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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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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⑧ 분주령 야생화길(강원 태백)

사람의 손길 덜 타서 더 매력적인 강원도 태백 분주령 야생화길… 사연 많은 들꽃이 내뿜는 생명의 활기로 충만한 귀한 길
등록 2011-09-01 07:46 수정 2020-05-02 19:26
길의 끝인 대덕산 정상은 야생화의 보고다. 야생화 마니아들은 이곳을 '산상화원'이라 부른다. 한겨레21 박승화

길의 끝인 대덕산 정상은 야생화의 보고다. 야생화 마니아들은 이곳을 '산상화원'이라 부른다. 한겨레21 박승화

강원도 태백시는 젊은 도시다. 젊다 못해 어린 도시다. 태백산맥의 거대한 산줄기에 몰래 숨어 있던 화전민 마을은 1930년대 들어서야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태백시 누리집을 보면, 일본의 전력업체가 당시 500만원의 자본금으로 1933년 삼척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조선총독부의 광업권을 인수받아 석탄 개발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전국의 힘깨나 쓴다는 일꾼들이 태백의 산자락으로 모여들었다. 태백의 전성기는 1970~80년대였다. 태백 혼자서 전국 석탄 생산량의 30%를 맡았다. 석탄을 머금은 탄광은 화수분이었다. 지나가는 개도 1만원 한 장씩 물고 다닌다는 시절이었다. 도시의 전성기는 짧았다. 1989년부터 시작된 석탄산업합리화사업으로 50개가 넘던 광산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사람들도 떠났다. 1987년 12만 명을 넘던 도시 인구는 2008년 5만 명으로 줄었다. 어린 도시는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아야 했다.

꽃들처럼 야생한 고려 유신들

태백시의 행정조직도를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문화관광과’는 태백에서는 ‘관광문화과’다. 관광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시가 최근 들어 눈독을 들인 분야가 두 가지다. 하나가 스포츠 행사 유치다. 해발 650m 분지에 위치한 태백에서 여름은 짧다. 한여름에도 해가 지면 서늘해서 모기가 없다. 운동하기에 더없이 좋다. 지난 8월8일 태백시를 찾았을 때도 도시에는 전국학생태권도대회가 열렸다. 도시의 골목과 식당에는 어린 ‘무도인’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농구 등 프로스포츠 구단들에도 태백은 인기 있는 전지훈련지다.

또 하나의 관광자원이 ‘산길’이다. 금융위기에도 아웃도어 업체만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등산과 트레킹은 인기다.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이들의 행렬이 태백에도 늘었다. 사람의 손을 덜 탄 만큼 태백의 산길은 매력적이다. 여러 길 가운데서도 태백시가 특히 관심을 두는 곳이 있다. 다름 아닌 분주령 야생화길이다. 이미 야생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입소문을 많이 탄 곳이다. 지난 8월9일 이 길을 걸었다.

아침 8시30분, 태백시 터미널 근처에서 김상구 문화해설사를 만났다. 시청 관광문화과가 소개해준 자원봉사자다. 입심이 구수했다. 그는 “문화해설이라는 게 70%가 구라”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와 함께 택시를 탔다. 20분 남짓 달리니 ‘백두대간 두문동재’라는 대형 표지석이 길가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표지석 바닥에는 ‘해발 1268m’라는 표지가 있었다. 공기가 서늘했다. 반팔 티셔츠만 입고 온 것을 잠시 후회했다. 두문동이라. 옆에 서 있던 김상구 해설사께서 ‘구라’를 푸셨다. 두문이란 ‘두문불출’에서 나온 말이다. 문을 걸어잠그고 세상을 등진 이들은 누구였을까. 500년 전 임금을 쫓아낸 이성계와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고려의 유신들이었다. 이들이 찾은 곳이 두문동이었다. 유신들은 당시 지리적 상식으로는 조선의 통치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오지로 떠났을 것이다. 깊숙한 산골짝에서 유신들은 이곳의 꽃들처럼 ‘야생’했다.

나중에 기록을 확인해보니, 고려 유신들이 자리잡은 곳은 지금은 북한 땅인 경기도 개풍군 두문동이었다. 구전은 역사와 상관없이 떠돌았다. 어쩌면, 나라 잃은 신하들의 고집은 경기도보다 태백의 숲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길에서 마주친 귀한 식물들. 넓은잎노랑투구꽃, 나도씨눈난(왼쪽부터). 한겨레21 박승화

길에서 마주친 귀한 식물들. 넓은잎노랑투구꽃, 나도씨눈난(왼쪽부터). 한겨레21 박승화

이름 모를 들꽃도 달리 보여

산길의 초입부터 가로대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일단 멈춤’이다. 환경부가 생태관광보존지역으로 지정한 곳이다. 길 입구에 수다스럽게 놓인 표지판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그중의 하나가 ‘동부지방산림청장’이 내건 ‘입산통제안내’ 표지판이었다. 귀한 길이긴 한가 보다. 1년에 두 차례 야생화길은 출입통제다. 2월15일~5월15일 석 달 동안, 11월1일~12월15일 45일 동안 산길은 폐쇄된다. 온갖 식생을 머금은 숲길이 인간의 우악스러운 발길을 쉴 수 있는 시간이다. 다른 표지판에도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가운데는 카메라 삼각대를 쓰지 말라는 당부도 있었다. “예쁜 꽃 사진 찍는다고 하다가, 정작 앞에 있는 더 귀한 야생화를 푹푹 찍어 누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죠.” 김 해설사의 말이다. 전문가와 동행한 것이 다행이었다. 등산객들은 보통 길 초입에서 환경 담당 공무원들에게 일장 훈시를 들어야 한다. 지자체는 길을 꽤 살뜰하게 챙겼다.

길에서 마주친 귀한 식물들. 넓은잎노랑투구꽃, 동자꽃. 한겨레21 박승화

길에서 마주친 귀한 식물들. 넓은잎노랑투구꽃, 동자꽃. 한겨레21 박승화

길에 들어섰다. 날씨는 가뜩이나 흐렸다. 팔뚝과 목덜미로 숲의 공기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2m 남짓한 길의 양쪽으로 늘어선 수만 가지 이름 모를 나무와 풀이 일제히 내뿜는 기운에 잠시 정신이 아찔했다. 지금은 여름꽃이 한창 끝물인 참이었다. 성질 급한 가을꽃도 띄엄띄엄 자리를 잡았다. 참취며 곰취, 어수리, 흰물봉선, 큰까치수염, 떡취, 참나물꽃 사이로 사향호랑나비가 우아하게 날개를 폈다. 동자꽃도 길가에서 얌전하게 고갯짓을 한다. 주황색 꽃잎이 가지런한 이 꽃은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옛적, 설악산의 한 암자에는 한 노승과 동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암자에는 쌀이 떨어졌다. 스님이 시주를 하러 마을에 내려간 사이 산에는 눈이 높게 쌓였다. 수심 어린 며칠 밤이 지나고 찾아간 암자에는 어린 스님의 주검만 남았다. 스님은 동자의 주검을 암자 뒤쪽에 묻었다. 이듬해 무덤가에는 주홍색 꽃이 피어올랐다. 사연을 듣고 나면 이름 모를 들꽃도 달리 보인다.

남아메리카 밀림의 가부장이 벗어놓고 간 모자 같은 관중도 볼거리다. 거의 정확히 성인 머리통만 한 둘레에서 직경 1~2m씩 사방으로 뻗어나간 면마과의 식물은 독특한 구경거리였다. “부잣집들에서 좋아하는 (관상용) 식물”이라고 김 해설사가 덧붙였다. 산일엽초도 볼거리다. 신갈나무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식물이다. 김 해설사가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길가의 풀과 나무는 하나씩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 듯했다. 그렇게 낯선 등산객과 이름 모를 숲은 조금씩 친해졌다.

꽃이 예쁘다고 무턱대고 만졌다가는 큰코다친다. 쐐기풀 얘기다. 잎이 톱니바퀴 같은 쐐기풀에 잘못 걸리면 피부는 한참 괴롭다. 김 해설사님은 “적어도 10분 동안은 설설 맨다”고 했다. 나중에 김 해설사님의 블로그를 보니 얼마나 아픈지 어림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있었다. 전문가도 쐐기풀을 다루다가 큰 코를 다치기는 하는가 보다. “순간적으로 너무 강력한 통증이 느껴진다. (쐐기풀에 쏘인) 한 손가락을 아무리 빨아도 통증이 대단하다. 마치 바늘로 계속 쑤시는 듯 5시간이 지나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다… 아흐으~~~~~! 아고야~! 아파라.~~~ㅠㅠ;” 조심할 일이다.

개망초, 억울한 이름의 야생화

두문동재에서 금대봉을 가는 길 옆에는 옛 헬기장 터가 있다. 1968년 북한군 31명이 산길을 따라 청와대로 돌진한 ‘1·21 사건’ 이후, 정권은 두메산골에 자리잡은 화전민들을 산 아래로 몰아내고 곳곳에 헬기장을 조성했다. 그 뒤 오래 방치된 헬기장에서는 큰 삼림이 자랄 수 없어 유독 야생화가 많았다. 특히 이곳 헬기장에는 아예 야생화들의 ‘올림픽’이 열렸다. 큰까치수염, 참나물꽃, 박지나무, 쇠며느리밥풀꽃, 말나리, 독활 등이 어지럽게 피었다. 김 해설사의 말은 빨라지고, 이를 받아적는 펜은 바빠진다. 이번 올림픽의 주인공은 ‘나도씨눈난초’였다. 키가 20cm 남짓한 식물은 억센 야생화들 속에서 가냘픈 줄기를 내놓고 있었다. 그리 별나 보이지 않은 야생초지만, 김 해설사는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는 귀한 난초”라고 귀띔했다.

야생화 취재에 바쁜 필자. 한겨레21 박승화

야생화 취재에 바쁜 필자. 한겨레21 박승화

헬기장 옆 길가에는 개망초도 자리를 잡았다. 김 해설사가 소개하는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대한제국이 망할 때 하필 여기저기서 많이 피어서 ‘망초’라 일컫던 들꽃은 줄기를 누르면 폭신했다. 그래서 줄기를 층층이 쌓아놓으면 푹신했다. 일제는 도자기를 가져갈 때 상자 속에 망초 줄기를 잔뜩 넣었다. 졸지에 문화재 약탈의 공범이 된 셈이었다. 망초라는 이름 앞에 하필 ‘개’가 붙은 사연이었다. 궂은 역사 속에서 애꿎은 들꽃만 억울한 이름을 얻게 됐다.

금대봉을 지나쳐서 고목나무샘을 지나자 비가 쏟아졌다. 다시 돌아오기로 한 택시에 우산을 남겨두고 온 것이 후회막심했다. 산속에 비가 오면 속수무책이다. 도시에서 익숙한 처마 따위는 없다. 잎이 많은 나무 밑에서도 비를 단지 덜 맞을 뿐이다. 노트북을 담은 기자의 배낭도, 사진기자인 박승화 선배의 카메라를 덮은 수건도 흠뻑 젖었다. 등산객의 사정 따위야 아랑곳없이, 비가 오는 숲길에는 생명이 내뿜는 활기가 퍼져나간다. 빗물이 건드리는 잎사귀며 꽃마다 일제히 깨어나서 몸을 흔든다. 산꿩나무나 일월비비추 같은 이름만큼이나 예쁜 꽃들도 빗속에서 반짝인다. 옛날 굴피집 지붕의 재료로 쓰이던 굴참나무도 빗물을 나눠 맞으며 등산객을 굽어본다.

비는 야트막한 분주령에 접어들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좁은 산길에는 빗물이 흘러 물길이 만들어졌다. 분주령을 지나 대덕산 비탈을 오르니 비는 잦아들었다. 비탈을 오른 끝에는 대덕산 정상(1307m)이 있다. 바람이 억센 정상은 온갖 야생초로 가득 차 장관을 이뤘다. 층층꽃, 일월비비추, 솔나리, 산비장이, 떡취, 마타리, 돌마타리, 노박덩굴…. 고도가 높아지니 처음 보는 야생화들도 눈에 들어온다. 야생초 애호가들이 이곳을 ‘산상화원’ ‘천상화원’이라 부를 만했다. 김상구 해설사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귀하다는 넓은잎노랑투구꽃이 산 정상 곳곳에서 우아하게 자세를 잡았다. “이 귀한 꽃이….” 김 해설사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바람이 거셌다. 간간이 뿌리는 빗물은 바람을 타고 볼과 목을 때렸다. 따끔거릴 정도였다. 바람은 꽃도 가만두지 않았다. 귀한 꽃을 화면에 담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카메라를 든 채 꽃 앞에서 한참 동안 부동자세를 취하던 김 해설사가 만족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산길은 금방이었다. 한 30분 정도 비탈을 내려오자 검룡소에 이르렀다. 한강의 발원지다.

태백의 주인은 야생화일지도

태백은 척박한 땅이다. 역사시대 이후로도 사람이 정착한 시절보다 풀과 나무만 무성한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그러니 이곳은 사람에게만 척박한 땅이었다. 이곳의 주인은 오랜 시간 금대봉과 분주령, 대덕산을 지킨 야생화들일지도 모른다.
글 김기태 기자 kkt@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산림조합중앙회

산림조합중앙회








분주령 야생화길

분주령 야생화길

■ 코스 및 소요시간
두문동재∼금대봉∼고목나무샘∼분주령∼대덕산∼검룡소(4~5시간)



■ 가는 방법
교통은 불편하다. 태백시 터미널에서 두문동재 또는 검룡소까지 오가는 대중교통 수단은 없다. 택시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 승용차를 타려 해도 출발지와 도착지가 달라서 골치 아프다. 야생화를 ‘알현’하려면 품이 든다.



■ 탐방 안내
태백관광안내소 033-550-2828



■ 여행 관련 팁
야생화에 조예가 깊지 않다면, 문화해설사와 동행하는 것이 필수다. 비전문가가 혼자 가면 이름 없는 풀과 들꽃만 실컷 보다 오게 된다. 태백시 관광 누리집(tour.taebaek.go.kr)이나 태백시청 환경보호과(033-550-2061)로 신청하면 일정에 따라 문화해설사가 동행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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