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적 의상·양성애적 퍼포먼스 등 도발적 무대와 열렬한 환호… 대중의 복용량 철저히 계산하는 영악한 아티스트
진중권 문화평론가
‘레이디 가가’가 누군가 했더니 언젠가 그래미상 시상식에 살코기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던 그분이란다. 유튜브의 뮤직비디오가, 세상에, 무려 1억 뷰를 자랑한다. 페이스북 친구 1천만 명에 트위터 추종자가 500만 명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을 그동안 나 혼자 모르고 지냈다. 노래를 들어보니, 대부분 그쪽으로 담 쌓고 살았던 내 귀에도 익은 것들이다. 의아한 것은, 소문으로 듣던 그녀의 기행(?)에 비해 정작 음악은 너무나 평범하게 느껴진다는 점. 이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앤디 워홀 인용하는 화려한 보헤미안
이 별것 아닌 물음 안에 ‘레이디 가가’라는 현상의 본질이 들어 있지 않을까? 레이디 가가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은 역시 뮤직비디오다. 그녀가 대중문화에 도입한 혁신은 대부분 비주얼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첫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가 한때 고급예술에 속하던 전략을 대중문화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미술사를 좀 아는 이라면 그녀의 퍼포먼스가 현대미술, 특히 1960년대 이후 서구 미술사에서 인용한 시각적 요소로 가득 차 있음을 알 것이다.
음악은 그녀의 일부- 물론 중요한 일부- 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가수’라기보다는 ‘퍼포먼스 예술가’로 여긴다. 자신이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을 지향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녀의 퍼포먼스에서는 패션·음악·무용·연극·설치 등 다양한 장르가 하나가 된다. ‘레이디 가가’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는 각 장르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그녀는 그 모두를 총괄하는 감독이 된다. 한마디로 대중음악을 아예 새로운 장르로 바꿔놓은 셈이다.
그녀는 자신을 “패션의 아방가르드”라 부른다. 다른 영역에서도 즐겨 아방가르드의 제스처를 취한다. 파격적인 헤어스타일(리본 머리), 엽기적인 패션(생고기 드레스), 외설적인 무대의상(란제리 차림), 때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벤트로 그녀는 대중에게 충격을 준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충격’은 모더니즘, 혹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전형적 책략이다. 그녀의 퍼포먼스가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어느 기사의 제목이 보여준다. “레이디 가가, 알 속에서 등장. ‘충격’”
정확히 말하면, 레이디 가가의 작업은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포스트 아방가르드’에 가깝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대중의 취향(‘키치’)에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대중을 쇼크로 몰아넣고 그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아야 비로소 자기가 예술적으로 유의미한 진술을 했다고 느꼈다. 레이디 가가는 어떤가? 그녀의 도발은 외려 대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과거에 도발은 제도 ‘밖’의 위협이었으나, 오늘날 도발은 제도 ‘안’의 놀이가 되었다. 요즘엔 외려 지루한 대중이 예술가에게 자기를 도발해달라고 요구한다.
이것이 1960년대 이후 미술계에 찾아온 포스트 아방가르드의 상황이다. 레이디 가가가 종종 앤디 워홀을 인용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게다. 그녀의 앨범 은 “누구나 자신을 유명하게 느끼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데는 20분밖에 안 걸린다”고 했던 워홀에게 바치는 오마주일 것이다. 아방가르디스트가 대중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한 보헤미안이었다면, 워홀은 달랐다. 그는 자신을 ‘팝스타’로 여기며 외려 대중적 명성을 즐겼다.
가가는 자신의 작업팀을 즐겨 워홀의 ‘팩토리’에 비유한다. 워홀은 자신이 작품을 직접 만들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대량생산 시대에는 예술가와 예술 역시 공장(팩토리)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얘기다. 워홀의 비범함은 (그의 작품 속 수프 깡통들처럼) 스스로 남들과 구별되지 않는 평범함으로 내려가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가가에게는 이 역설이 없다. 외려 그녀는 자신을 “결코 복제될 수 없이 독특한” 존재로 여긴다. 그녀의 자의식은 아방가르드와 포스트 아방가르드 사이에서 동요한다.
무차별적인 혼성모방의 포스트모던함
레이디 가가는 대중문화로 들어온 ‘포스트모던’이다. 그녀의 비디오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던의 온갖 전략을 본다. 먼저 ‘혼성모방’(pastiche)의 기법. 가령 타란티노의 영화(), 야나기 미와의 사진(),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 등, 그녀의 뮤직비디오는 과거와 현재의 예술에서 가져온 인용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의 드레스 속에서 과거와 미래, 즉 16세기 복식과 미래주의 패션은 하나가 된다. 이 양식적 절충주의가 포스트모던의 전형적 특징이다.
이어서 ‘횡단’. 언젠가 그녀는 “너무 연극적”이라는 이유로 계약을 거절당했단다. 이 일화는 모더니스트 마이클 프리드가 전후 미술을 ‘연극적’이라고 비판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모더니즘의 강령은 예술이 무엇보다 자기 매체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한다. 대중음악에서라면 가수는 일단 음악에 매진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가가는 총체예술을 지향했다. 이렇게 상이한 장르를 뒤섞는 것 역시 포스트모던하다. 모더니즘이라면 장르를 혼합하지 않고 공감각을 사용할 게다.
‘성 정체성’을 흐리는 것도 포스트모던하다. 가가는 자신을 양성애자로 소개한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의 구별을 넘어선 존재다. 그녀의 비디오에서는 남자들이 하이힐을 신고, 남성 댄서가 여성인 가가에게 자신의 엉덩이를 내준다. 이는 게이 커뮤니티의 ‘캠프’ 취향의 냄새를 풍긴다. 이렇게 성 정체성을 흐리는 전통은 자신을 ‘로즈 셀라비’라는 여성으로 분장시켰던 뒤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가는 이를 역시 여성으로 분장하곤 했던 워홀을 통해 받아들였을 것이다
인용의 원천을 밝히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작품에 넘쳐흐르는 시각적 과잉은 매슈 바니를 연상시키고, 살코기 드레스는 이른바 ‘혐오예술’(abject art)을 차용한 것이며, 피 묻은 란제리의 공연은 1960년대의 ‘해프닝’에서 흔히 보던 것이다. 예술과 더불어 그녀를 분석하는 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담론의 인용이다. 그녀의 퍼포먼스는 해러웨이(‘사이보그 선언’)에서 보드리야르(‘시뮬라크르’)를 거쳐 드 기보르(‘스펙터클’)에 이르기까지 포스트모던의 온갖 담론을 인용한다.
그녀의 스펙터클은 상황주의 퍼포먼스를 닮았다. 차이가 있다면, 그녀의 것은 저항의 성격을 잃고 완전히 상업화했다는 것. “나는 세상에서 가장 판단에서 자유로운 인간이다.” 이 판단중지, 이 무차별성 역시 포스트모던하다. 아방가드르 예술가들은 독단적일 정도로 자기 판단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의 리사이클+리사이클
아무리 아방가르드의 제스처를 취해도, 그녀가 던지는 충격의 요소는 이미 복용량이 철저히 계산된 것이다. 그녀의 음악이 생각보다 평범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게다. 음악마저 이상했다면, 그녀가 자신의 에고로 여기는 그 대중적 명성(The Fame)에 도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술의 아방가르드를 받아들인 대중도 음악의 아방가르드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음악에서는 아방가르드의 제스처를 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가가의 위대함은, 아방가르드를 리사이클링했던 포스트 아방가르드를 대중문화 속에서 다시 한번 리사이클링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급문화의 영역에서는 두 번의 반복으로 이미 식상해진 것도 대중문화 속에서는 아직 참신할 수 있다. 가가는 그것을 안다. 그녀는 영리하다. 영리하다 못해 영악하다.
<hr>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최근 이공계 학생들이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풍자해 이른바 ‘연구실 송’이란 걸 만들어 학생들 사이에서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이 동영상은 논란이 일자 저작자 스스로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삭제했다) 등이 대표적인 곡들인데, 학문의 어려움, 독재적인 연구실 분위기, 늦어지는 졸업, 불안한 미래 등 이공계 젊은이들의 고단한 현실을 진솔하게 담고 있다.
전위적이지만 세련되게 일상을 부수는
이런 침체된 분위기는 미국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드라마 에서 보듯, 과학기술 전공이 안정적인 직장을 보장해주던 시절은 끝났다. 그래서 미국 대학원생들도 과도한 연구 프로젝트에 시달리는 자신의 처지를 비꼬는 노래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기도 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곡이 미국의 가수 레이디 가가의 를 패러디한 다(독특한 멜로디가 반복되는 는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여성 팝 보컬 퍼포먼스상’과 함께 ‘최우수 쇼트 폼 뮤직비디오상’도 탔다).
텍사스 베일러 칼리지 후이정 교수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이 만든 이 동영상은 “5년 안에 박사학위를 받고 싶지만” 같은 저명한 저널에 논문을 실어야 하는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대학원생의 절규를 담고 있다.
이 동영상에는 ‘짝퉁 레이디 가가’가 등장한다.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레이디 가가의 모습을 패러디한 이 인물은 실제 레이디 가가처럼 사이버네틱한 의상과 노란 머리를 하고 있는데(아마도 그는 후이정 교수 연구실의 대학원생일 것이다!), 놀라운 대목은 레이디 가가가 분자유전학 실험실과 너무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레이디 가가는 자신을 가수를 넘어 행위예술가라고 주장한다!).
재미있게도 내가 처음 레이디 가가를 알게 된 곳도 (엉뚱하게도!) 과학자의 실험실이었다. 한때 미국에서 함께 연구했던 동료를 찾아갔더니 그가 자신의 책상 앞에 ‘생고기를 몸에 붙인 엽기적인 여성’의 사진을 붙여놓았다(하필 그 옆에는 미국 내 정신질환자 수에 대한 통계 그래프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이 사람 누구야?”
“레이디 가가. 내 우상이야!”
“왜 이 사진을 붙여놓았는데?”
“이 가수는 ‘날마다 상식의 철창을 부수는 사람’이야.”
내가 처음 레이디 가가라는 이름을 듣게 된 순간이었다. 파격적인 의상과 엽기적인 퍼포먼스, 그리고 세련된 음악으로 시대의 아이콘이 된 레이디 가가를 내가 주목하게 된 것이 그 직후다. 사진 속에서 그는 (전혀 섹시하지 않은) 민망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그가 참 ‘정신질환을 연구하는 분자생물학 실험실’과 잘 어울린다고 그때도 느꼈다.
레이디 가가는 이젠 대학 캠퍼스에 수업 과목으로도 입성했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에는 레이디 가가의 삶과 작품활동, 인기 비결을 학문적으로 조명하는 사회학 강의가 있다. 그의 열혈팬으로 알려진 매슈 데프렘 교수가 ‘레이디 가가와 명성의 사회학’이란 강의명으로 수업을 개설했다. 1천만 명의 페이스북 프렌드와 600만 명의 트위터 폴로어를 가진 레이디 가가의 마케팅 전략, 신구 매체의 공헌, 행위예술을 방불케 하는 라이브 콘서트, 동성애 문화, 성과 섹슈얼리티, 뉴욕과 할리우드 등에 대해 사회학적인 탐구를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비정상’을 대리만족하다
사람들은 왜 레이디 가가에 열광하는 걸까? 레이디 가가는 이 시대에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개성 있는 의상과 엽기적인 퍼포먼스는 관객에게 ‘보는 즐거움’을 주지만, 무엇보다 그는 노래를 잘 만들고 가창력도 우수하다(듣는 즐거움도 준다는 얘기다!). 최근 빌보드를 석권하고 있는 여성 솔로 가수들이 대부분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싱어송라이터지만, 탄탄한 일렉트로닉 비트와 팝적인 멜로디를 부합하는 능력이 뛰어난 레이디 가가는 그중에서도 각별하다.
재미있는 것은 레이디 가가가 보는 즐거움과 듣는 즐거움 이상의, 일종의 통쾌함 같은 걸 준다는 사실이다. 때론 어설프게 행위예술가 흉내를 내기도 한다. 예컨대 얼굴에 뿔 분장을 하곤 그것이 자신의 뼈라고 주장했던 퍼포먼스 사진을 볼 때면 ‘여자 허경영’을 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상식을 걷어차는 통쾌함’ 같은 걸 대중에게 선사한다.
그 이전이라면 ‘마돈나’가 아마도 레이디 가가와 유사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탄탄한 음악을 바탕으로 새로운 퍼포먼스와 의상으로 세상의 유행을 선도했다는 점에서. 매번 독특한 이벤트와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는 점에서. 음악성 또한 빼어나다는 점에서.
레이디 가가가 보이는 통쾌함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자극한다. 레이디 가가 사진을 붙여놓았던 내 연구 동료는 연구실에 폭 박혀 있는 친구다. ‘교과서에서 방금 튀어나온 모범생’ ‘극도로 비정상적인 정상인’이다. 날마다 타이를 매고,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하며, 집과 실험실을 오가는 길에서 샛길로 빠질라치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고 안절부절못하는 이른바 ‘범생 아빠’다. 그 녀석에게 ‘술과 마약, 담배에 기대지 않으면 곡을 쓸 수 없다’고 토로한 레이디 가가의 삶이 얼마나 후련했을까? 그는 아마도 스스로는 전혀 ‘날마다 상식의 철창을 부수는 사람’이 못 되어, 레이디 가가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근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책상에 붙여놓은 레이디 가가의 사진은 신자유주의 시장에 내몰린 수많은 일상인들에게 ‘일시적 탈출구’는 될지언정 그들의 삶을 진정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롤모델 사진을 책상 앞에 붙여놓는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사진 속 롤모델을 닮아가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연구 결과다.
예를 들면, 물리학도들이라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리처드 파인먼의 사진을 으레 책상 앞에 붙여놓고 그들처럼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길 꿈꾼다. 창의적인 업적을 남기길 기대한다. 사람들은 매번 책상 앞에 앉아 그들의 사진을 보며 그 꿈을 다짐한다고 믿지만, 오히려 현실은 반대다. 실제로 그들이 위대한 물리학자의 사진 밑에서 하는 일이란 고작 중간고사 시험 준비나 숙제, 밀린 서류 정리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자기 앞에 놓인 문제도 쉽게 풀지 못해 끙끙대는 스스로가 초라해 보이고, 롤모델이 세상에 남긴 업적이 비하면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은 더없이 초라해 보인다. 오히려 창의적인 업적을 남기는 데 방해가 된다는 얘기다. 그러니 닮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그들의 사진을 책상에서 떼어 마음에만 붙여놓으라는 얘기다.
어쩌면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이나 파인먼의 사진을 보며 그들의 창조적인 연구업적을 즐기며 대리만족하면서 황폐한 자신의 삶에 위안을 얻는 데 그칠 뿐인지도 모른다. 통속소설의 해피엔딩이나 장르영화의 권선징악이 자신의 우울한 현실을 달래주면서도 정작 현실 변화 의지는 오히려 약화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상식의 고착을 막아주는 존재
내 연구 동료에게 레이디 가가란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이 평범한 연구원은 날마다 상식의 철창을 부수고 싶지만, 정작 그러지 못해 레이디 가가가 대신 그 철장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지켜만 보며 열광하는지도…. 때론 과도하게 비난하고 때론 아방가르드적 퍼포먼스에 열광하면서, 그저 상식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그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상식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둥지를 튼다’는 의미라면, ‘무엇이든 의심하라’는 마르크스의 맥심(Maxim)을 실천해야 할 과학자는 항상 어린아이여야 한다. 주변 사람들과 세상에 비슷하게 반응하고 세상을 판단하는 정보 사전을 공유하는 것은 생존에는 유리한 전략일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경이로움을 탐구해야 할 과학자들에게는 유리하지 않다.
상식이 뇌 안에서 고착화하지 않기를, 성장은 했으나 어린아이의 불온한 뇌를 가질 수 있기를, 과학자들은 꿈꾼다. 레이디 가가 같은 엽기적인 ‘상식 파괴적인 호기심’이 과학자에게 ‘자연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레이디 가가의 사진을 대뇌 한켠에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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