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로 떠나는 날, 쿠스코에 온 뒤 처음으로 비가 내렸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는 쿠스코를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 보이는 집들의 옥상, 그 옥상 위에 잔뜩 걸린 빨래들. 남미의 특징 중 하나는 비가 억수같이 와도 절대 빨래를 걷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햇빛이 내리쬘 것이고 그럼 젖은 빨래도 다시 마를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해가 뜸을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린 우리가 다시 쿠스코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지대에는 광활한 티티카카(Titicaca) 호수가 있다. 멀리 수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이 호수는 바다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직접 보지 않고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폭가 무려 160km). 우리는 호수의 수많은 섬 중에서 잉카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던 태양의 섬(Isla del sol)에서 며칠 캠핑을 하며 보내기로 했다.
티티카카 호수에 암흑의 나날이 계속되던 때, 인티(Inti)라고도 불리는 태양 창조의 신 비라코차(Viracocha)가 태양에게 빛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이 섬의 작은 틈 사이로 태양이 떠올랐다. 그는 달과 별을 차례로 만들고 태평양을 걸어서 건넌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잉카의 전설에 따르면, 비라코차는 거지 모습을 하고 지구를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한다. 자연을 창조한 신을 우리 중 한 사람, 그것도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그들의 인간적인 신화에 나는 감동했다.
배를 타고 태양의 섬에 내리자 잉카인들이 만든 계단이 나왔다. 별로 높지 않은 계단을 오르는데도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해발 4천m에 있었고, 언제나 가볍다고 생각했던 나의 15kg짜리 배낭은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쿠스코에서의 긴 정착 생활이 남긴 부작용 탓도 있었다. 힘겹게 계단을 다 오르자 세 개의 물줄기가 나왔다. 아무리 극심한 가뭄에도 한 번도 마른 적 없다는 이 섬의 유일한 샘이었다. 쿠스코에서도 수돗물을 마셨던 우리는 이 지하수를 의심하지 않고 벌컥벌컥 마셨는데 주변의 외국인들은 물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뜨거운 태양과 높은 고도에 섬을 횡단하며 말라버린 내 입이 그렇게 많은 물을 원하게 될 줄 몰랐다. 나중에 우리는 서바이벌 정신으로 티티카카 호숫물을 마셔야 했다. 섬의 북쪽에 사는 사람들도 호숫물을 그대로 마셨다. 배탈과 엄청난 갈증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되는지는 그 상황에 있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신의 눈물이라는 생각으로 마신 결과 다행히 우리에게는 아무 탈도 없었다.
천천히 걸어온 탓에 이틀이 걸려 섬의 북쪽에 도착했다. 해의 발자국이라 불리는 흰 바위 옆에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된 잉카유적지 하나가 있었다. 잉카시대에 태양신을 만나러 온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였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강변에서 따뜻한 해를 온몸으로 받으며 아무 소리도 없는 완전한 고요를 경험했다. 그리고 나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받았다. 야망도 행위도 소리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오히려 삶의 충만함을 느낀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사실이다. 내가 깨닫지 못했던 진리를 몇만 년을 존재한 호수가 스승이 되어 알려주는 것 같았다.
밤이 되자 태양은 서쪽으로 떠나고 다시 거센 바람이 집을 찾아온 듯 섬으로 돌아왔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유적지 안에 텐트를 쳤는데 이곳에서의 하룻밤이 나에게는 그 어떤 고급 호텔에서의 하룻밤보다 더 의미 있었다. 잉카의 순례자들이 머물던 그곳에서 그들의 태양신 비라코차는 남루한 방랑자의 모습을 한 우리 안에 함께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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