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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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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숲길을 걷다-③오대산 옛길

울창한 숲길과 오대천 줄기를 번갈아 만나는 강원도 평창 오대산 옛길… 스물다섯의 가을을 보냈던 그곳엔 화전, 일제 등 역사의 흔적이 남아
등록 2011-07-27 09:20 수정 2020-05-02 19:26
» 오대산 전나무 숲길에서 바라본 월정사 일주문. 수령 100년 안팎의 전나무 1700여 그루가 양편으로 도열한 이 길에 서면 사위에서 풍겨오는 신비스런 기운에 걷는이의 마음은 저절로 숙연해진다. 한겨레21 박승화

» 오대산 전나무 숲길에서 바라본 월정사 일주문. 수령 100년 안팎의 전나무 1700여 그루가 양편으로 도열한 이 길에 서면 사위에서 풍겨오는 신비스런 기운에 걷는이의 마음은 저절로 숙연해진다. 한겨레21 박승화

오대산은 육산이다. 산은 높고 골은 깊되, 등성이가 완만하고 몸피는 풍성하다. 북쪽으로 마주한 설악산이 남성적이라면 오대산은 여성성이 두드러진 산이다. 예로부터 오대산을 백두·지리·묘향·덕유산과 더불어 한반도의 ‘5대 덕산’으로 꼽아온 것도 이 산의 후덕한 자태와 무관하지 않다.

옛길은 산의 초입인 월정사에서 상원사 입구까지 이어지는 20리(8km) 오솔길이다. 넉넉잡아 3시간이면 완주할 수 있다. 길은 월정사에서 상원사를 거쳐 두로령으로 이어지는 옛 446번 지방도(2009년 폐쇄)와 나란히 진행된다. 애초에 군사작전용이던 지금의 도로가 개설되기 전(1960년대 말) 상원사의 승려들과 화전을 일궈 살던 민초들이 이 길을 오갔다.

겸손히 신발을 벗고 걷자

옛길의 시작점을 알리는 표지판은 월정사 제재소가 운영 중인 회사거리에 있다. 하지만 옛길 걷기의 첫걸음은 더 아래쪽인 월정사 일주문에서 떼는 것이 좋다. 오대산이 자랑하는 1km 길이의 전나무 숲길이 일주문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수령 100년 안팎의 전나무 1700여 그루가 양편으로 도열한 이 길 앞에 서면 사위에서 풍겨오는 신비스런 기운에 걷는 이의 마음은 저절로 숙연해진다. 마사토가 깔린 부드러운 흙길에 두 발을 내디딜 때면, 겸손히 신을 벗어 대지의 자애로움을 온몸으로 느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나무 숲길을 빠져나와 월정사 주차장을 지나면 상원사로 이어지는 옛 지방도다. 도로변 부도밭에 멈춰 마음을 가다듬고 재차 걸음을 재촉한다. 멀리 왼편으로 높다란 나무 울타리가 보인다. 월정사가 불사에 쓰일 목재를 조달하려고 운영 중인 직영 제재소다. 일제강점기 이곳에는 일본인 소유의 목재 회사가 있었다. 오대산에서 베어낸 나무를 자르고 가공하던 곳이다. 회사거리라는 명칭도 그때 생겼다.

회사거리 앞 옛길의 시작점에서 본격적인 탐방에 들어간다.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오대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다. 인간이 발명해낸 가장 원시적인 교량이다. 옛길과 만나는 오대천에는 6개 징검다리가 있다. 성인 두 사람이 올라설 만큼 육중하고 평평한 돌을 골라 바닥을 다졌지만 큰물이 지면 기울고 떠내려가 다시 놓는 수고를 반복해야 한다. 징검돌 사이로 흐르는 물이 수정처럼 맑다. 이 물의 주인은 버들치, 금강모치, 열목어 같은 1급수 물고기들이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울창한 숲 사이로 완만한 오솔길이 펼쳐진다. 우기를 거치며 한층 촘촘해진 나뭇잎 사이로 반가운 여름 햇살이 은빛으로 부서져내린다. 부서진 빛줄기는 조릿대의 윤기 나는 잎새에 부딪쳐 숲 전체로 퍼져나가는데, 이로 인해 오솔길 주변은 온통 상서로운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 빛을 뚫고 한참을 걸어가면 ‘화전 금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시멘트 표지석을 만난다. 40여 년 전 산자락의 화전민들을 소개(疏開)하며 세운 것이다.

» 오대산 옛길은 돌과 흙과 물과 바람과 숲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걷기 여행의 보고다. 옛길이 지그재그로 가로지르는 오대천의 계곡물은 수정처럼 맑고 얼음처럼 차가워 물속에 담근 손이 5초를 견디기 힘들다. 한겨레21 박승화

» 오대산 옛길은 돌과 흙과 물과 바람과 숲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걷기 여행의 보고다. 옛길이 지그재그로 가로지르는 오대천의 계곡물은 수정처럼 맑고 얼음처럼 차가워 물속에 담근 손이 5초를 견디기 힘들다. 한겨레21 박승화

한때 옛길 주변에는 300가구가 넘는 민가가 있었다. 모두가 화전민은 아니었다. 식민지 시기부터 벌목업이 성행하다 보니 산림 벌채에 종사하던 사람 수가 오히려 많았다. 화전민들은 조개골, 동피골, 신선골 등 오대천으로 이어지는 골짜기 곳곳에 귀틀집을 짓고 살며 조와 콩, 메밀 따위의 작물을 길렀다. 이들이 언제부터 오대산에 터를 잡고 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반도 화전의 역사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학계의 연구 결과로 미뤄 그 시기를 월정사 창건기인 7세기 전후로 추정할 뿐이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급감했던 화전민은 전후 식량난이 가중되자 다시 늘어나다가 1968년 정부가 화전정리법을 공포한 뒤 자취를 감췄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직후의 일이다. 화전민이 살던 귀틀집과 척박한 화전의 자취는 옛길 주변에 널린 돌무더기 위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낙엽층이 쌓인 양탄자 같은 길

화전민의 흔적을 뒤로하고 발길을 재촉하니 길은 다시 오대천을 만난다. ‘보메기’란 푯말이 서 있는 이곳은 과거 오대산에서 벌목한 나무들을 모아두던 곳이다. 월정사 법철 스님에게 지명의 유래를 물었더니 이런 설명이 돌아온다. 운반 수단이 마땅찮던 시절, 오대천 계곡물은 베어낸 나무들을 산 아래로 실어나르던 유일한 운송로였다. 하지만 육중한 통나무를 운반할 만큼 계곡물의 양이 사시사철 풍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보를 쌓아 가둔 물에 나무들을 띄워놓은 뒤 수량이 늘어난 우기에 보를 터뜨려 한꺼번에 하류로 운반하는 것이었다. 보메기의 기원이 ‘보막이’였음을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숲길을 뚫고 한참을 진행하니 하천을 가로지른 목조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1960~70년대 농촌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섶다리다. 통나무로 교각을 세우고 잔가지로 상판을 엮은 뒤 흙을 덮어 보행의 안정성을 높인 가설 교량이다. 허약한 구조와 부실한 부재 탓에 우기가 오면 유실될 수밖에 없는 1년짜리 다리였다. 옛길의 섶다리는 상판을 높이고 교각 사이를 넓혀 우기에도 떠내려갈 걱정이 없다는 게 오대산공원사무소의 설명이다.

섶다리를 지나면 선재농장이 나온다. 절집에서 먹을 무, 배추 등을 재배하는 상원사의 텃밭이다. 주변에 넓은 개활지가 드문 탓에 이곳은 1996년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 때 오대산지구 대간첩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숙영지로 사용됐다. 당시 군인 신분이던 기자는 이곳에서 30일 넘게 텐트를 치고 스물다섯 살의 가을을 보냈다. 숙영지 생활은 단조로웠다. 아침을 먹은 뒤 UH-1H 헬기를 타고 산 정상으로 이동해 계곡을 한바탕 훑고 내려오면 짧은 해가 졌다. 어둠이 깔리면 D형 텐트에 몸을 눕히거나 오대천변 매복지로 ‘근무’를 나갔다. 작전의 긴장감은 갈수록 떨어졌다. 20일을 넘기자 우리는 산자락에 은거해 있을지 모를 북한 정찰국 요원보다, 불시 점검을 나오는 군기 감찰반의 존재에 신경을 더 곤두세웠다. 차단망은 뚫렸고, 정찰국 요원은 백두대간의 산줄기를 타고 휴전선을 넘었다. 부대로 복귀한 뒤 포상은커녕 숙영지 군기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사흘간 연병장을 포복해야 했다.

군 시절의 우울한 기억을 털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길은 동피골을 거쳐 상원교로 이어진다. 호령봉의 가파른 동쪽 사면을 따라 이어진 이 길은 오대산사무소 쪽이 길을 트는 데 가장 어려움을 겪었다는 구간이다. 사람 손을 타지 않아 제멋대로 자란 수목의 줄기들을 무섭게 자란 다래덩굴이 뱀처럼 휘감았다. 좁고 굴곡이 심한 길이지만 바닥은 썩은 초목 부스러기와 켜켜이 쌓은 낙엽층 덕분에 양탄자 같은 푹신함이 느껴진다. 오대산 자연환경안내원 최승화씨가 노루오줌, 물레나물, 십자고사리 등 생경한 야생풀의 이름을 하나하나 일러준다. 용평스키장이 있는 강원도 평창군 횡계면 발왕산 자락에서 태어나 대학 시절을 제외하곤 줄곧 고향에 머물러왔다는 최씨는 어린 시절 3시간 거리의 초등학교까지 산길을 걸어 통학한 강골 산처녀다. 2006년부터 오대산사무소에서 일하며 숲길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마침내 다다른 무릉도원

신선암 입구를 지나 종착지인 상원탐방지원센터까지는 평탄한 흙길에 폭도 비교적 넓은 편이다. 이 구간에는 1930년대 목재를 수송하려고 일본인들이 부설했다는 협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법철 스님 말로는, 상원사 주변에서 벌목한 나무를 궤도 차량에 실어 월정사 아래로 가져오면 소달구지를 이용해 진고개 너머 주문진항으로 옮겼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주로 베어간 수종은 박달나무였다. 목질이 단단한 오대산 박달나무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보병의 주력 화기였던 99식 소총의 개머리판을 깎는 데 사용됐다. 협궤는 해방 뒤 방치되다가 1950년대 후반 철거됐다.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보행자들 민원이 빗발쳤던 탓이다.

종착지가 가까워질수록 공기의 서늘함은 강도를 더해간다. 백두대간 마루금을 넘어온 건조한 산바람이 차가운 계곡물과 접촉해 만들어낸 냉각 효과 덕이다. 마지막 징검다리 위에 올라 계곡물에 손을 담근다. 뼛속까지 아려오는 냉기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선다. 상원탐방센터의 수은주는 한낮임에도 21℃를 가리킨다. 여기가 무릉도원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target="_top">eyeshoot@hani.co.kr





» 오대산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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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통편
승용차: 경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진부IC~월정사
동서울터미널~진부시외버스터미널(배차 간격 30~40분), 진부터미널~월정사(군내버스, 배차 간격 약 1시간)


■ 여행 정보
오대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033-342-6417
오대산 월정사 033-339-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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