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노루, 고라니 기척과 함께 걷다-②진안고원 마실길

잃어버린 고향길의 원형을 간직한 진안 마실길… 숲길 지나 만난 마을 할머니가 “뭣 하는 양반이여?” 묻네
등록 2011-07-27 08:58 수정 2020-05-02 19:26
» 전북 진안 백운면 영모정에서 고원으로 오르는 길 옆 비사랑마을. 한겨레21 이종찬

» 전북 진안 백운면 영모정에서 고원으로 오르는 길 옆 비사랑마을. 한겨레21 이종찬

도시인들이 시골 마실길의 정취를 알지는 모르겠다. 고개를 넘어가면 한 마을이 나오고 또 고개를 하나 넘어가면 마을이 나오는…. 전북 진안의 고원 마실길은 어린 시절 내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잃어가는 고향, 우리 농촌의 삶이 오롯이 보인다. 시속 110km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는 볼 수 없는 삶이 있다.

차는 내륙으로 내륙으로 달린다. 교과서에 나온다지만 까마득하다. 진안도 대관령처럼 고원이다. 평균 해발 400m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가다 진안을 20km 남짓 남겨뒀을까. 에어컨을 켠 차가 힘겨워한다. 길은 줄곧 오르막이다. 멀리 마이산(해발 686m)이 보일 때가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이름처럼 두 봉우리의 모양이 말의 귀를 빼닮았다. 드문드문 눈에 들어오는 마이산이 더 설레게 만든다. 진안읍내 모습이 소박하다.

마을을 8개나 잇는 1코스

진안고원 마실길은 4개 코스로 이뤄져 있다. 읍내에서 13km 가까이 떨어진 백운면 평장보건진료소 인근 영모정에서 출발해 원덕현마을에 이르는 10.2km가 1코스 ‘고개 넘어 백운길’(약 3시간30분), 영모정에서 신광재를 거쳐 신전마을로 가는 19.48km가 1-1코스 ‘신광재 가는 길’(약 7시간)이다. 2코스 ‘내동산 도는 길’(4시간30분)은 원덕현마을에서 중평마을로 가는 11.75km다. 마지막 3코스 ‘섬진강 물길’(약 5시간40분)은 중평마을에서 반용마을을 지나 오암마을에 이르는 16.94km다. 1-1코스 일부를 빼면 한 구간의 끝이 다음 코스의 출발점이다.

코스 가운데 최고를 뽑으라면 1번 코스다. 다른 코스도 마을을 잇지만 이 길은 마을을 8개나 잇는다. 세운 지 140년이 넘는 영모정에 오르면 아래 미재천 계곡의 물소리와 매미 소리가 귀를 울린다. 미계 신의련의 효행을 기리고자 1869년(고종 6년)에 세웠다. 아담한 크기에 너새(돌너와)를 얹은 지붕이 눈에 띈다. 바로 옆에 신의련 효자정려각 등이 세워져 있다. 미룡정을 지나면 바로 산길이 나타난다. 한적한 산길을 한참 가다 보면 참깨밭, 고구마밭, 옥수수밭이 보인다.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신전마을이다. 농부들이 트랙터를 세워놓고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조금 더 걷자니, 한 노인이 옻나무에 거름을 주고 있다.


» 전북 진안 백운면 영모정을 지나 '신광재 가는 길' 들머리의 하미치마을에서 마을 노인들이 쉬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 전북 진안 백운면 영모정을 지나 '신광재 가는 길' 들머리의 하미치마을에서 마을 노인들이 쉬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이게 무슨 나무예요?” “참옻 아니여. 닭에 넣어서 해먹잖여.” 고추밭에 고추가 벌써 빨갛게 익어간다. 상백암마을을 지나 백암교 아래 계곡이 부른다. 흘린 땀을 씻기에 충분히 깊고 넓다. 한참을 쉰다. 닥실고개로 가는 흙길을 걷다 뱀 한 마리가 스르륵 지나 깜짝 놀랐지만 산딸기가 달래준다. 검은 막이 쳐진 인삼밭을 한참 지나니 은번(은안)마을이 보인다. 허물어진 빈집이 여럿이다. 감나무가 있는 돌담집에 강아지가 경운기 옆에서 컹컹 짖는다. 원반송마을에 이르니 아기가 요란하게 울어댄다. 돌을 갓 지났을까? 할아버지가 고추를 내놓은 손자를 유모차에 태우고 느티나무 천변숲으로 나온다.

지팡이를 든 할머니가 묻는 말이 난감하다. “뭣하는 양반이여? 우리 집에 테레비가 안 나와. 잘 나왔는데…. 못 고치는가?” 할머니 옆에 만육 최양 선생을 기리고자 130년 전에 세운 구남각이 있다. 그 옆에 100년이 넘은 학남정과 개안정이 서울 손님을 맞는다. 그 아래 계곡에서 놀러온 청년 7~8명이 수영을 한다. 나도 뛰어들고 싶다. 할머니들이 낯선 사내를 한참 쳐다본다. “어디서 온겨? 아따, 쪼까 앉지 그래. 앉아….”

백운천이 흐르는 석전·무등 마을을 지나 원덕현마을로 접어드는데 차가 씽씽 달리는 큰길이다. 1코스의 마지막 원덕현마을에 이르니, 마을회관 앞에 어르신 4명이 앉아 있다. 다시 묻는다. “뭣하는 양반이여?” 한 어르신이 일러준다. 풍혈냉천에도 가보라고. 찬 바람이 술술 나온다고. “밥을 넣어두면 쌀이 돼.”

고랭지 채소, 멧돼지 주의

1-1코스는 1코스보다 훨~씬 길고 험하다. 영모정을 지나 계곡을 따라 왼쪽으로 걷다 보면 하미치마을이 나온다. 얼마 뒤 노촌호가 나오는데, 섬진강 유역에서 가장 큰 저수지다. 당산바위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는 비사랑마을을 지나면 성수산(해발 1059.2m)이 깊어진다. 한참을 가도 마을은 없고 숲길이 이어진다. ‘멧돼지 출현주의’ 지역이라 긴장했는데, 대신 노루인지 고라니인지가 인기척에 놀라 달아났다. 산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이 멋지다.

» 전북 진안군 성수면 반용마을 섬진강 물길 위로 놓인 옛 반용교를 한 아낙이 걷고 있다(위쪽 사진). 전북 진안군 진안읍내에서 마이산을 향해 한 시민이 아침 산책을 하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 전북 진안군 성수면 반용마을 섬진강 물길 위로 놓인 옛 반용교를 한 아낙이 걷고 있다(위쪽 사진). 전북 진안군 진안읍내에서 마이산을 향해 한 시민이 아침 산책을 하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걷기에는 산이 깊은 1-1코스는 신광재가 보상해준다. 진안고원의 제맛이 느껴지는 고랭지 채소밭이 나온다. 해발 740m의 탁 트인 신광재에 배추, 무, 씨감자들이 빼곡하게 심어져 있다. 한 달 된 무는 좀 크고 심은 지 열흘 된 것은 갓 난 작은 입이 땅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땡볕 아래 아낙네 두 명이 잡초를 매고 있다. “고랭지 농사할 만한 곳은 강원도 대관령을 빼면 여기뿐이지요.” 40대 농부는 전북 전주에서 여름 한철 진안으로 나와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농부의 팔과 얼굴이 온통 짙은 구릿빛으로 탔다. 땡볕에다 태풍의 영향으로 씨감자 줄기가 많이 뒤집혔다. “여기도 이제 많이 따뜻해져서 농사가 잘 안 돼요. 농약값도 많이 들고. 중장비가 있어도 무 솎기 같은 것을 하려면 인부가 필요한데 사람도 없고.” 낯선 사내와 말을 나누는 아빠 옆으로 5살 딸이 달려온다. 맨발에다 옷에는 온통 흙이다. 튼실하다. “친구가 없으니까 저기 밭이랑 왔다갔다 하면서….” 신광재를 지나면 다시 줄곧 산속이다. 길은 차가 다닐 만큼 넓지만 다니는 것은 날짐승과 산짐승뿐이다. 그때쯤 멀리 마이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카메라를 꺼내 마이산을 뒤로하고 사진을 찍는다. 덕태산이 깊어지면 다시 ‘멧돼지 출현주의’ 표지판이 보인다. 산속을 언제 벗어나나 싶지만 그나마 계속 내리막이다. 신전마을이 반갑다.

2번 코스는 원덕현마을을 지나 구신치를 넘으면 원구신마을이 기다린다.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격퇴한 뒤 개성으로 돌아가던 중 신하를 구하는 혈의 형국이라 하여 구신리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모정 옆에는 바위가 갈라져 백마가 나왔다는 노적바위가 있다. 하염북마을 앞 742번 지방도는 옛날 전북 고창에서 장수까지 등짐으로 소금을 나르던 행상길이었다. 상염북마을을 지나면 한참이나 마을이 없는 숲속 산길이 이어지지만 저만치 내동산(해발 887.5m) 풍경이 한적함을 달래준다. 내려오는 숲길이 시원하다. 중평저수지가 보이면 중평굿으로 유명한 중평마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1코스만큼은 아니어도 상염북마을을 지나서는 걷기에 험하다.

여성 3~4명이 함께 가길

3번 코스는 섬진강 물길을 자주 만난다. 찻길도 자주 만난다. 점촌마을에서 길을 잃고 헤맬 즈음 “그쪽으로 가면 길이 없어. 저쪽으로 가야지, 저쪽으로.” 소에게 여물을 주던 아주머니가 길을 가르쳐준다. 반용마을 옛 다리에서 마을 청년이 낚시질을 한다. 섬진강 줄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포동마을이다. 300년 된 정자나무가 있는 양화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사흗날 당산제가 올려진다. 바로 옆이 풍혈냉천이다. 종점인 오암마을에 이르니 그동안 봤던 마을보다 훨씬 크다. “멧돼지·노루 땜에 뭣을 못혀. 다 뜯어먹어.” 한 아낙네의 시름이 깊다.

7월30일 4개 구간 개통식을 여는 진안고원 마실길을 걷는 사람은 아직 드물다. 제주도 올레처럼 그림 같은 풍치를 찾는다면 진안고원 마실길은 어쩌면 실망할지 모른다. 혼자 걷는다면 전 구간이 해발 300m를 넘지 않는 3구간을 빼면 즐기며 걷기에는 산이 깊거나 한적하다. 작고 듬성듬성한 이정표에 가끔 길을 헤맨다. 그래도 잃어가는 우리 농촌의 삶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 여성이라도 3~4명이 함께라면 추억에 남을 길이다. 길 따라 걷기만 하면 진안고원 마실길의 제맛을 모른다. 뜨문뜨문 마을이 나타나면 둘러보고, 말 한마디 건네고 또 한마디 답해야 마실길의 맛이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사진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target="_top">rhee@hani.co.kr





» 진안고원 마실길

» 진안고원 마실길



■ 교통편
서울에서 진안고원 마실길 가는 길
서울·대전 방면 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고속도로~장수·익산고속도로~진안IC~국도 30호~진안읍·마이산 도착
버스: 서울→진안 10:10, 15:10. 진안→서울 10:30, 14:35(진안버스터미널 063-433-2508)


■ 여행 정보
진안고원길 063-433-5191
진안군청 063-430-2331~2333



■ 여행 팁
걷는 도중에 물이나 음료수를 살 곳이 없으니, 미리 사거나 동네 작은 슈퍼가 나오면 사두는 게 좋다.
걷는 길에서는 여행 정보가 따로 제공되지 않아, 인터넷이나 진안군청 등에서 숙박 및 인근 관광 정보를 미리 챙겨야 한다.



공동기획

공동기획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