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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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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으로 아름다움을 즐기다-④ 왕피천길(경북 울진)

자연환경과 풍광 빼어난 생태·경관보전지역 경북 울진 왕피천…
사람의 손길 닿지 않아 천만다행인 ‘시원’의 아름다움
등록 2011-08-03 08:07 수정 2020-05-02 19:26
경북 울진군 왕피천 학소대 근처에서 물을 건너며 계곡 트레킹을 하고 있는 탐방객들.

경북 울진군 왕피천 학소대 근처에서 물을 건너며 계곡 트레킹을 하고 있는 탐방객들.

윤대녕 때문이다. 맥주, 빌리 홀리데이, 호피인디언 같은 단어는 천구백구십몇년 스무 살 언저리의 감성을 전율시켰다. “세계는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어져 있지. 자넨 지금 저쪽으로 와버린 거야”라든가, “정말 나는 지금까지 내가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아주 낯선 곳에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차츰 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삶의 사막에서, 존재의 외곽에서”라든가, “아침이 오기까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살아온 서른 해를 가만가만 벗어 던지며, 내가 원래 존재했던 장소로, 지느러미를 끌고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같은 문장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대도 좋았다.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라는 평을 받았던 윤대녕의 을 읽던 날부터, 소설에 등장하는 경북 울진 왕피천은 ‘로망’이었다.

물, 바윗길, 금강송의 반복

왕피천은 경북 영양군 일월산 동쪽 기슭 수비리에서 발원해 울진군 왕피리 등을 거쳐 동해까지 66km를 흐른다. 대령산, 통고산, 천축산에 둘러싸인 계곡이다. 소설처럼 은어와 연어가 산란을 하려고 찾아들며, 쏘가리·산천어·꺽지 같은 물고기, 산양·고라니·담비·수달 같은 멸종위기 동물도 왕피천 주변에 산다. 그래서 이 일대는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오랫동안 품었던 로망에, 자연환경과 경관이 뛰어나다는 정보까지 더해지니 왕피천을 향해 가는 내내 심장은 두근거렸다.

7월26일 오전 10시 드디어 그곳에 발을 디뎠다. 왕피천을 즐기는 방법은 두 가지다. S자로 흐르기 때문에 때때로 5~8m 폭의 물을 건너며 계곡 트레킹을 하든, 계곡 옆으로 난 생태탐방로를 걷든. 생태탐방로는 지난해 개방했는데, 울진군 근남면 구산3리 상천동부터 서면 속사리까지 5km 구간이다. 그 사이엔 도로가 없다. 나는 계곡 트레킹을 선택했다.

출발 전 울진군청에 문의하니, 구산3리 굴구지 산촌마을(구고동)의 옛 구고분교(지금은 조청 공장)에 주차를 하고 트레킹을 시작하란다. 가서 보니 이곳은 사유지라 마음대로 차를 대서는 안 된다. 다행히 주인장의 배려로 주차는 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다. 자가용을 이용한다면, 윗마을인 상천동까지 올라가 대구지방환경청 왕피천 환경출장소 상천초소 앞에 차를 두는 게 좋겠다.

옛 구고분교 옆길로 내려오니 물 흐르는 소리가 귀를 때린다. 귀는 즐겁지만 2~3일 전 비가 온 탓에 물빛이 그리 곱지는 않다. 표지판은 보이지 않는다. 아랫마을 쪽에서 시작했으니 위쪽으로 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또한 처음부터 건너편으로 물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상황이다. 이 구간은 허벅지 깊이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물살이 제법 세다. 바닥의 돌 몇 개는 미끄럽기도 하다. 트레킹화를 신었지만 잠깐씩 몸의 균형을 놓친다. 지리산·설악산·한라산 같은 큰 산도 탔고, 제주 올레·지리산 둘레길·청산도 슬로길 같은 트레킹 코스도 제법 다녔다고 왕피천을 만만하게 여긴 건 오만이었다.

왕피천 계곡 트레킹은 물, 바윗길, 모랫길과 대령산 자락에 쭉쭉 뻗은 금강송의 반복이다. 금강송에 눈이 맑아지지만, 바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땀이 나면 걷고 있는 이 길에 그늘을 만들어주기엔 먼 거리가 아쉽다. 물이 깊지 않은 곳은 가장자리를 따라 왕피천을 거슬러 오른다. 물 밖에서 걷는 것보다 힘은 더 들지만, 시원한 쾌감은 인공 냉매가 만들어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허리 깊이의 물을 건널 땐 물에 휩쓸리지 않도록 일행과 등산용 지팡이 양쪽을 나눠잡고 서로의 몸을 지탱했다. 고마움이 솟구친다. 로프를 준비해가면 좀더 안전하게 건널 수 있을 것 같다.

왕피천 속사마을에서 상천마을 쪽으로 내려온다면, 구명조끼 등을 준비해 물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왕피천 속사마을에서 상천마을 쪽으로 내려온다면, 구명조끼 등을 준비해 물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취사, 야영, 낚시할 수 없어

거슬러 오르며, 알을 낳고 죽으려고 마지막 힘을 다해 왕피천을 거꾸로 오르는 은어를 떠올렸다. ‘존재의 시원’ 같은 건 예술가의 감수성으로나 느낄 수 있는 법. ‘일반인’인 나는 그저 수박 향을 풍긴다는 은어를 한번 보고 싶었다. 소원은 이루지 못했다. 그 대신 손가락 한 마디 길이만 한 물고기떼를 두어 번 만났다. 유치원·초등학교 때 방학마다 가 있던 외가 마을이 생각났다. 경남 김해의 작은 그 마을엔 도랑이 흐르는데, 추울 때가 아니면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빨래도 하고 멱도 감았다. 나도 여름방학 땐 외할머니를 따라가 물장난을 치고, 1~2cm 밖에 안 되는 물고기를 두 손 안에 가뒀다 풀어주며 놀곤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부터는 그럴 수 없었다. 마을에 화학공장이 들어서자 도랑이 하수도처럼 변한 탓이다. 왕피천 주변은 대형 버스가 진입할 수 없고, 오지라고 불릴 만큼 교통이 불편해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 그 덕분에 깨끗하고 뛰어난 생태 환경을 자랑할 수 있다. 불편함이 아름다움을 즐기는 대가인 셈이다. 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목소리를 키울까 괜한 걱정이 든다.

“고라니다!” 엉뚱한 생각을 하던 내게 일행 가운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농수로 위쪽으로 고라니 한 마리가 신나게 뛰고 있다. 난생처음 본 고라니가 신기했다. “우와!” 자연히 입이 벌어진다. 고라니는 마치 몸값 비싼 연예인처럼 잠시 제 모습을 보여준 뒤 금세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 아쉬움이 남아야 지켜주고 싶고, 또 보고 싶지 싶다.

상천초소를 채 못 가 사람 소리가 들린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여행객 20여 명이었다. 일행 말고는 이날 왕피천에서 처음 만난 이들이었다. 속사마을에서 아침 6시에 출발했단다. 구명조끼를 챙겨온 이들은 물속에 온몸을 담근 채 둥둥 떠내려오고 있었다. 래프팅 못지않아 보인다. 배 아프게 부럽다. 구교동이나 상천동에선 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말을 안 해준 울진군청이 잠깐 야속했다. 하지만 “어느 쪽에서 출발하든 똑같다”는 말은 왕복 코스라면 결과적으로 맞다. 조금 편하게 물을 즐기고 싶다면 속사마을 쪽으로 갈 땐 생태탐방로로, 상천동 쪽으로 갈 땐 물을 따라가면 된다.

상천초소를 지나니, 그곳에서 일하는 자연해설 안내원 도민호씨가 벌써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연락해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터였다. 대구지방환경청 왕피천 환경출장소에 문의하면, 자연해설 안내원의 가이드를 받을 수 있다. 별도로 신청하지 않아도, 인원이 많거나 위험 구간을 지날 때는 안내원이 도와주기도 한다. 도씨는 “하루 평균 두 차례 상천~속사 구간을 왕복한다”고 했다.

용소까지 내처 걸었다. 용소는 수심이 5m가량으로 구간 가운데 가장 깊고, 양쪽 암벽 사이의 폭은 가장 좁다. 구명조끼와 튜브를 준비해 용소를 건너는 이가 간혹 있지만, 생태탐방로로 우회하는 게 안전하다. 용소를 둘러싼 암벽은 절벽 수준이기 때문에 바위 탈 생각도 접는 게 좋다. 생태탐방로로 들어서기 전 준비해간 김밥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왕피천에선 취사, 야영, 낚시가 금지돼 있다.

왕피천 생태탐방로

왕피천 생태탐방로

아무런 흔적도 없이 돌아와야지

생태탐방로로 올라서 용소를 바라보니 물빛이 검다. 깊어서다. 왕피천이라는 이름의 서러움을 품고 있는 듯하다. 왕이 피신한 곳이라는 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데, 누구인지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다. 그는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려 하자 반대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머니와 함께 이곳으로 피신을 왔다가 어머니가 죽자 혼자 금강산으로 갔다고 한다. 또 하나는 고려 공민왕이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을 받자 이곳으로 피신했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건 이성계다. 마의태자든 공민왕이든, 다른 나라의 내정간섭과 침입으로 국운이 다했음을 느끼며 첩첩산골로 숨어드는 지경까지 이르렀을 땐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을까.

왕피천을 왼쪽에 끼고 1m 남짓 폭의 생태탐방로를 걸었다. 우리보다 더 늦게 출발한 탐방객 예닐곱 명이 왕피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게 보인다. 이들을 발견한 도민호씨가 “생태탐방로로 올라오도록 안내해야겠다”며 바람처럼 그쪽으로 내려갔다. 우리 일행은 가던 길로 계속 걸었다. 주변은 주로 금강송과 굴참나무다. 두어 차례 가파른 고개를 올랐다 내려가니 학소대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속사마을까지는 아직 3km를 더 가야 한다. 벌써 오후 2시가 다 됐는데, 속사마을까지 갔다가 구고동까지 되돌아오기는 빡빡하다. 아쉽지만 여기서 발걸음을 되돌리기로 했다.

상천초소까지 생태탐방로를 이용했다. 1시간30분 정도 걸렸다. 초소에 올라 왕피천을 내려다보니, 저 길을 걸었나 싶다. 초소의 감시원이 “고생하셨다”는 인사와 함께 커피 한 잔을 건넨다. 마음이 푸근해진다. 한숨을 돌리니 도민호씨가 뒤따라 도착한다. 구고분교까지 차를 태워주겠다고 배려해줘 일어서니 앉았던 자리가 땀인지 물인지에 조금 젖어 있다. 금방 마를 테다. 그렇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말고 돌아와야 왕피천이 계속 왕피천일 수 있을 테다.



■ 교통편
서울에서 왕피천 생태탐방로 가는 길
-상천초소: 경부·영동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국도 36번(봉화~울진 구간 굴곡 심함), 또는 영동고속도로~동해고속도로~국도 7번 이용해 성류굴교차로(북)에서 오른쪽 도로로 빠져나와 군도 9번
-속사초소: 국도 36번에서 통고산 자연휴양림 지나 삼근리에서 우회전~박달재~왕피리~속사마을
-대중교통: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아침 7시9분부터 저녁 8시5분까지 28차례 운행. 삼근리까지는 아침 7시30분부터 1시간20분 간격으로 6차례 운행.

■ 여행정보
-대구지방환경청 왕피천환경출장소 054-783-9377
-울진군청 문화관광과 054-789-6902
-울진군청 서면사무소 054-789-4321
-굴구지 산촌 생태마을 054-782-4294

■ 여행팁
-마을에는 마실 물을 살 곳이 없으니, 미리 충분히 사두는 게 좋다.
-계곡 트레킹을 한다면 허리 위까지 깊은 곳도 있으니 등산복 등 잘 마르는 옷을 입고, 배낭·카메라·손전화는 레인커버나 비닐 등으로 잘 감싼다. 등산화나 물이 잘 빠지는 트레킹화를 신는다.
-사전 여행정보 문의는 필수다. 불영사와 불영사계곡, 죽변항 등 주변 볼거리도 쏠쏠하다.

울진=글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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