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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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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닿을 수 없는 한지의 영혼

[2011 만인보 전주에서 3대에 걸처 60년간 한지 만든 박선태씨…천년 가는 종이 길어올리는 노장인의 외길
등록 2011-04-29 17:02 수정 2020-05-03 04:26

선이 고운 처마로 달랑달랑 바람이 든다.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 어여쁜 한옥. 그곳이 박선태(71)씨의 일터다. 별다른 자원도 특별한 지원도 없던 예향의 마을 전북 전주에는 소중한 자산이 둘 있었으니, 그 하나는 맛스러운 음식이요 다른 하나는 으뜸가는 한지(韓紙)다. 유난히 물이 좋아 닥나무가 많이 생산됐고, 장인들이 간직한 고유의 기술력으로 고려시대 중기 이래 조선시대 후기까지 왕실의 진상품으로 들어가는 질 높은 한지를 만들어왔다.

밥이자 삶 그 자체였던 한지

박선태씨는 임진왜란 이래로 한지장인들이 모여 살았다는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안덕 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종이를 만들며 살아왔으나, 살림은 언제나 곤궁하던 시절이었다. 학교도 못 가고 동네 어른에게 천자문이나 배울 무렵, 6·25 전쟁이 발발했다. 형님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아버지는 호적을 조작(그 시절에는 그것이 어렵지 않았다)했다. 형님과 자신의 나이를 무려 일곱 살이나 줄여버린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형님은 살아남았으나 열네 살의 박씨는 호적상 겨우 일곱 살의 어린이가 돼 있었다. 몇 해가 지나도 미래를 구상할 수 없었다. 학교도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열일곱이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와 형님의 뒤를 이어 종이를 뜨기 시작했다. 그에게 다른 삶의 기회란 엿보기조차 어려웠던 까닭이, 또한 한지로 이어지는 운명이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작은 공장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일을 했다. 그의 손은 뭉툭해지고 거칠어졌으나, 이제 희망은 그것뿐이었다.

박선태씨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형님의 뒤를 이어 종이를 뜨기 시작했다. 그에게 다른 삶의 기회란 엿보기조차 어려웠던 까닭이, 또한 한지로 이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지난 4월20일 전북 전주 한옥마을에서 그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밝게 웃고 있다.

박선태씨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형님의 뒤를 이어 종이를 뜨기 시작했다. 그에게 다른 삶의 기회란 엿보기조차 어려웠던 까닭이, 또한 한지로 이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지난 4월20일 전북 전주 한옥마을에서 그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밝게 웃고 있다.

좁은 골짜기가 답답하게 느껴질 무렵, 우연히 서울 도시 처녀를 소개받았다. 처녀는 해사한 그의 인상에 반해 결혼까지 결심했고, 그는 전주 시내로 나와 작은 방을 얻었다. 그리고 빚을 얻어 작은 공장을 차렸다. ‘종이에 대한 사랑’ 이전에 말 그대로 ‘먹고살기 위해’ 밤낮으로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초지법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한지의 질이 높아지고 국외 수출길이 열리며 전통 제지시장이 호황을 맞게 되었다. 소박하게 시작한 그의 공장도 그런 시대에 뒤섞여 바쁘게 돌아갔다. 기계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직원 두서넛과 아내까지 달려들어 쉴 새 없이 종이를 뜨고 또 떴다. 다 마른 한지를 고이 모셔두었다가 외지에서 달려내려온 트럭에 실려보낼 때는 가슴에 꽃이 핀 듯 벅차올랐다. 그것이 자신들의 한 끼 밥이었으며 아이들의 학비였고, 또한 모든 목적을 떠난 삶 그 자체였으므로.

출근을 하던 선태씨가 잠시 멈춰서 있던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섰다.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관광객 몇의 이야기가 두런두런 들려온다. 그들은 곧 자신의 일터로 찾아올 것이다. 그들에게 한지를 뜨는 과정을 보여주고 대답도 해주며 손수 한지를 뜨는 것이 지금 그의 일이다.

보드라운 손에 대한 미안함

12년 전, 온 마음과 수고를 내맡긴 공장이 문을 닫았다. 아니 ‘닫았다’기보다 ‘닫혔다’. 중국에서 값싼 화선지가 물밀듯이 들어오자 국내 수요는 격감했고,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수출길도 막혔다. 한지업자들이 줄줄이 도산하던 시기였다.

처음 이곳에 취직(?)할 때는 ‘잠시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공장을 운영하며 직접 뜬 종이로 살아온 내가 아니던가.” 그러는 사이 자식들은 하나둘 결혼을 했고, 돌아보니 남은 것은 자신과 아내뿐이었다. 그 헛헛함과 여전히 가벼운 그의 통장 사정으로, 그는 아직 일을 놓지 못한다.

옷을 갈아입고 종이를 뜰 준비를 한다. 운반돼온 원료를 풀어 종이를 뜨고 보내는 지금의 일은 예전에 비해 삼분지 일의 힘도 들지 않았지만, 일흔을 넘어가는 체력은 그에 상응하는 땀방울을 만들었다. 얼굴이 붉어지도록 그의 정성스러운 손길에 원료가 살살 풀어진다. 이제는 모터가 있어 그 일도 더 쉬워졌다.

지나온 수십 년의 날들… 그는 모든 것을 직접 해냈다. 닥나무를 채취해 잘 삶아내 일일이 껍질을 벗기고 긁어서 백피를 만들고, 그것을 또 말려 삶은 뒤 몇 명이 달려들어 두드린다. 철퍽철퍽하고 방망이에 와닿던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분해한 원료를 물과 함께 다시 풀어내려고 긴 작대기로 휘휘 젓다 보면 시큰시큰 팔근육이 당겨왔다. 그래도 그것이 종이가 되어 팔랑거릴 생각에 힘이 절로 나던 청춘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서로 돕다 보니 아내까지도 방망이나 작대기를 들고 있는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근래 들어 가끔 아내가 허리나 관절이 아프다고 하면, 선태씨는 그때의 미안함이 새삼 밀려온다.

“이제라도 아내가 쉴 수 있으니….”

정감 넘치는 고운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흘렀다. 그가 일하는 동안 아내는 집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노래를 배우거나 취미를 키운다. 그것이 그는 참말로 좋았다. 이제라도 처음 만날 때의 그 손 보드라운 도시 처녀의 하루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다.

그가 외발로 한지를 만들고 있다. 외발뜨기는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방식이다.

그가 외발로 한지를 만들고 있다. 외발뜨기는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방식이다.

평생 단 한 번의 전율

본격적으로 한지 뜨는 일이 시작되었다. 두런거리던 관광객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작업장으로 다가왔다.

“구경해도 되나요?”

큼직한 카메라를 바라보며 그가 웃었다.

“그럼요.”

그가 힘차게 외발(발 위에 원료를 올리고 한 줄에 고정시킨 발에 뜬다 해서 외발뜨기라 부른다.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방식이다)을 잡았다. 앞 물을 떠서 뒤로 버리고, 옆 물을 떠서 반대쪽으로 버리는 동작을 반복한다. 계속하다 보면 그 두께가 점차 차오른다. 신기한 것은 일정 두께가 되면 아무리 동작을 반복해도 더는 두꺼워지지 않고 짓이겨 풀어진 닥나무가 물처럼 흩어진다는 것이다. 50여 년을 해온 일이어도 매번 경이롭고 기쁘다. 그처럼 종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그렇게 떠올린 종이를 반대로 엇갈리게 겹쳐놓는다. 앞뒤로 붙는다 해서, 음양지라고도 부르는 외발지다. 쌍발뜨기를 하면 더 크고 빠르게 종이를 만들 수 있으나, 그것은 개량된 초지법으로 외발지보다 그 질이 못했다.

“어머, 여기 이분이 선생님세요?”

‘구경’이란 단어를 쓰던 이들이 문득 곁에 놓인 광고물을 보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한지를 심도 있게 다룬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작품 포스터다. 선태씨는 영화 속에서 한지장인이 계곡으로 들어가 천년을 가는 종이를 뜨는 장면을 대역했다. 그 장면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무려 사흘에 걸쳐 찍었다.

“네, 접니다. 엄청 추웠지요.”

선태씨는 그때의 추위와 함께 추위보다 더 자신을 들뜨게 했던 서늘한 달빛을 떠올린다. 천년을 가는 종이를 만든다는 것은, 어쩌면 순전한 욕심인지 모른다. 실제로 그렇게까지 이어온 종이도 없을뿐더러 지금의 기술과 나무 재질, 사회적·환경적 요인이 그것을 요원하게 하지 않던가. 그러나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운 푸른 달빛 속에서, 요동치듯 내려서는 계곡물을 담아 한장 한장 종이를 뜨던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설령 가상된 현실이라 해도 평생의 단 한순간으로 꼽을 만큼 전율이 흘렀다.

견오백 지천년(絹五百 紙千年)

자연이 가지는 질감과 살아서 숨 쉬는 듯한 생명감으로 어떤 재료에서도 얻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그것. 먼지처럼 스러져버리는 양지나 천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보존력으로 가죽처럼 팽팽한 질김이 있는 그것. 그것은 언제나 가닿으면서도 결코 닿을 수 없는 달빛과도 같은 한지의 영혼 그 자체였다.

‘견오백 지천년(絹五百 紙千年)이라는 말이 허투루 있는 것이던가.’

한참을 사진 찍으며 도란거리던 관광객이 떠나고, 선태씨는 묽게 흩어진 하얀 구름떼를 올려다보았다. 일흔이 넘도록 잡아온 빈 작업대도 흔들어본다. 다만, 살기 위해 한지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왔다. 또 그렇게 말해왔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알고 있었다. 오히려 한지를 만들기 위해 살아온 삶이라는 것을. 이제 곧 작업대를 놓는 날이 올 것이다. 남들처럼 유람을 다니고 부부간 사이좋게 손잡고 꽃구경을 가기도 하겠지. 그러나 어떠한 세상이, 지난 50여 년간 만져온 저 곱다란 한지보다 더 화사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쉬이 상상되지 않는다.

선태씨가 눈을 감았다. 흐드러진 이팝나무의 꽃향기가 밀려와 얼굴을 간질이고, 그의 감은 두 눈에는 한지가 꿈처럼 굽이굽이 펼쳐지는 하나의 이상이 떠오른다. 그 위엔 하염없이 종이를 찧고 뜨고 나르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희미한 미소가 봄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누군가 들어선다. 한지를 뜨는 생소하고도 경이로운 모습을 보려고. 그가 팔을 걷었다. 한 장의 종이가 그의 손에서 첫 숨을 내어 쉬기 시작한다.

전주=글 김소윤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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