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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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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으로 들어가네-⑥ 퇴계 오솔길(경북 안동)

푸른 숲 옆에 끼고 낙동강 굽이 따라 펼쳐진 길, 조선 선비라면 생애 한 번 걸어보고 싶었던 길… 안동 퇴계 오솔길
등록 2011-08-18 03:09 수정 2020-05-02 19:26
퇴계 오솔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 한겨레21 윤운식

퇴계 오솔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 한겨레21 윤운식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烟巒簇簇水溶溶)/ 새벽 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曙色初分日欲紅)/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溪上待君君不至)/ 내 먼저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擧鞭先入畵圖中).”

퇴계 이황이 친구인 이문량에게 써서 건넨 시다. 봉긋 솟은 청량산 봉우리 사이로 걸어 들어가며 퇴계는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했다. ‘걷고 싶은 길’ 기획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어디로? 그림 속으로.

은빛 자갈, 붉은 바위, 푸른 산의 조화

그림은 경북 안동 도산면에 걸려 있었다. 안동시에 들어서고도 봉화 방향으로 30분 넘게 달리면 안동 도산면 단천리에 다다른다. 시처럼,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강 뒤로는 누군가 초록색 물감을 붓에 묻혀 뚝뚝 찍어놓은 것 같은 산이 봉우리를 이뤄 하늘을 이고 있다. 강과 산 사이로는 가르마처럼 반듯하고, 때로 구불구불한 길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개울에 놓인 단천교 옆의 표지판이 여기서부터 퇴계 오솔길이라 알려준다.

퇴계는 13살 때 학문을 배우려고 집에서부터 숙부 이우가 청량산 중턱에 지은 오산당(현 청량정사)까지 50리 낙동강변을 오르내렸다. 퇴계는 유난히 청량산을 아꼈는데, 산과 강 사이를 따라 난 그 길을 걸으며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흰 기러기 너뿐이니…”로 시작하는 ‘청량산가’를 비롯해 청량산의 운치를 찬탄한 여러 편의 시를 남기고, 스스로를 ‘청량산인’이라 칭하기도 했단다. 퇴계가 밟아 다져놓은 이 길은 조선의 선비들에게 마치 순례길처럼, 생애 한 번 걸어보길 바라는 곳이기도 했다. 조선 유학자들에게 가장 ‘핫’했던 길인 거다.

퇴계 오솔길은 단천교에서 청량산 전망대를 지나 농암종택까지 3km 구간을 주로 일컫는다. 혹자는 퇴계가 출발했던 퇴계종택에서부터 도산서원을 지나 단천교~농암종택~고산정까지 18km를 말하기도 하는데, 퇴계종택에서부터 단천교까지는 차가 함께 다니는 아스팔트길이라 걷기가 조금 불안하다. 물론 자동차에 몸을 싣고 초록이 만들어내는 풍광을 구경하다 보면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긴 하겠지만.

퇴계 오솔길에서 만나는 그림같은 풍경. 필자는 그림속 한 풍경이 되었다. 한겨레21 윤운식

퇴계 오솔길에서 만나는 그림같은 풍경. 필자는 그림속 한 풍경이 되었다. 한겨레21 윤운식

단천교에 내려서는 차도, 인적도 드물다. 자연에 폭 싸인 공기가 이제부터 마음 놓고 걸으라며 등을 떠민다. 왼쪽과 정면에는 산, 오른쪽에는 강이다. 강 저편에는 이름 모를 강태공이 홀로 낚싯대를 드리운 채 물고기를 기다리고 있다. 강태공이 서 있는 맞은편 은빛 자갈밭과 달리, 걷는 길 강가의 돌이며 자갈은 온통 불그레한 갈색이다. 돌아와서 찾아보니 마을 뒤에 뻗어 있는 산맥의 흙이 붉은 점토질이라서 그렇단다. 그러고 보니 단천리의 ‘단’(丹)자도 붉다는 뜻이다.

길은 대체로 평탄하다. 짧은 구간이지만 중간중간에 쉬어 가라고 의자도 마련해뒀다. 잠시 쉴까 의자에 몸을 기대니 반기는 사람은 없고 시큼한 땀냄새를 맡은 날파리 떼만 들러붙는다. 극성을 못 이기고 얼른 다시 일어나 걷는다. 조금 더 걸으니 농가 두어 채가 나온다. 인적 없이 창문 안이 새까만 것이 빈집 같은데, 해가 쨍쨍한 낮이라 그런지 스산하진 않다. 집 옆의 작은 밭에 총총히 고추가 자라는 모습을 보니 오가는 사람이 있나 싶기도 하다. 농가를 지나쳐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퇴계 오솔길 전망대가 나온다. 낙동강 물길과 뽀얀 자갈밭, 기세등등한 청량산, 깎아지른 절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흙과 나무와 물과 하늘이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조화로울 수 있다니. 퍼즐을 끼워맞추듯 인공적으로 계산된 자리에 놓인 나무며 물이며 바위들을 보아온 도시인의 눈에는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사유지에 막혀 길을 되돌아오다

전망대에서부터 콘크리트길이 끝나고 흙길이 시작된다. 반갑다.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길이 막혀 있다. 전망대 표지판에도 누가 매직펜으로 ‘×’ 표시를 잔뜩 그려놨다. 안동으로 떠나기 전 찾아본 여행책에서 일부 구간이 사유지라 때때로 길이 막히기도 한다고 했는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때때로가 아니라 한참을 막아놓은 듯하다. 철책을 치거나 들어서지 못하게 막아놓은 건 아니어서 흙길을 조금 걸어 들어가봤다. 좁은 폭이 딱 ‘1인용’인 것이, 그야말로 오솔길이다. 옆으로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잔뜩. 함께 간 사진팀 이종찬 선배는 이것은 상수리나무, 이것은 산딸기, 이것은 칡이라며 나로서는 같이 보이기만 하는 풀이며 나무를 구분해준다.

농암종택은 낙동강을 앞에 두고 뒤로는 소나무 숲에 폭 안겨 있다. 종택 내 건물인 '강각'과 산이 만드는 풍경이 그림 같다. 한겨레21 윤운식

농암종택은 낙동강을 앞에 두고 뒤로는 소나무 숲에 폭 안겨 있다. 종택 내 건물인 '강각'과 산이 만드는 풍경이 그림 같다. 한겨레21 윤운식

몇 발짝 옮기니 커다란 바위가 하나 나오는데, 땅주인은 여기에다 래커로 ‘통행금지’라 써놓았다. 땅주인에게 마음속으로 ‘죄송하지만, 그래도 조금만요’라고 말하며 걸어 들어가니 기우뚱한 오두막이 한 채 나온다. 할머니와 아주머니 한 분이 마루에 앉아 있다. 사람 사는 집이 있는 걸 보니 영영 못 다니는 길은 아닌가 보다. 가까이 들어서자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널린 이불 빨래를 털기 시작한다. “다니면 안 되는 길인가요?” 물으니 반쯤 무뚝뚝하고 반쯤 수줍은 표정으로 묵묵부답이다. 옆에 있는 아주머니가 “사유지라 그래요. 예전에는 그냥 사람들 다녔던 길인데…. 그래도 주인 눈 피해서 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있긴 해. 한데 지금은 풀이 너무 자라 길을 찾기 힘들 거예요.” 산중에 혼자 지내는 어머니가 걱정되어 경북 경주에서 왔다는 아주머니는 우리보다 더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오솔길의 흔적이라도 어루만져볼까, 아주머니가 알려준 방향으로 조금 더 내려가보니 들은 대로 다니는 사람이 없어 풀이 무성하게 자란데다 올여름 내린 많은 비 때문인지 강물이 불어 길의 행방이 묘연했다. 이에 안동시청이 산자락으로 돌아가는 우회로를 개설해놓긴 했는데, 그 길을 따르자면 강변 오솔길의 풍광을 포기해야 한다. 동네 노인들이 기억을 더듬어 새로 낸 길도 있다. ‘가송리 예던길’이다. 가파른 바위절벽을 타고 들어가 강을 낀 숲 속을 걷는 길인데, 오르내리는 경사가 있어 퇴계 오솔길보다는 걷기가 힘들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끊어서 걷되 감상은 이어 하기로 했다. 이날 숙소로 정한 농암종택으로 가 우리가 걸어온 방향의 반대편에서 길을 다시 걸으며 사유지를 제외한 나름의 퇴계 오솔길 걷기를 완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여행의 묘미란 계획을 세우고 출발해도 짐작 못한 변수가 생긴다는 데 있지 않을까. 이날 우리는 밤이 새까매서야 농암종택에 도착했다. 그사이 그럼 무얼 했느냐면…, 농암종택으로 가는 길에 화장실에 들른다고 모두 퇴계종택에 잠시 내렸다. 상냥한 표정의 개 두 마리와 느긋하게 햇볕을 쬐고 있는 고양이 가족이 우리를 반긴다. 종택에 들어서니 방방마다 수업 중인지 툇마루에 신발은 그득한데 인기척은 없었다. 차에서 내린 참에 퇴계종택과 근방의 도산서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퇴계종택 뒤로 난 야트막한 산길은 콘크리트로 다듬어져 있다가 자잘한 자갈길로 이어진다. 뽀드득뽀드득, 자갈길에서 눈 밟는 소리가 난다. 이 고개를 지나면 도산서원이 나온다. 퇴계종택에서 도산서원까지는 2km 정도 거리다. 매표소에서 도산서원까지도 좋은 산책로인데, 작은 키의 소나무를 울타리 삼아 길 오른쪽으로는 안동호가 펼쳐져 있다.

끊길 듯 말 듯 이어지는 오솔길

한밤에 도착한 농암종택은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란 뜻의 가송리에 있었다. 농암 이현보는 퇴계의 숙부와 함께 과거에 급제한 사이로 그가 쓴 ‘어부가’는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고,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진 시로 잘 알려져 있다. 퇴계는 선배 농암과 교류하기도 했지만 그의 아들과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연을 맺었다. 기사 들머리에 퇴계의 시를 받은 이문량이 농암의 둘째아들이다.

농암과 퇴계의 연은 현재까지 닿아 있다. 퇴계 오솔길은 ‘녀던길’ 혹은 ‘예던길’(‘예다’는 ‘가다’의 옛말)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퇴계의 ‘도산12곡’ 중 9곡에 나오는 시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도 예던길 앞에 있네/ 예던길 앞에 있으니 아니 녀고 어쩔고’에서 따온 것이다. 농암 이현보의 후손으로 현재 농암종택을 지키고 있는 이성원 선생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다음날. 농암종택에서 다시 퇴계 오솔길을 걸어본다. 농암종택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단천교에서 바라봤던 강보다 훨씬 그 폭이 넓다. 를 쓴 이중환은 “낙동강은 청량산을 지나면서 비로소 강이 되었다”고 말했다는데, 그대로다. 길을 나서니 비가 후드득 떨어진다. 굵어지는 빗방울에 흙 냄새가 짙어진다. 아득한 절벽이 보이는데, 학소대란다. 수직절벽 학소대는 천연기념물인 먹황새가 서식하던 곳이다. 저 멀리 청량산 선학봉과 자란봉 사이를 잇는 하늘다리도 부연 공기 사이에서 또렷이 보인다. 처음에 두 갈래 길이던 길은 나중에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힘든 좁은 폭으로 바뀐다. 길이 끝났나 싶으면 표지판이 나타나고, 잘못 들었나 싶으면 벤치가 나타나 지표 역할을 해준다. 오솔길은 둥그렇게 굽이친 강을 따라 계속 이어진다. 인적 드문 길에 툭툭 풀을 헤치고 걷는데, 잠이 덜 깬 개구리가 후다닥 숨는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이 풀숲을 지켜줘서 고마워, 그리고 이 좋은 곳에 살 곳을 마련했다니 네가 참 부럽다.

산림조합중앙회

산림조합중앙회

안동=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사진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참고 도서
(이성원·푸른역사·2008), (권원태 외·터치아트·2008), (한국여행작가협회·상상출판·2011)




퇴계 오솔길 안내도

퇴계 오솔길 안내도

■ 가는 길
자가용
서울~영동고속도로~만종JC~중앙고속도로(남원주IC)~영주~서안동IC, 소요 시간 3시간30분
버스
동서울터미널에서 아침 6시~밤 11시1분까지, 20~30분 단위로 안동시외버스터미널까지 버스가 간다. 2시간50분 소요, 요금 1만5700원. 안동에 내려서는 67번 버스 중 오후 2시50분, 5시50분 차를 타면 가송리 마을회관 앞에 선다.
철도
서울(청량리)~안동, 첫차 아침 6시, 막차 밤 9시, 일 8회 운행, 무궁화호, 3시간40분 소요, 요금 1만5800원.


■ 여행 정보
안동은 지역이 넓고 두루 볼거리가 있는 곳이다. 초행이라면 안동관광정보센터(054-856-3013, tourandong.com)를 통해 미리 안동여행 책자를 신청하고 안동관광택시, 시티투어버스 등을 예약해도 좋다. 문화관광가이드를 미리 신청할 수도 있는데, 퇴계 오솔길만 따로 안내하는 코스는 없지만 도산서원, 하회마을 등 권역별로 나눠 안동 역사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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