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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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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걷고 싶은 길 12선

자신과 대화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길이 되는 걷기… 숨겨진 주옥같은 길들을 두루 아우른 ‘걷고 싶은 길 12선’
등록 2011-07-26 03:06 수정 2020-05-02 19:26
» 진안고원 마실길 1-1 코스 중간에 위치한 신광재의 고랭지 채소밭 곳곳에서 농부들이 일하고 있다. 걷다 보면 잊고 사는 삶과 만난다. 한겨레21 이종찬

» 진안고원 마실길 1-1 코스 중간에 위치한 신광재의 고랭지 채소밭 곳곳에서 농부들이 일하고 있다. 걷다 보면 잊고 사는 삶과 만난다. 한겨레21 이종찬

걷기(Ambulo)가 사유(Cogito)에 선행했다. 200만 년 전 나무에서 내려와 두 발로 선 원시인류에게 걷기는 숙명이자 축복이었다. 먹기 위해, 먹히지 않기 위해 부단히 이동해야 했던 그들이 동물계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올라서기까지는 두 발로 걷는 능력이 결정적 사다리가 됐다. 직립보행은 두 손을 해방시켜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했고, 도구 사용은 두뇌 용량의 증대와 지능 향상을 가져와 사고와 소통 능력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호모사피엔스(사유인)에 앞서 호모에렉투스(직립인)가 있었다는 고인류학의 발견도 이런 발생학적 추론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의식의 독립 선언은 다음과 같은 인간학적 진술로 번안될 수 있다.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Ambulo, ergo sum).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라

걷기는 인간 본연의 행위 양식이지만 그것이 때론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되기도, 성애의 열락을 능가하는 절정의 쾌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채찍과 감시병을 동반한 정치범의 유배길이 절대 성지를 향한 순례자의 걸음처럼 가벼울 수 없는 것은 걷기라는 행위에 수반된 목적과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걷기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일깨울 요량이라면, 그에 걸맞은 좋은 길을 찾는 것이 궁극의 행복에 이르는 왕도가 된다.

»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이어지는 오대산 옛길. 두 절을 잇는 군용 작전도로가 뚫리기 전, 절을 오가는 승려들과 화전을 일구던 민초들이 이용했던 이 길의 양편에는 소나무, 참나무, 당단풍나무 등 수목들이 빽빽하다. 한겨레21 박승화

»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이어지는 오대산 옛길. 두 절을 잇는 군용 작전도로가 뚫리기 전, 절을 오가는 승려들과 화전을 일구던 민초들이 이용했던 이 길의 양편에는 소나무, 참나무, 당단풍나무 등 수목들이 빽빽하다. 한겨레21 박승화

을 쓴 크리스토프 라무르는 걷기와 길의 관계를 이렇게 기술한다. “길은 나의 발걸음을 지탱한다. 길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허공에 허우적거리거나 진창에 처박히지 않기 위해 필요한 저항을 내 발걸음에 제공한다. 걷기는 발과 땅의 일치를 보여주고 인간과 땅의 오랜 공모를 드러낸다.” 사람은 길을 걸음으로써 잊고 있던 자신의 몸을 직접 느낀다. 대지에 밀착한 두 발과 척추를 통해 육체에 가해지는 중력의 하중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탓이다. 그래서 걷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몸무게에 의해 실존주의자도 되었다가 유물론자도 된다.

걷기에 좋은 길이 반드시 풍광이 뛰어난 명소일 이유는 없다. 걷기의 쾌락은 시각적 자극보다는 걷는 행위 자체가 빚어내는 심리적 행복감에 의해 그 강도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걷기의 고수들은 구경거리를 찾기보다 ‘즐거운 기분’을 찾아 길을 떠난다고 입을 모은다. 걷기는 삶을 짓누르는 근심을 잠시 멈추게 하고, 자신과 사물에 대한 감각을 되살아나게 하며, 쳇바퀴 같은 일상에 가려 있던 가치들의 중요성을 새롭게 일깨운다는 얘기다. 을 쓴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말한다. “걷기는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환희로 바꾸어놓는 고즈넉한 방법이다.”

걷기에 반드시 동행이 있어야 할 필요 또한 없다. 혼자 걷는 것은 명상과 성찰의 필요조건이다. 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걷기의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반드시 혼자여야 한다”고 썼다. 동반자가 있다면 자유로운 걷기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그에게 단체로, 심지어 둘이서 하는 걷기는 산책이 아니라 소풍일 뿐이다.

그래도 혼자 걷는 고독이 부담스럽다면 데이비드 소로가 쓴 의 한 구절을 읽어봐도 좋다. “확신하거니와, 내가 만약 산책의 동반자를 찾는다면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취미는 자연을 멀리함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산책함으로써 얻게 되는 저 심오하고 신비한 그 무엇과도 작별이다.”

먼저 가는 옛길과 마실길

이 산림조합중앙회와 함께 선정한 ‘걷고 싶은 길 12선’은 산길과 계곡길, 마을길을 두루 아우른다. 최근의 걷기 열풍을 주도하는 제주 올레길나 지리산 둘레길만큼 풍광이 화려하거나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한결같이 걷기의 매력과 희열을 맛보기엔 부족함이 없는 주옥같은 길들이다. 이번호에는 여름휴가철을 맞아 찾기에 적합한 3곳을 먼저 소개한다. 깊은 계곡과 울창한 원시림이 백미인 화엄의 성지 오대산 옛길(강원 평창군)과 화전을 일궈 살아가던 고단한 민초들의 삶이 오롯이 깃든 소백산 자락길(경북 영주시), 삼남지방 최대의 고원지대에 자리잡은 진안 마실길(전북 진안군)이다. 길을 나서는 데 필요한 건 하루의 시간과 튼실한 두 다리뿐, 이제 떠날 시간이다. 암불로, 에르고 숨.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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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순서
1. 오대산 옛길·소백산 자락길·진안 마실길
2. 왕피천길(경북 울진)
3. 사려니숲길(제주)
4. 퇴계 오솔길(경북 안동)
5. 덕풍계곡길(강원 삼척)
6. 분주령 야생화길(강원 태백)
7. 정약용 유배길(전남 영암·해남)
8. 남명의 길(경남 산청)
9. 강화 나들길(인천)
10. 북한산 둘레길(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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