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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이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경제사학자가 바라본 자본주의 경제사,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등록 2010-12-30 16:32 수정 2020-05-03 04:26
경제성장과 빈곤의 공존은 21세기 자본주의가 낳은 부조리한 경제 현상이다. 한겨레 이종근

경제성장과 빈곤의 공존은 21세기 자본주의가 낳은 부조리한 경제 현상이다. 한겨레 이종근

어제의 진리는 때로 오늘의 오류가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대개 현실은 이론을 앞지르고, 인간의 욕망은 공리(公理)의 허를 찌른다. 고 리영희 선생은 “상황이 달라지면, 지식인은 자기수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로버트 하일브로너(1919~2005)는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경제학자다.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1989년 에 실린 칼럼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배경이다. 소련 붕괴 전, 일흔 살 하일브로너의 글이다.

“공식적으로 (그 대결이) 시작된 지 75년도 안 되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은 종식됐다. 자본주의가 이겼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물질적 재원을 사회주의보다 더 만족스럽게 조직한다.”

변절 대신 ‘자기수정’으로 간주되는 까닭은 이런 입장 변화가 노학자가 줄곧 보여온 세계관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 그가 2005년 숨졌을 때 여러 부음은 ‘진실을 말하는 자’란 칭호를 헌사했다.

“자본주의는 사회 속에 스며든 관계”

(원제 ‘경제사회의 형성’, 미지북스 펴냄)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은 폴 새뮤얼슨의 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경제학서다. 그와 그의 스승 존 K. 갤브레이스가 공저한 책들은 어느 경제학자들의 공저물보다 많이 팔렸을 것으로 미국 출판계는 본다.

경제 입문서는 흔하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 경제사학자가 자본주의 경제사를 관통한 경우가 드물 뿐이다. 자본주의에 대해 누구보다 비판적이면서도, 어느 시점부터 자본주의에 절박히 기댈 수밖에 없는 학자는 그 딜레마를 객관과 통찰로 풀어간다.

물론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이 전제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자본주의 자체가 하나의 원리이거나 초역사적 과학이라기보다, 정치·종교·관습 등 사회적 기제와 연관해 선택되고 또한 변화한다고 본다. 이런 얘기다.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고유한 구조와 논리를 가지고 있지만 또한 다른 정치적으로 도덕적인 힘들에 의해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계속 진화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경제체제가 아니라, 사회 속에 스며든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 즉, 자본주의 자체의 역사적 변화를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저자 윌리엄 밀버그의 설명대로라면, 하일브로너는 현대의 경제이론 대부분을 비판했던 이다. “여러 자본주의 사회를 추동하는 사회적·심리적·도덕적 힘들의 풍성한 지평은 대단히 복합적이고 복잡한 것이다. 그런데 현대 경제이론은 이에 대한 해명의 문제를 대개 회피해버렸다고 (하일브로너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경제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하부 구조를 간파하지 못한 경제학은 죽은 ‘연구실 경제학’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심지어 도덕까지 변수로 자리한다. 한층 더 극적으로 구분해보면 ‘수요·공급의 법칙’이, 최근 칠레 광부 구조 사건에서 보듯, ‘칠레 광산의 수요·공급 법칙’으로 생생하게 변주될 수도 있는 셈이다.

는 이런 맥락과 태도로 창세 이래 자본주의의 형성·발전사를 살폈다고 간추릴 수 있다. 밀버그의 말마따나 “책의 목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조금씩 만들어왔던 물질적 생산과 분배를 둘러싼 극적인 사회적 힘들을 다시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것”이다. 초판이 1962년 나온 뒤 끊임없이 개작되고 ‘현재’를 추가해가며, 이젠 1판의 모습을 절반만 간직하게 된 배경일 것이다.

시공을 달리하며, 전통적 방식에 따라, 국가·집단의 명령에 따라, 시장에 따라 생산과 분배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 좇고, 시장 사회의 출연-산업혁명-대공황-자본주의 황금시대-사회주의의 몰락을 거쳐 신자유주의와 지구화까지 책은 단숨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21세기 자본주의의 탄착점을 보니, 여러 부조리한 경제 현상이 산재하고 저마다 올돌하다. 노동자의 임금은 계속 하락한 반면 기업의 이윤은 크게 오른 불평등, 지구화로 인해 한 나라의 경제가 세계적 문제가 된 공동 운명, 그러면서도 어제 가난한 나라가 오늘도 내일도 가난해야 하는 숙명 따위가 그것이다.

특히 자본주의적 욕망이 극대화한 미국은 한쪽 눈으론 경제성장, 한쪽 눈으론 빈곤을 직면해야 한다. 1989~94년 미국인 평균 가구 소득이 2천달러 이상 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5년 단위로 증감 추세를 살폈을 때 최초의 하락이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는 더더욱 낙관하기 어렵다.

유엔은 유럽·일본·러시아 등의 경제가 앞으로 50년 동안 크게 쇠퇴할 것이라고 했다. 10년 전 전망이다. 고령화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그러나 네덜란드·스웨덴·프랑스 등 많은 나라들이 이보다 더 심각한, 노동 가능 이민자층과 본 국민 사이의 갈등으로 시달리고 있다. 2006년 미국에 머물고 있는 불법 이민자는 11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경제적 힘을 길들일 정치적 수단의 부재

자본주의의 결락을 보완할 수 있는가. 가능성은 하일브리너가 ‘자기수정’했던 당초의 시선과 태도에서 다시 구해진다. “경제적 충동과 경제적 제도들에서 역사의 모든 원동력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이는 경제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자본주의가 앞으로 성공을 거둔다면 이는 그 경제적 여러 힘들을 길들일 정치적 의지와 정치적 수단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2010년 자본주의가 흔들리고 체제 아래 민중이 고통받는다면 ‘경제적 여러 힘들을 길들일 정치적 의지와 수단’을 모색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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