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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의 역사는 달린다

200만 년 전 인류 조상의 달리기부터 현대 육상경기의 ‘인간 기관차’까지,

토르 고타스의 <러닝-한 편의 세계사>
등록 2011-04-01 11:40 수정 2020-05-03 04:26

“출발선 조용히!” 3천 명의 관중이 숨죽이고, 투르크풍 음악을 울려대던 군악대도 연주를 멈췄다. 10~12명의 주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출발선에 서 있다. 주자들은 연두색으로 물들인 가벼운 가죽신을 신고 몸에 꼭 맞는 흰옷을 입었다. 이들에겐 고용주가 있다. 고용주에 따라 각기 다른 색으로 칠한 헤드기어는 주자들을 구분하는 유일한 단서다. 달리는 이들의 손엔 채찍이 쥐여 있다. 본래 으르렁대는 개를 다스릴 때 쓰는 것인데, 오늘 경기에서는 흥분한 관객이 주로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쫓기 위함이다. 심판은 주자 이름 대신 고용주 이름을 호명하며 각 주자를 대열 앞으로 불러 세운다. 출발 총성이 울리면, 달린다. 멈추었던 음악이 다시 울려퍼지고 관중은 함성을 지른다. 1등은 단 한 명. 한 사람의 주자가 가장 먼저 결승선에 닿으면 고용주 이름이 사방에 울려퍼지며 환호가 하늘을 찌른다.

고용주의 전갈을 전하거나 돈이 걸린 달리기 시합에 나가는 등 업무를 맡은 유럽 전령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중요한 심부름을 처리하기 위해 달려야 했다.책세상 제공

고용주의 전갈을 전하거나 돈이 걸린 달리기 시합에 나가는 등 업무를 맡은 유럽 전령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중요한 심부름을 처리하기 위해 달려야 했다.책세상 제공

트랙 돌며 통치 능력 검증했던 람세스 2세

19세기 오스트리아 프라터 공원에서 매해 열리던 달리기 시합의 장면이다. 고용주는 자신의 주자가 1등을 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칭송의 순간을 즐기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여 주자들을 훈련했다. 인류의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부터 시작됐다는 달리기 역사 중 한 갈피다. 세월 따라 달리기는 다양한 의미로 변형됐다. 이때의 달리기 능력은 고용주가 소유한 것이자 놀이 수단으로서 기능했다.

노르웨이 민속학자인 토르 고타스가 쓴 (책세상 펴냄)는 달리는 행위의 역사를 되짚으며 과거부터 현재의 시간을 달린다. 고타스는 200만 년 전 기후가 바뀌고 삼림지대가 초원으로 변하면서 인간의 조상들이 사냥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생물학자 데니스 비램블과 인류학자 대니얼 리버먼의 연구 결과를 빌려 선사시대에 인간이 사냥으로 주식을 해결해야 했을 때, ‘달릴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해서 인류가 멸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지금 이순간도 우리가 인간의 역사를 써내려 갈 수 있는 이유는 선조의 달리기 기술 덕분이라는 것이다.

인류가 문명을 형성하면서 달리기는 생존 문제에서 벗어나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전통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예컨대 기원전 이집트의 ‘헤브세드’ 축제 현장. 추수감사 축제날, 람세스 2세(기원전 1303~1213)가 대관식에 앞서 몸을 풀고 있다. 달릴 준비를 하는 것이다. 왕은 자신이 나라를 통치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피라미드 앞에서 열린 축제에 나서 달려야 했다. 150야드(약 137m)의 트랙을 혼자서 달린다. 그리고 30년 뒤, 람세스 2세는 같은 거리를 다시 한번 달려야 했다. 자신이 여전히 생명력과 통치 능력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이후 3~4년에 한 번씩 람세스 2세의 ‘달리기 검증’은 계속됐다. 이집트에서 달리기란 종교적 의식, 군사적 행위, 신들과의 의사소통의 다른 말이었다.

고타스는 또 다른 예로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경기를 말한다. 1천 개 이상의 그리스 도시 국가 선수들이 모인 올림픽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종목은 단거리 경주였다. 이유는 단거리 경주에 참여한 선수들이 횃불을 들고 경기장을 달리기 때문이다. 제우스 제단에 불을 붙인다는 의미로 제왕 제우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위다.

토르 고타스의 <러닝-한 편의 세계사>

토르 고타스의 <러닝-한 편의 세계사>

여성도 달리기 역사에 뛰어든다. 허약하게 태어나면 일말의 동정도 없이 벼랑으로 아이를 내던졌던 나라 스파르타는 신체적 나약함을 국가적으로 경멸했다. 스파르타 여성은 7살이 되면 부모 품을 벗어나 강한 전사로 길러졌다. 스파르타의 어린 소녀들은 ‘드로모스’라 불리는 달리기 시합장에서 훈련을 받고 디오니소스 신에게 바쳐지는 경주에서 전력을 다해 달렸다.

다시 시대를 건너뛰어 근세 유럽으로. 앞서 19세기 오스트리아의 달리기 경주와 비슷한 예가 한 세기 앞선 18세기 독일에서도 보인다. 블레슬라우(현재는 폴란드 남서부 지방 도시 브로츠와프) 지역 신문에 실린 광고를 보자. “전령 구함.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빠르게 달릴 수 있고, 체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에 복장이 말끔하며, 행동거지가 단정한 젊은 전령을 구합니다. 위에 열거한 조건에 맞는 분이라면 누구든 이번달 28일 이전까지 크라츠카우 성으로 지원하십시오. 그곳에서 훌륭한 미래를 맞게 될 것입니다.”

전령은 귀족이나 영주들을 위해 전갈 등을 전달하며 ‘달리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었다. 전령은 직업상 여행 경험이 많고 식견이 넓은데다 무기력한 귀족들에 비해 튼튼하고 균형 잡힌 몸매를 가져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신분상으로는 ‘달리는 종복’에 불과했다. 직업 정신이 투철하던 전령들은 전갈의 빠른 전달을 자신의 명예라 생각해 몸을 혹사하는 바람에 상당수는 3~4년밖에 일을 못하고 요절했다.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달리기 문화사

이 밖에도 인도의 인간 대 코끼리의 경주, 무려 230리(약 90.3km)를 달리는 중국 원나라의 울트라마라톤 경주, 부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세상의 경계를 넘어 먼 곳을 향해 달리며 수련하는 일본 수도승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또한 바이킹과 북유럽의 영웅 전설에 실린 달리기 전통, 스포츠와 제국주의, 시대를 풍미한 ‘인간 기관차’들,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낯선 땅에서 육상선수로 살아가는 아프리카 젊은이들의 고단함 등 달리기와 관련한 세상의 모든 주제를 털어넣은 듯 고타스의 이야기는 달리고 달린다.

현재의 달리기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과 체육으로서 달리기라는 교육적 기능 두 가지로 읽힌다. 인간의 역사가 깊어갈수록 달리기 문화사도 몸을 불리며 풍성한 이야기들을 채워갈 것이다. 시간이 달리고 달려 우리 후세대는 2011년의 달리기, 예컨대 전세계적 건강 달리기나 마라톤 열풍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할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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