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산을 가로지른 뒤 마을을 만난다. 소담스러운 돌담을 지나면 다시 산이 나오고 다른 마을과 풍경을 이어준다. 그 안에는 역사의 숨결과 한이 서려 있다. 전남 강진과 영암을 잇는 ‘다산유배길’은 가는 곳곳에 이야기를 한 보따리씩 품고 있다. 이야기에는 유배에서 알 수 있듯, 강진의 자랑거리인 고려청자의 색깔처럼 푸르스름한 서러움이 묻어난다.
강진은 조선 태조 때인 1417년 광주시 광산구에 있던 전라도 병영을 왜구를 막으려고 이곳으로 옮기며 땅 이름이 생겨났다. 당시 영암 땅이던 도강마을과 장흥 땅 탐진마을을 합쳤고, 두 마을의 한 글자씩 따서 ‘강진’이 됐다. 이곳은 ‘북 개성 남 병영 상인’이라는 말이 있듯 상업이 발달했다. 심지어 “병영 사람이 아기를 낳을 때 뱃속 아이에게 ‘아나 동전’이라고 말하면 금방 나온다”는 말까지 있었다.
다산의 유배지, 영랑의 고향병영의 풍요함은 사라진 지금 ‘길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자랑으로 갖고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로 잘 알려진 영랑 김윤식의 고향이고, 다산 정약용이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며 자신의 학문을 세운 곳이다. 이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길은 설렘을 선물한다.
긴 장마 끝에 햇볕이 내리쬐던 8월23일 다산유배길을 걸었다.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월출산을 지나면 야트막한 산과 과거로 돌아온 듯한 풍경을 지닌 강진읍이 나온다. 강진만을 따라 바다로 나가면 다산수련원을 만난다. 이곳이 출발지다. 수련원은 길손들에게 싼값(2인 기준 1만8천원)에 방을 내주거나, 정보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문화해설가를 연결해준다. 취재진은 지난해 서울에서 강진까지 다산유배길 약 420km를 걸은 윤동옥 문화해설가와 동행했다.
시작은 정호승 시인이 ‘뿌리의 길’이라고 부른 흙길이다. 소나무 뿌리가 바닥에 모습을 드러낸 채 혈관처럼 얽혀 있다. 정 시인은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고 읊었다.
만덕산 중턱의 흙길과 계단을 몇 걸음 지나면 다산이 학문을 집대성한 다산초당이 나온다. 다산은 1801년부터 시작한 유배생활 가운데 1808년부터 1819년 해배될 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렀다. 다산은 등 500여 권의 저작을 남기는 한편으로 계단밭을 만들어 미나리 등 농작물을 직접 재배했다. 1955년 복원된 다산초당은 여전히 흔적을 간직한다. 바위에 글을 새겼다는 정석(丁石) 바위, 찻물을 받았던 약천, 차를 우려 마셨던 다조와 잉어 두 마리가 노니는 연지석가산 등 ‘다산 4경’이 나온다.
다산초당을 등지면 바로 천일각을 만난다. 다산 유배 시절에는 없었지만, 이곳에서 여성의 자궁을 닮았다는 강진만을 굽어볼 수 있다.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간척사업으로 상당 부분 뭍으로 변했지만, 여전히 짠내를 간직한 강진만은 넉넉한 갯벌과 바닷물을 자랑한다.
백련사로 향하면 사람의 손때가 덜 묻은 녹차밭과 꽃이 핀다는 동백숲이 마중 나온다. 8월 하순이라 꽃은 졌지만, 꽃대궐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동백나무 수천 그루가 자태를 뽐낸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숲은 11월 말에서 이듬해 4월까지 두 번 꽃을 피운다. 소설가 조정래는 에서 “동백꽃의 절정의 아름다움은 낙화에 있었다. 꽃이 지되 벚꽃처럼 꽃잎이 낱낱이 흩어지지 않고 꽃송이 그대로 무슨 슬픔이나 서러움의 덩어리인 양 뚝뚝 떨어져내렸다. 변색하지 않고 떨어진 그 꽃송이들은 또 땅 위에다 새로운 꽃밭을 현란하게 이루어놓았다. 사무친 한을 풀 듯 동백꽃은 나무에서 한 번, 땅 위에서 또 한 번, 두 번 피어나는 꽃이었다”고 썼다.
옛 풍경과 역사를 살펴본 보람백련사를 거쳐 도로를 만나면 바로 강진만이다. 갈대와 갯벌이 어우러진 강진만은 겨울에는 청둥오리, 도요새, 백로 등 철새를 볼 수 있다. 아예 이들을 잘 살펴볼 수 있도록 철새 관찰 지점을 만들어 망원경까지 마련했다. 여름 뙤약볕은 강진만의 물결 위에서 부서지며 지나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남해 바다의 입구와 탐진강의 끝자락에 갈대밭이 흐드러져 있다. 갈대를 끼고 걸으면 어느새 마을이다.
남포마을과 목리마을은 금방이라도 마을 이장이 마이크로 “○○댁, 서울서 전화 왔소. 언능 전화받으쇼”라는 안내를 하던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텃밭에서 자라는 호박과 옥수수, 콩, 깻잎 등도 정겹다. 여유로움을 지나면 부산스러운 강진 5일장을 만난다. 이곳에서는 민물새우로 만드는 토하젓을 비롯해 많은 농수산물을 살 수 있다.
장터를 지나면 다시 다산의 흔적을 만난다. 처음 유배 와서 머물렀던 곳인 ‘사의재’다. 죄인인 다산을 반겨주는 이가 이곳 주모밖에 없었다. 다산은 주막집에서 4년 동안 지내며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방을 사의재라고 지었다.
또 다른 자랑인 영랑 생가도 이웃하고 있다. 남도의 말로 가냘프고도 질긴 서정을 노래한 순수 낭만주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김윤식이 나고 자란 집이다. 가는 길에 만나는 영랑사진관, 모란마트, 모란세탁소, 모란아구찜 따위는 이곳 사람들의 영랑 사랑을 가늠케 한다. 이곳을 관리하는 박선덕씨는 “영랑 생가에 오는 사람들은 편안함과 명당 기운을 느끼고 간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곳까지 도달하면 산을 거치며 난 땀은 기분 좋게 식고, 옛 풍경과 역사를 살펴본 보람이 남는다. 다산유배길 1코스로 15km인 ‘다산오솔길’이다.
영랑 생가 뒤쪽으로 다산이 사의재 이후 머무른 고성사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길은 강진읍을 껴안은 보은산의 허리를 감싸고 있다. 윤동옥 해설가는 “맏아들 학연이 다산을 찾아오자 입이 늘어 사의재에 머무를 수 없어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옮겼다”며 “그때 끼니를 걱정하며 걸었던 길”이라고 소개했다. 가장의 책임이 어깨를 짓누르지만, 그것을 다하지 못하는 무거운 발걸음이 이 길에 새겨진 셈이다. 가는 도중에 ‘보은산 약수터’가 있다. 목마름을 넉넉히 감싸주는 시원함과 함께 색다른 ‘천연 샤워장’을 선물한다. 아니 선물했다. 윤 해설가는 “이곳에 돌담으로 만든 샤워장이 있어 바깥에 수건을 걸어두면 안에 누가 있다는 표시로 알고 기다리며 씻던 곳”이라며 “지난달까지 있던 목욕탕이 50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음에도 사라진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고성사는 바로 아래 강진읍과 멀리 강진만까지 굽어본다. 오랜 절들이 그렇듯, 산을 배경 삼아 자연을 마당으로 내려다보는 경치다. 다시 길을 시작하면 넉넉하던 길이 맞은편에서 사람이 오면 비켜서야 할 만큼 오솔길이다. 늘씬하게 뻗은 삼나무를 비롯해 참나무, 편백 등을 벗삼아 걷는 길은 좁은 만큼 호젓한 맛을 선사한다.
‘어쩌면 그리 도봉산 같아’숲길이 끝나면 다시 마을이다. 강진에 “1금당 2향촌”이라는 말이 전할만큼 최고 명당으로 꼽히는 금당마을이다. 그만큼 많은 문인과 지사를 배출했다고 자랑한다. 마을 한복판에 자리잡은 금당 백련지는 연꽃이 흐드러진 사이에 두 개의 섬이 있다. 다시 평지로 이어진 길은 이웃 마을과 닿는다. 달마지마을은 매일 낮 12시와 밤 9시에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려준다. 호랑이 울음소리로 마을에 멧돼지가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영랑 생가에서 이곳까지가 2코스로 13.4km인 ‘시인의 마을길’이다. 다산수련원에서 오전에 시작했다면 이곳에 도착하면 하루가 지난다.
이곳부터 월출산의 모습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밋밋한 산 사이로 중뿔나게 튀어오른 산의 남쪽은 차밭과 넉넉한 농지를 제공한다. 한 발짝씩 떼면 소담하고 한적한 맛으로 잘 알려진 무위사가 나온다. 극락보전은 대표적 목조건축물로 국보 13호로 지정돼 있고, 아미타삼존벽화와 수월관음도가 보존돼 있다. 하지만 새 절당이 세워지고 여전히 공사 중이어서 ‘무위’라는 본연의 맛은 희미해졌다.
월출산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풍경은 더욱 풍성해진다. 무위사를 등지면 녹차밭을 만난다. 초록바다인 녹차밭은 보성 녹차밭에 비해 경사가 완만해 마음마저 푸근해진다. 이어 등장하는 백운동 계곡은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정과 함께 호남의 3대 원림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과 하늘이 보이지 않는 숲이 갈 길 바쁜 행인들의 발을 붙잡는다.
월출산 남쪽을 거슬러 올라가면 북쪽으로 향하는 고개가 나온다. 조선시대 영암과 강진의 경계인 누릿재다. 도로가 생긴 뒤 쓰이지 않은 이 길은 최근 새로 뚫렸지만, 여전히 나무와 넝쿨이 빽빽하다. 누릿재는 다산이 유배 오며 돌아보지 말기를 스스로에게 당부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넘으며 “누리령의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라고 당시 심정을 노래했다. 이곳을 지나면 영암이고 북쪽을 바라볼 수 있는 천황사와 만난다. 이곳까지 3코스로 16.6km인 ‘녹색향기길’이다.
다산유배길은 이곳에서 월출산을 감싸고 서쪽으로 향한다. 최근 개발한 ‘월출산기찬랜드’ ‘기건강센터’가 있고, 영암이 자랑하는 도갑사, 왕인박사 유적지 등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유배길의 원형은 서쪽이 아닌 동쪽이다.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길이 길은 코오롱스포츠가 후원한 ‘삼남대로’의 일부 혹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열고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불린다. 같은 길이 주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다산 선생의 흔적을 찾는 길이거나, 옛 한양에서 해남과 제주까지 이어지는 조선대로의 가장 긴 구간인 삼남대로를 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걸어보면 명칭은 중요치 않다. 누구에게는 실연의 아픔을 달래는 위안길이고, 누구에게는 가족과 함께 사랑을 꽃피우는 행복길이 될 테니까. 다만 걷는 내내 행선지를 안내하는 띠와 문패에 박힌 ‘코오롱 스포츠’가 상업적인 냄새가 나 불편하게 한다.
강진=글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 target="_top">youngil@hani.co.kr
1코스(다산오솔길): 다산수련원~다산초당~백련사~철새도래지~남포마을~목리마을~강진5일장~사의재~영랑생가 15km 5시간
2코스(시인의 마을길): 영랑생가~보은산방(고성사)~솔치~금당마을(백련지)~성전달마지마을 13.4km 4시간30분
3코스(녹색향기길): 성전달마지마을~무위사~안운마을(백운동)~강진다원(녹차밭)~월남사지3층석탑~월남마을~누릿재~천황사 16.6km 5시간30분
■ 가는 방법
강진버스터미널에서 다산수련원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1시간마다 있다. 30분 정도 걸린다. 승용차는 편하지만, 한 방향으로 길이 진행돼 다시 돌아와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 탐방 안내
강진군관광안내 061-430-3224
영암군 관광안내 061-470-2114
강진군다산수련원 061-430-3786
■ 먹거리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쓴 에서 추천한 ㅎ 식당은 며느리가 물려받은 뒤 맛을 잃었다는 얘기도 있다. 유 전 청장도 에서 정정했다. 다산수련원 쪽은 한정식 집으로 종가집, 예향, 명동식당 등을 추천한다. 가격은 4인 기준으로 한 상에 10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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