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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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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웃긴 개그맨

개그 빙하기에 ‘웃찾사 전용관’을 지키는 신인 개그맨들…

데뷔할 기회마저 줄어도 여전히 개그의 부활을 꿈꾸는 이유
등록 2010-12-22 11:16 수정 2020-05-03 04:26

흔해빠진 게 웃음이다. TV를 켜면 커다란 자막과 함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컴퓨터를 켜면 웃긴 얘기와 이미지가 ‘클릭질’을 유도한다. 휴대전화를 켜도, 라디오를 켜도 재미있는 이야기와 웃음이 넘쳐난다. 이렇게 많은 웃음 중에 딱 하나가 빠졌다.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웃음이다.
2003년 4월20일 첫 회를 시작한 SBS 개그 프로그램 (이하 )이 지난 10월2일 357회를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시청률 5.3%(TNmS 기준)을 기록한 357회 의 마지막은 지금까지 방송분의 하이라이트 장면과 자막이었다. “지난 8년 동안 대한민국이 웃는 그날까지 매주 새로운 아이디어로 여러분을 위해 달려온 웃음을 찾는 사람들, 이제 여러분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 합니다. 더 새로운 웃음을 가지고 더 기발한 재미를 가지고 다시 여러분께 돌아올 것을 약속합니다.” 7년하고도 6개월 동안 열심히 웃음을 찾으러 다녔던 그들은 이날을 마지막으로 웃음찾기를 멈춰야 했다.

폐지

개그 프로그램 (개그야, 웃찾사, 하땅사)

개그 프로그램 (개그야, 웃찾사, 하땅사)

개그 프로그램 폐지는 비단 SBS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방송도 지난해 9월 3년6개월 동안 방송됐던 를 폐지했고, 뒤이어 를 신설했지만 이 프로그램 역시 7개월 뒤에 사라졌다. 지난 7월 일요일 오전 시간에 ‘웃음 버라이어티’를 내세워 신설한 는 3개월 만에 문을 닫았고, 지금은 수요일 밤 시간에 을 내보내고 있다. 개그맨 정형돈과 가수 호란이 진행하는 은 매회 아이돌 그룹과 가수를 손님으로 초대해 코너를 진행하는 형식이다. ‘개그쇼’를 표방하지만 개그맨보다 가수나 버라이어티쇼 진행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방송 3사 중에 개그 프로그램의 명맥을 이어가는 건 한국방송이 유일하다. 와 는 각각 토요일 저녁 시간대와 밤 시간대에 자리를 잡고 순항 중이다. ‘국가대표 개그 프로그램’인 는 시청률 15~20%대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폭발력이 예전 같지는 않다.

요즘 개그 시장은 어느 해보다 지독한 혹한기를 보내고 있다. 최대 피해자이자 희생양은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공개코미디 무대에 서서 시청자에게 자신의 개그를 맘껏 선보일 기회조차 갖지 못한 개그맨 지망생들이다. 서울 대학로 공연장에서 여전히 웃음을 찾고 있는 이들에게 이번 겨울은 어떤 계절일까? 수은주가 영하 10℃까지 떨어진 지난 12월14일 대학로의 한 빌딩 지하 1층에 위치한 ‘웃찾사 전용관’을 찾았다.

이 공연장에서는 평일에 매일 세 차례씩, 주말에는 네 차례씩 개그 공연이 열린다. 공연장을 운영하는 이앤티팩토리 소속 개그맨들은 평일에는 오후 1시께 출근한다. 30분 정도 공연장을 정리하고 점심을 먹고 나면 오후 2시. 이때부터 공연 준비에 들어가 3시30분에 첫 공연을 시작한다. 오후 2시, 공연 전에 제법 여유가 있는 이 시간에 무대 앞 객석 의자에서 김다혜(27)·권주연(22)·김범준(27)·김원구(28)·박병규(27)·박경림(24)씨 등 6명의 개그맨, 또 개그맨 지망생들과 마주 앉았다.

첫 번째 질문을 채 던지지도 않았는데 “너무 불쌍하게 다루진 말아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가 막을 내린 뒤 여러 매체에서 이들을 주목했다. 그 시선은 한결같았다. 요약하자면 ‘이제 뭐 먹고 살래?’ 정도다. 틀린 말은 아니다. 6명 중에 김다혜·박병규·김원구·김범준씨는 극장 오디션을 통해 이 공연장에 들어온 지 2년6개월 정도가 지났다. 권주연씨는 1년, 박경림씨는 한 달 정도 보낸 막내다. 이들이 막 개그 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바로 그때부터 개그 시장은 침체에 들어갔다. “ 폐지설이 나온 지는 2년쯤 된 것 같아요. 실제 시청률이 떨어지기 시작한 건 3년 전부터였고요. 하향세를 쭉 지켜봤죠. ‘웅이 아버지’ 이후 에서 대박이라고 할 만한 코너가 나오지 못했어요.”

동료들도 대학로를 뜨고
이앤티팩토리 소속 개그맨들이 대학로 웃찾사 전용관에서 공연 리허설을 하고 있다.한겨레21 정용일

이앤티팩토리 소속 개그맨들이 대학로 웃찾사 전용관에서 공연 리허설을 하고 있다.한겨레21 정용일

프로그램 시청률이 떨어지면서 개그맨들을 길러내고 코너를 시험하는 ‘테스트베드’나 다름없던 대학로 공연장 역시 썰렁해졌다. 평일 공연에는 관객이 3~4줄 정도에 그친다. 프로그램이 없어지고 나니 새로운 코너도 나오지 않는다. 행사 등 외부 활동은 절반 가까이 줄었다. 이들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건 관객이나 행사가 줄어드는 것보다 함께 개그를 하던 동료들과의 이별이다. “개그를 좋아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났어요. 떠나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더라고요. 동기애도 예전 같지 않아요. 극장에 들어오는 후배들도 줄었죠. 어차피 개그를 시작할 때부터 금전적인 걸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입이 줄어드는 건 상관없어요. 그것보다 떠나는 이들이 많다는 게 더 아쉬워요.”

이들 중에 무대에 올라본 이들은 김다혜씨와 김원구씨 둘뿐이다. 나머지 5명은 대학로 극장 공연을 꾸준히 하고 있지만 방송에 얼굴을 내민 적은 없다. 방송에 나와야 ‘데뷔’로 치니까 이들 중 4명은 실제 데뷔도 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프로그램은 폐지되고 동료들도 떠나고 데뷔는 요원한데 아직 대학로를 지키는 이유는 뭘까? “꿈이 있으니까요.”(김원구) “무대가 좋아서요.”(김범준) “2년6개월 동안 고생만 했는데 뭐라도 하고 나가야죠. (웃음) 지금 나가면 후회할 거예요.”(김다혜)

6명 모두 누구보다 개그를 사랑하고 어디에 내놓아도 웃기는 데에는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심형래를 보고 자란 김다혜씨는 영구 분장을 하는 그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웬만한 웃음에는 면역이 돼 ‘야한 얘기’ 아니면 잘 웃지 않고, 예쁘지도 않고 못생기지도 않아 외모로 웃길 수 있는 ‘자원’이 없는 게 아쉽기만 한 그이지만, 여전히 자기만의 캐릭터를 찾고 있다. 코너 하나로 뜨는 대박을 꿈꾸기보다 ‘가늘고 길게’ 가서 많은 사람들을 웃길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김원구씨는 웃음이 헤프다. 3년 가까이 개그를 하고 있지만 지금도 모든 게 재미있다. 특히 좋아하는 건 ‘맨손으로 북경 오리를 때려잡고 떡볶이를 철근같이 씹어먹으며 마을버스 2-1에서 뛰어내린’ 육봉달식 개그다.

스스로를 ‘개그 오타쿠’라고 소개하는 박병규씨는 화면에서 스쳐 지나가는 개그맨 이름까지 외우던 개그 마니아였다. 그러다가 ‘내가 좋아하는 걸 하자’는 마음으로 개그를 시작했다. 지금은 무대에 서면 “예쁜 여자들이 호응해줘서” 개그가 더 좋아졌다. 개그 역시 ‘가장 잘하는 걸 하자’가 목표다. 그의 장기는 10~20대가 좋아하는 4차원 개그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도드라지는 김범준씨Red는 자기만의 개그 색깔이 있는 개그팀 ‘옹달샘’(유세윤·장동민·유상무)의 개그를 좋아하고, 그가 하고 싶은 개그 역시 캐릭터가 뚜렷한 개그다. 그냥 할아버지가 아니라 독특한 습관이나 특징이 있는 할아버지 캐릭터 등을 연구한다. 권주연씨는 매주 기대하게 만들었던 조혜련·서경석의 ‘울 엄마’ 코너를 보면서 개그우먼을 꿈꿨다.

“제작진 개입이 침체의 원인”

자기가 좋아하는 개그 얘기를 하다가 웃고 떠드는 이들과 ‘불쌍한’이라는 형용사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이들은 가 폐지되기 전에도 개그를 좋아했고 폐지된 지금도 개그를 좋아한다. 긴 무명 생활을 거치고 좋은 개그맨이 된 이들을 보면서 꿈을 버리지 않고, 5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자신의 개그가 상승세를 탈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면서 희망을 가진다. 그렇지만 이들이 여전히 꿈을 버리지 않는다고 해서 ‘어쨌든 해피엔딩’이라고 마무리하기에는 개그 시장을 둘러싼 상황이 희망적이지는 않다.

개그 프로그램의 빈자리는 아이돌 가수가 출연하는 버라이어티로 채워졌다. 개그맨이 출연한다고 해도 얼굴이 알려진 이들이 전부고, 그들 역시 아이돌 가수나 전문 진행자를 보조하는 데 그친다. 웃음은 개그에서 버라이어티로, 개그맨에서 아이돌 스타로 옮겨갔다. 아이돌 그룹 위주의 기형적인 연예계 구조도 문제이지만, 공개코미디 위주의 개그 자체가 웃음을 놓친 것도 이러한 지각변동의 중요한 이유다.

이들은 공개코미디와 개그 프로그램이 시청자를 잃어버린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싫증난 거죠. 비슷한 형식의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반복해왔으니까요. 시청자는 항상 새로운 개그를 원하는데 변화를 줘야 하는 때를 놓쳐버렸어요. 개그맨이 직접 개그를 만들기보다 제작진의 개입이 많아진 것도 한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개그맨이 하고 싶은 걸 못하니까 과감한 시도를 못하게 되죠. 점점 복잡해지는 심의 규정도 새로운 개그를 만드는 데 큰 장애물이에요. 모자란 바보 개그는 장애인을 비하한다고 안 되고, 종교를 다뤄도 안 되고, 더러운 거나 성적인 것도 안 돼요. 시끄러운 것도 안 되고 때리는 것도 안 되죠. 유일한 돌파구는 공감대를 이끌어가는 개그인데,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잖아요. 남녀차를 다루는 공감개그도 이미 포화상태예요. 게다가 공개코미디는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밖에 사용하지 못하니까 그만큼 제약도 많아요. 결국 공개코미디가 재미없어지고 시청률도 떨어지는 거죠.”

공개코미디 형식의 개그 프로그램이 이런 악순환 속에서 뒤처지는 사이 쇼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놀랄 만한 속도로 성장했다. 특히 대본을 최소화하고 실제 상황과 재치 있는 애드리브로 프로그램을 이어가는 ‘리얼 버라이어티’는 즉흥성이라는 새로운 웃음 코드를 잡아냈다.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TV만 틀면 나오는데도 여전히 인기 있다. 게다가 시청률을 보장하는 아이돌 스타의 참여도가 높아지면서 관심은 더 커졌다. 개그맨들이 담당해오던 ‘웃기는 자리’는 대부분 버라이어티쇼의 진행자나 아이돌 그룹의 스타들이 차지했다.

개그만이 주는 웃음 있어
웃찾사

웃찾사

이들에게 물었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더 재미있는데 왜 굳이 공개코미디 같은 개그 프로그램이 필요하느냐고. “개그만이 줄 수 있는 웃음이 있으니까요. 가볍게 웃을 수 있어요. 버라이어티가 일상생활에서 웃음을 이끌어낸다면 개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웃음을 만들죠.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어요. 잘 짜인 극과 좋은 연기가 더해진 개그가 주는 쾌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이나 같은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주는 웃음과 개그 프로그램이 주는 웃음은 내용 면에서 엄연히 다르다. 전자가 우연과 재치, 순발력으로 만들어내는 웃음이라면 후자는 기발함과 짜임새, 연기로 만들어내는 웃음이다. 전자가 요즘의 웃음 트렌드에 맞는 건 사실이지만, 후자 역시 즐기는 이들이 있고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다. 대중문화평론가 이명석씨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같은 애드리브의 재미는 덜할지 몰라도 새로운 극과 상황을 설정하고 유지해나가는 개그 프로그램만의 재미가 있다”며 “공개코미디 형식의 개그는 사라질 운명이라기보다 장르로 정착할 만한 형식”이라고 말했다. 또 “개그맨에게 웃길 수 있는 소재의 자유를 주면 충분히 돌파구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SBS는 지난 12월16일 개그 프로그램 (가제)을 파일럿으로 제작한다고 밝혔다. 가 없어지고 두 달 만에 들려온 희소식이다. 형식은 처럼 공개코미디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아이돌 스타가 대거 출연한다는 점이다. 이 프로그램을 연출하는 백정렬 PD는 “일시 중지된 개그 프로그램의 부활 시도로, 개그맨뿐 아니라 아이돌 스타에게도 개그의 문을 넓히는 새로운 형식의 프로그램을 기획했다”며 “현실성 있는 상황과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코너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17일 파일럿 프로그램 녹화를 하고 이달 중에 방송될 예정이다. 정규 프로그램이 될지는 그 이후에 정해진다. 은 아이돌 스타가 참여하는 만큼 개그맨들 입장에서는 반쪽짜리 개그 프로그램이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게 여러 개그맨들의 반응이다. 아이돌 스타를 향한 관심을 등에 업고 공개코미디 등 개그 프로그램이 다시 한번 도약을 꿈꾸는 기회가 될 수 있으니까.

개그의 기초를 닦는 초등학교

대학로에서 만난 이들과 나눴던 대화 중 ‘초등학교론’이 있다.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던 이들이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를 졸업한 다음에 인재가 되는 거잖아요. 개그는 예능의 기초예요. 지금 스타가 된 수많은 이들이 개그맨 출신이잖아요. 개그 프로그램을 없애는 건 초등학교를 없애는 것과 똑같아요.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고 초등학교를 없애지는 않잖아요? 반짝 뜨는 연예인보다 개그를 통해 오랫동안 갈고닦은 이들이 결국 더 좋은 웃음을 전할 수 있는데 말이에요.”(김원구) “지금은 그럼 폐교가 된 건가?” “아니지. 아직은 분교야, 학생 몇 명 없는 분교!”(웃음) “오~, 근데 초등학교 얘기 괜찮다. 나도 어디 가서 써먹어야지!”(참고로, 이들에겐 미리 얘기했다. 내가 먼저 기사에 써먹겠다고.)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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