에서 식당을 했다는 알리 칼릴(36)이 한국 부인을 따라 한국 생활을 시작하며 차린 카페다. 밤 10시에 열어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영업한다.
일본 라면 붐을 타고 한국에도 일본 라면 트럭이 왔다. 월·수·토요일에는 지하철 노원역 7번 출구 근처 길가에, 화·목·금요일에는 공릉동 철길 근처에 ‘타쯔야’라는 일본식 천막을 두른 작은 트럭이 선다. 육수가 진한 일본식 라면이 낯설어서 들어왔다가 발길을 돌리는 사람도 있지만 저녁을 놓친 직장인이나 야식을 찾는 근처 학생들의 발길이 꾸준하다. 한국 라면에 익숙한 사람은 매콤한 맛이 장점인 가라쇼유라멘이나 탄탄면을, 일본 라면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쇼유·돈코쓰·미소라멘 등을 찾는단다. 가격은 4천~5천원대. 이제 4개월째 접어드는 일본 1t 트럭을 1200만원에 구입해 조리도구를 갖추고 트럭을 꾸미는 데도 찻값만큼 돈이 들었다니 주인 처지에서야 아직 갈 길이 멀다. 주인은 라면에 얹는 자슈를 즉석에서 구워내고 스프와 인스턴트 생면으로 기름기를 줄인 일본식 라면을 만든다. “한국 사람 입맛에는 느끼하거나 짜지 않은 라면이 제격”이란다. 일본 라면의 길거리판 재해석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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