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날 보는 너의 그 마음을 이젠 떠나리, 연인도 아닌 그렇게 친구도 아닌 어색한 사이가 싫어져 나는 떠나리.” 1992년 그룹 ‘피노키오’의 1집 앨범 수록곡 가 라디오 전파를 탔을 때 수많은 청춘남녀가 “이건 내 얘기!”라며 탄식을 내뱉었다.
그로부터 11년이 흐른 2003년 ‘거미’는 헤어진 연인과 친구로라도 이어지고 싶다는 를 불렀다. “친구라도 될걸 그랬어. 모두 다 잊고서 다른 사람 만나는 널 보아도 슬프지 않게. 그저 바라보고 있었어, 한참 동안 니 옆에 그 사람까지도. 잠시라도 더 보려고. 다시 혹시라도 널 보게 되면 그땐 모르는 척해볼게, 웃어도 볼게 지금의 너처럼.”
그리고 6년이 흐른 2009년, 그룹 ‘2AM’은 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꽤 오래됐어, 내 맘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지. 내 손을 잡고 나밖에 없다며 나 같은 친구를 둔 게 정말 큰 축복이라며 변치 말자고 말을 할 때마다 조금씩 자라나는 내 사랑을 눌렀어. 친구로 지내야 한단 이유로 목까지 차올랐던 그 고백을 참아야 했어. 하지만 이제는 고백할게, 너를 사랑해.”
사랑보다 멀고 우정보다는 가까웠던 관계는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 친구라도 될걸 그랬다는 그 여자는 지금도 후회하고 있을까? 친구의 고백을 들은 그 여자는 뭐라고 답했을까?
사랑과 우정, 그 경계에 애매하게 존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애매한 관계는 ‘특별한 날’이 되면 더욱 움실댄다. 예컨대, 밸런타인데이 같은 날에.
밸런타인데이에 즈음해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경계남녀’의 이야기를 사례별로 알아봤다. 이들에게 필요한 조언은 최근 연애지침서 를 펴낸 연애칼럼니스트이자 파워블로거인 ‘라이너스’ 김종오씨에게 들어봤다.
친구가 고백했어요!A와 B는 대학 동기다. 대학교 2학년 때 동아리에서 만나 남녀 불문하고 친구 여럿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그렇게 MT도 가고 술도 마시면서 친하게 지낸 지 벌써 6년. 군대에 다녀오느라 취업이 늦었던 A는 최근 중소기업에 들어갔고, 여자인 B는 2년 전부터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도 취업에 유학에 하나둘 소원해졌지만 A와 B는 꾸준히 연락을 하며 지내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A는 B가 예뻐 보인다. 누구보다도 말이 잘 통하고 자신을 잘 이해해준다. B가 메신저에 없으면 신경이 쓰이고, 둘만 만나면 어쩐지 가슴이 두근대며, 자꾸 B와 연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 A는 B에게 마음을 들킬까 조심스럽다. B는 고민에 빠졌다. ‘고백했다가 차일지도 몰라. 아니야, 그래도 고백해볼까. 어색해져서 친구 사이마저 멀어지면 어쩌지.’
친구인 줄만 알았던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당황하지 않고 “그래? 나도 그래”라고 고백을 받아줄 만한 여자가 몇이나 있겠는가. 갑작스러운 고백은 위험하다. 암시와 복선이 중요하다. 친구 이상의 감정을 들키지 않는 것보다 감정을 ‘자연스럽게 들키는’ 방법이 필요하다. 친구의 경계를 살짝 뛰어넘는 친절과 배려를 보여주며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정도의 생각을 하게 만들면 훗날 고백에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천천히 자연스럽게 다가가라. 고백한 다음 친구에서 연인으로 ‘업그레이드’가 아닌 친구에서 평생친구로 ‘옆그레이드’가 될 수도 있어 망설여질지도 모른다. 어차피 고백에 성공해도 친구이고, 실패해도 평생친구다. 친구 이상을 바라면서도 자기 마음을 들킬까봐 친구라는 선을 확실하게 긋는 비겁한 행동을 하기보다 차라리 좋아한다고 표현해라. 상대에게 다른 사람이 생기는 걸 바라만 보며 가슴 아파하는 게 거절당하는 것보다 100배는 더 슬픈 일이니까.
B는 친구 A에게서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았다.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며칠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고민에 빠졌다. 소개팅을 간간이 하고는 있지만 대부분 지루하게 끝났다. B는 A를 오래 알아왔다. A가 착하고 성실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점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안다. 둘이 대화할 때는 호흡도 제법 척척 맞았다. 남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긴 하지만 고백을 받고 나니 A가 남자로 보인다. 취향부터 술버릇까지 하나하나 알아가야 하는 소개팅남보다는 A와 만나는 게 더 수월해 보이기도 한다. B는 A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연인이 된 A와 B. 그런데 막상 사귀고 나니 ‘이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사람 맞나’ 싶다. A는 기대만큼 ‘착한’ 남자가 아닌 것 같고, B는 기대만큼 ‘털털한’ 여자는 아닌 것 같다. A와 B 둘의 머릿속에는 똑같은 문구가 떠다닌다. ‘친구가 나을걸 그랬나?’
A와 B라는 사람은 친구일 때나 연인인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다. 친구와 연인은 각각의 관계에 대한 기대치가 다르다. 친구일 때는 상대에게 잘해줘야 한다는 의무가 없기에 약간의 친절에도 효과가 크게 느껴진다. 그런데 연인이 된 다음은 전혀 다르다. 친구일 때와 비슷한 친절은 당연한 것이 되고,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핀잔을 듣게 된다. 친구일 때는 연인일 때와 간섭의 수준이 다르다. 자상하고 쿨해 보였던 상대가 어느새 자신의 사생활을 간섭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럴 때는 두 사람이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 서로에게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 기대 수준을 낮추고 상대가 거리가 먼 친구가 아닌 가까운 연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하룻밤이 가른 친구 사이C와 D는 강남의 한 클럽에서 만났다. 클럽에서 만나 짧은 눈맞춤으로 하룻밤을 보냈다. 다시 연락을 하지 않는 게 보통인데, C와 D는 다음날에도 서로에 대해 생각했다. 며칠 뒤 새벽, D는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C에게 전화를 걸었고, C는 그 전화가 제법 반가웠다. 둘은 그렇게 한 달에 서너 번 정도 상대가 연락하면 밤에만 만나는 사이가 됐다. 두 달이 지났다. C는 낮에도 D가 보고 싶어졌다. D에게 “사귀어보는 건 어떠냐”고 넌지시 제안했다. D는 놀랐다. C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클럽에서 랜덤으로 만난 E는 남자친구가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그래도 생각보다 얘기도 잘 통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주잖아. 혹시 C가 이렇게 여러 여자들을 만나는 건 아닐까?’
E와 F는 직장 동료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던 회식 자리가 끝나고, 집이 같은 방향이라 타게 된 택시 안에서 업무에 대한 하소연을 하던 E와 F는 술김에 택시를 모텔로 돌렸다. 다음날 E와 F는 어색한 아침을 맞이했고, F는 실수라는 걸 직감했다. 모텔을 나오면서 F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별일 아니니까 넘어가자’는 문자도 보냈다. E에게서 ‘알았다’는 답장이 왔다. 그러나 막상 E는 생각이 달랐다. F에게 막연히 끌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F를 마주치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차갑게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F와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E는 F와의 관계를 이렇게 시작해도 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가끔 만나는 사이나 친구 사이에 ‘하룻밤’이 끼어드는 경우가 있다. ‘같이 잤으니 사귀어야 한다’거나 ‘어색해지니까 멀리해야 한다’는 건 정답이 될 수 없다. 애정이나 우정에서 시작했든 욕정에서 시작했든 결국 중요한 건 자신의 마음이다. 사귀고 싶을 만큼 호감을 갖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쿨하게 만난 사이인데 찌질해 보일지 모르니까’ 애써 호감을 감추거나, 마음도 없는데 그런 영양가 없는 관계를 계속하는 건 옳은 선택이 아니다. 지금까지 몸이 가는 대로 행동했으니, 이번엔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할 차례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됐는데, 그게 어떻게 시작됐든, 쿨하든 찌질하든 뭐가 문제인가.
친구는 되지 말걸 그랬어
G와 H는 2년을 사귀다가 권태기의 정점에서 헤어졌다. 내성적인 성격의 두 사람은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우린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 그냥 친구 정도로 지내는 건 어때?” “좋아.” 일로 만났고 여전히 일로 종종 부딪히는 사이인 G와 H는 이별 뒤에도 간간이 서로의 개인적인 얘기도 나누고 식사도 하는 ‘친구’가 됐다. 그렇다고 ‘완전한 친구’는 아니었다. G는 술을 마시면 불쑥 새벽에 H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럴 때마다 G와 H는 추억에 젖기도 하고 좋았던 날들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G는 H에게 호감을 갖는 남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순간 G는 이제야 H와의 이별 순간에 서 있는 듯 혼란스러워졌다. ‘H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면, 나는 어쩌지? 우리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연인으로 지내다가 친구로 남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혹여 실제 친구로 잘 지내는 이들이 있다고 해도 그건 한쪽에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친구로라도 상대의 곁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에 우정으로 상대를 붙들거나, 관계를 끊어내는 데 익숙지 않거나, 상대에게 여지를 남겨주는 ‘어장 관리’ 차원에서 친구가 된다. 겉으로는 “우린 친구야”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진짜 친구가 아니다. 문제는 ‘친구’라는 관계가 서로에게 ‘희망고문’이나 다름없다는 점이다. ‘다시 잘될지도 몰라’라는 기대 때문에 상대와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미 한 번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기도 쉽지 않고, 다시 만난다고 해도 같은 이유로 또 헤어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럴 바엔 차라리 다시 시작해보자고 솔직히 얘기하든지, 아니면 가짜 우정 따윈 버리고 깨끗이 돌아서라. 쿨하게 이별하기 위해 친구가 되는 이들도 있는데, 헤어지는 순간까지 쿨할 필요는 없다.‘그렇다면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우정인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리트머스시험지를 담그면 사랑인지 우정인지 바로 알 수 있는 용액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감정이라는 건 그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사랑과 우정을 구분할 수 있는 몇 가지 힌트는 찾아볼 수 있다. 지난주에 개봉한 영화 에서 몇 가지를 발견했다. 이 영화에는 앞에서 나열한 사례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남녀가 등장한다.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로 바쁘게 일하는 엠마(내털리 포트먼)는 14살 때 캠프에서 처음 친구로 만난 아담(애슈턴 커처)과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들의 우연한 만남은 하룻밤이 아닌 하루 ‘아침’으로 이어진다. 아담은 엠마에게 호감을 표시하지만 엠마는 진지한 연인 관계를 ‘땅콩 알레르기’에 비유하며 감정적 소모를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결국 둘은 성관계를 갖되 절대 ‘연인’은 아닌 ‘섹스 파트너’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기로 합의한다. 사랑과 우정에 대해 묻는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 어떤 감정적 애착도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았던 ‘섹스파트너십’은 조금씩 깨지고, 아담은 엠마에게 밸런타인데이에 데이트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첫 데이트 이후 펼쳐질 이야기는 각자의 예상에 맡겨두고 잠시 이 영화에서 둘이 ‘성관계를 갖지만 그냥 친구인’, 다시 말해 ‘섹스 파트너인 친구’로 합의하는 순간에 주목하자. 엠마는 아담에게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싸우지 않기, 거짓말하지 않기, 질투하지 않기, 아침 같이 먹지 않기, 침대에서 옷을 입은 채 껴안지 않기 등등. 이 조건은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는 단서를 제시한다. 뒤집어보자. 싸우고, 거짓말하고, 질투하고, 같이 아침을 먹고, 침대에서 옷을 입은 채 서로를 안고 있다면 그건 사랑이다. 만약 둘의 관계가 ‘진짜 우정’이라면 상대가 다른 이성을 만난다고 질투할 일도 없고, 서로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싸울 필요도 없다. 애써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이유 역시 없다. 게다가 옷을 입고 ‘백허그’를 하고 있다면 신체적 자극이 없어도 감정적으로 만족스럽다는 얘기고, 함께 밤을 보낸 다음 바로 각자 갈 길을 가지 않고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면 같이 보낸 지난 밤의 여운이 낮에도 이어진다는 의미다. 물론 이 영화 속 두 주인공 역시 ‘섹스 파트너인 친구가 되기 위한 조건’을 하나씩 깨버리며 연인으로 발전한다.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는 한 번쯤 데이트 신청을 해볼 수 있는 핑계를 주는 날이다. 감정의 리트머스시험지가 사랑으로 붉게 물들어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 넘어가고 싶은 이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밑밥을 부지런히 깔아놓고 데이트 신청을 해볼 일이다. 그렇다고 달달한 분위기에 휩쓸려 ‘완전한 우정’을 ‘애정’으로 둔갑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연애는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는 김종오씨의 마지막 충고도 잊지 말기를.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