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실패작’ 발리와인. 한겨레 고나무 기자
“맛있다!”(누나 문자)
“맛있다!”( ㅇ 기자)
“맛이… 음… 맛이… 독특하군요.”(ㅊ 전 국회의원)
투표 결과는 아직까지 2 대 1로 ‘맛있다’가 우세하다. 그러나 이 투표를 계속 진행해야 할지 영 자신이 없다. 지난해 12월10일 ‘입만’ 칼럼을 기억하시는지? 그렇다, 나는 지금 발리와인(Barley Wine) 얘기를 하고있다. 칼럼 말미에 이렇게 썼다. “혹시 발리와인이 익어간다는 사실을 3주 지나서도 꼼꼼히 기억하는, 에스트로겐 충만한 독자가 있다면 따로 맛 보여드리겠다.”
독자들은 명민하다. 똑똑하다. 센스쟁이다. 아무도 연락하지 않은 걸 보면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혹시나 한 명의 독자라도 수줍게 전자우편을 보내거나 전화라도 했다면, 더더구나 그분이 젊고 예쁜 여성 독자였다면, 그래서 내 발리와인을 잔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 진짜 벌어졌다면 민망할 뻔했다.
내가 만든 발리와인에 대해 스스로 테이스팅 노트를 만들어봤다.
1. 겉모양: 따르는 순간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거품이 바닥에서 위로 올라간다. 말 그대로 케스케이드(폭포).
2. 아로마(향): 진한 토피(캐러멜) 향+몰트 향+탄내. 쌉쌀한 홉 향은 그다지.
3. 풍미: 거품은 괜찮다. 거품이 조밀하고 오래 지속된다. 좋은 거품이란 뜻이다. 조금씩 마실 때마다 잔에 거품 흔적이 남는 ‘비어스텝’(Beer Step)도 선명. 역시 좋은 거품의 조건. 질감(마우스필)도 부드러웠다.
4. 문제는 끝맛(피니시). 단맛과 맥아맛이 강한 첫맛이 지나간 뒤 0.7초 지나 혀뿌리에서 강하게 탄맛(Peaty)과 쓴맛이 맴돌았다.
맥주의 쌉쌀한 맛은 기분 좋게 식욕을 자극한다. 그러나 내 발리와인의 끝에 강하게 맴도는 쓴맛과 탄맛은 입안을 텁텁하게 했다. 똑같이 쓴맛이지만, 하나는 기분 좋은 맛이고 내 것은 기분 나쁜 맛이었다. 유복한 집안과 범죄 소굴에서 각각 자란 쌍둥이가 15년 뒤에 보이는 차이랄까. 전체적으로 먹을 만한 맛이지만 그렇다고 용기를 내서 맥주맛을 보겠다고 찾아온 독자에게- 그러니까 만약 그런 분이 계셨다면- 감히 대접할 수준은 아니라는 게 나의 최종 자평.
양조 참고서 그대로 만들었어도 집에서 만드는 맥주 맛은 예측할 수 없다. 책이 시키는 대로 해도 결과물이 다르다는 게 ‘재미’인지 ‘한계’인지는 마음의 문제일 게다. “훌륭한 실패작”이라고 혼자 뇌까리며 어제도 밤 12시 취재원과의 저녁 자리를 마치고 돌아온 방에서 세 병 남은 발리와인 병뚜껑을 열었다.
봄이 온다. 모든 신문과 잡지마다 도다리쑥국이며 봄나물에 관한 요리 기사로 넘친다. 혹은 누군가에게 봄은 얇은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을 수 있는 계절일 게다. 발리와인은 주로 겨울에 마신다. 묵직하고 도수가 8도 정도로 높다. ‘훌륭한 실패작’이 이제 두 병 남았다. 내게는 그 두 병을 다 마시는 날이 겨울이 지나가는 날이다. 발리와인 병이 비어간다. 그러니까 봄은 온다.
고나무 기자 한겨레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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