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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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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길을 걷는 이유가 있다 -⑪ 강화 나들길(인천)

자연과 역사, 숲길과 뚝방길, 산과 바다가 한 코스에 모두 있는 강화 나들길… 길의 끝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의 가족이 있는 곳에 이르다
등록 2011-09-28 07:12 수정 2020-05-02 19:26
강화 나들길에 간다면 해질 무렵에 해안가에 도착하는 일정을 짜는 것이 좋다. 황지우 시인의 표현대로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는 쓸쓸하게 아름답다.

강화 나들길에 간다면 해질 무렵에 해안가에 도착하는 일정을 짜는 것이 좋다. 황지우 시인의 표현대로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는 쓸쓸하게 아름답다.

먼저 연꽃이 행인을 맞았다. 인천 강화군의 강화터미널을 출발해 외포리로 가는 강화 나들길 제5코스 ‘고비고개길’ 들머리, 국화저수지에 손바닥만 한 연꽃이 피어 있었다.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쳐진 국화마을 앞에 소담하게 앉은 저수지는 포근했다. 9월20일 화요일, 평일 오후의 고즈넉한 저수지를 돌아가는 길에서 중년의 부부를 만났다. 인근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부부는 “일을 하다가 잠시 산책을 나왔다”고 했다. 이렇게 숲길을 걷다 보면 뚝방길로 이어지고 숲길과 뚝방길 사이에 마을이 나오는 강화 나들길은 ‘생활에 가까운’ 길이다. 인천에서는 1시간, 서울에서는 2시간이면 이르는 길을 강화 사람, 서울 사람, 인천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다. 이날 길잡이로 동행한 고근정 강화군 관광개발사업소 개발팀장은 “낮은 산 허리를 도는 코스가 많은 강화 나들길은 중·장년이나 어린이가 있는 가족이 걷기에 좋다”며 “혹시나 산에서 헤매게 돼도 조금만 내려가면 마을이 나오니 길 잃을 걱정도 없다”고 소개했다.

길을 벗어났다 돌아오는 묘미

3km 되는 국화저수지 길을 돌면 숲길로 이어진다. 다리가 살짝 불편한 어른이 걸어도 무리가 없을 숲길을 걷다 보면 국화리 학생야영장이 나온다. 등에 살짝 땀이 배면 야영장 계단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다. 제5코스에서 그나마 ‘난코스’에 속하는 고비고개를 지나다 보면 고려산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4월이면 온 산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서 진달래축제가 열리는 산이다. 해마다 상춘객 40만 명이 진달래 장관에 취한다. 고려산은 제5코스 경로는 아니지만, 완만한 숲길을 걷기에 조금 심심한 이들은 코스를 잠시 벗어나 산행하는 것도 좋겠다. 실제 강화 나들길에 익숙한 이들은 반드시 코스를 따라 걷지 않는다. 잠시 경로를 벗어나 강화 도처에 산재한 유적지를 보고 다시 코스로 돌아온다. 이렇게 나들길에서 정해진 길에서 벗어났다 다시 길로 돌아오는 인생길 같은 묘미도 있는 것이다.

적석사 낙조대에서 내려다본 강화의 풍경.

적석사 낙조대에서 내려다본 강화의 풍경.

다시 걷는다. 고천리를 지나 오상리 고인돌에 이르기 전, 약간의 수고를 더하면 잊지 못할 풍경을 얻는다. 제5코스 오른쪽의 적석사를 따라 올라가면 낙조대 전망대에 이른다.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지만, 일단 올라가면 강화도 들판부터 바다 건너 석모도, 교동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을 보면 멀리 마니산 등성이가 보이고, 오른쪽 아래에 펼쳐진 논은 평야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다. 고근정 팀장은 “논이 넓어서 저기에 미곡 처리장도 있다”고 전한다. 가히 산과 물과 논과 집이 어우러진 장관이다. 날이 맑아 시계가 좋았던 이날은 멀리 경기도 일산의 아파트 단지도 보였다. 오후에 보아도 장관인데, 낙조대란 이름처럼 서해 바다로 해질 무렵의 풍경은 더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풍경에 취해 있을 즈음, 한 무리의 장년들이 낙조대에 올라왔다. 어김없이 한 아저씨가 “아이고~ 여기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네”라고 탄식하듯 뱉는다. 가을 바람에 놀란 풍경 소리가 ‘쨍’ 하는 적석사는 역사가 깊었다. 고구려 장수왕 시절에 천축도사가 고려산에서 오색 연꽃을 날려 그 꽃이 떨어진 곳마다 절을 지었는데, 붉은 꽃이 떨어져 ‘적련사’라 불렸다가 ‘적석사’로 바뀌었다고 절의 안내문은 전했다.

오상리 고인돌을 지나 숲길을 내려오면 내가 저수지에 이른다. 풀이 발밑에 폭신하게 밟히는 저수지 뚝방길을 걷는데 물가에서 ‘후두둑’ 소리가 들린다. 야생 오리떼 수십 마리가 인기척에 놀랐는지 저수지 물 위를 뛰어간다. 고근정 팀장은 “겨울이면 철새들이 알곡을 쪼으러 논밭에 몰려든다”고 전했다. 뚝방길 오른쪽 아래 길에는 가을 코스모스가 늘씬한 몸을 흔들고 있었다. 저수지 바람을 맞으며 뚝방길을 돌아가면 내가면 마을이 나온다. 마치 시계를 30년 전으로 돌린 것 같은 낡은 단층 건물들이 나란한 내가면에는 시장도 있다. 5시간여를 걸어왔으니, 여기서 허기를 달래도 좋다. 마을길에서 구수한 된장찌개를 내놓는 시골 밥집들이 행인을 맞는다.

마을을 잠시 지나면 다시 숲길이 나온다. 길은 덕산삼림욕장 입구를 지나는데 해질 무렵까지 시간이 남았다면 삼림욕장을 한 바퀴 돌아도 좋다. 어느새 물드는 삼림욕장 들머리 나무들이 가을이 왔음을 알렸다. 굳이 삼림욕장으로 들어서지 않더라도, 외포리로 넘어가는 길은 삼림욕장 부럽지 않은 숲길이다. 풀냄새에 취해 가다 보면 숲길은 자연스레 마을로 내려가는 길로 이어진다. 시골 민가의 뒷산인 셈인데, 여기에 외포리 굿당이 있다. 반농반어의 시골답게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굿을 지내는 곳이다. 여기의 곶창굿을 이끌던 만신은 무형문화제로 지정됐고, 요즘도 2~3년에 한 번씩 음력 2월에 굿판을 벌인다. 사흘간 진행되는 굿은 매일 오후 4시까지만 진행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밤을 새운다. 공동체적 특징이 유난히 살아 있는 굿이다.

김진숙씨 언니네 가족이 운영하는 외포리 버스정류장 옆의 슈퍼.

김진숙씨 언니네 가족이 운영하는 외포리 버스정류장 옆의 슈퍼.

민근부씨의 차부수퍼를 찾아서

변덕스런 바다에 목숨을 맡겨야 하는 현실의 거울인 굿당이 바다가 가까워졌음을 알린다. 아니나 다를까, 굿당을 지나면 바다가 보인다. 굿당에 이어진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면 백발의 촌로가 홀로 앉아 낯선 이에게 “방금도 (사람들) 많이 지나갔소” 하며 인사를 건넨다. 외포리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혹시 차부상회 아세요?” 답을 크게 기대치 않았는데, 촌로가 아래로 보이는 마을 왼쪽을 가리키며 “저기야”라고 한다. 혹시나 잘못 전달됐나 싶어 다시 묻지만 역시 대답이 같다. 정말로 그곳이 있다는 말인가?

저마다 길을 걷는 목적이 있다. 애초 ‘걷고 싶은 길 12선’ 가운데 강화를 가겠다고 한 이유는 뚜렷했다. 강화가 그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부산에서 깃발처럼 휘날리는 크레인에 올라 있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그의 책 에는 ‘차부상회 민근부의 고백’이란 글이 실려 있다. 여기에 “30년 넘도록 수리를 한 적도, 청소를 한 적도, 문을 닫아본 적도 없는 강화도 외포리 ‘차부상회’의 민근부. 쉰아홉 살의 우리 큰언니다”라고 나온다. 정말로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갔는데 정말로 있었다.

내려가서도 헤매지 않을까 했는데 쉽게 찾았다. 할머니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어림잡아 찾아가자 차부수퍼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외포리 버스정류장 바로 옆이었다. 그런데 김진숙과 민근부, 자매지만 성이 다르다. “월북한 남편을 잃고, 월남한 새 남편을 맞아야” 했던 어머니가 낳은 첫 딸이라고 책에 이유가 나온다. 김진숙씨는 글에서 “‘근부 팔자는 지발 내 팔자 안 닮게 해주시겨.’ 우리 엄마 기도도 보람 없이, 결혼식 날 마신 술에서 35년 동안 단 하루도 깬 날이 없는 남자에게 (언니가) 시집을 갔다”고 했는데, 이날도 그 ‘남자’가 불콰한 얼굴로 손님을 맞았다. 캔커피를 사며 “김진숙씨 언니 댁이 맞느냐”고 하자 경계하는 눈빛으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신분을 밝히자 김진숙씨의 큰형부는 “그 사람 목적은 노동자 살리자는 것뿐”이라며 “우리도 3차 희망버스 타고 부산에 갔잖아”라고 말했다. 남동생 장례식 날에도 “가게를 보던 조카에게 ‘엄마, 와사비 얼마야?’라고 묻는 전화가 오면 ‘큰 거? 짝은 거?’ 묻고는 ‘짝은 건 820원’ 대답하고는 다시 우는” 언니는 이날도 바빠서 가게에 없었다. 강화에서 태어난 김진숙씨는 부산으로 가기 전까지 여기서 자랐다. 서해 포구에서 자란 소녀가 남해 조선소 크레인에 올랐으니, 그와 바다의 기막힌 인연이 새삼 기막혔다.

머리 위까지 물들인 석양

강화 나들길 제5코스 ‘고비고개길’의 여정은 망양돈대에서 끝난다. 항몽의 기운이 서린 돈대는 포를 쏘려고 쌓은 성곽이다. 그 옛적에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은 돈대에 서니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은 머리 위의 구름까지 붉게 물들이며 숨 막히게 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강화도 나들길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길이다. 숲길을 걸으면 갯벌에 이르고, 소박한 시장에 발길을 멈추면 다음엔 삼별초 유적이 나온다. 이렇게 강화의 자연은 당신을 보듬고 역사는 말을 걸어올 것이다. 바다에 이르면 해안을 떠도는 상념도 있다.

강화=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강화 나들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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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 코스 골라 걷는 재미
강화 나들길은 8개 코스가 있다. 강화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해 주요 유적지를 돌아보는 제1코스 ‘심도역사문화길’부터 초지진에서 시작해 갯벌길에 이르는 제8코스 ‘철새 보러 가는 길’까지 역사·숲길·갯벌 등 주제에 따라 선택할 여지가 많다. 매주 둘째·넷째 토요일에는 길잡이가 코스를 인도하는 ‘정기도보’도 진행된다. 8개 코스에 대한 설명과 정기도보 공지 등은 강화 나들길 카페(www.trekking.go.kr)를 참고하면 된다. 걷기의 성취감을 더하는 프로그램도 마련해두었다. 강화군은 도보여권을 만들어 코스별로 출발점과 도착점에서 도장을 찍어준다. 8코스 도장을 모두 받으면 완주 인증서도 보내준다.

■ 제5코스 및 소요시간강화버스터미널~남문~서문~국화저수지~홍릉~오상리고인돌군~내가시장~덕산산림욕장~곶창굿당~망양돈대~외포여객터미널 20.2km, 6시간40분

■ 가는 방법서울 신촌에서 3000번 버스를 탄 뒤 강화버스터미널에 내린다. 15분마다 버스가 있다. 인천에서 강화로 가는 70, 700, 700-1번 버스 등도 있다. 자가용으로 가도 일단 강화터미널로 가는 편이 좋다. 제8코스 도보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는 외포버스터미널에서 강화버스터미널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면 된다.

■ 탐방 안내
강화군 관광개발사업소 032-930-4331
외포리관광안내소 032-934-5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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