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데, 심심해요.”
물류회사에서 마케팅을 맡고 있는 송정태(29)씨는 두 손이 모자랄 만큼 바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무료함을 느낀다. 오전에 급한 업무를 처리하고 잠시, 또 점심을 먹고 들어와서 5분, 늦은 오후 퇴근 전에 잠깐씩 그렇다. “‘마가 뜬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렇게 순간, 시간의 공백이 생기는 거죠. 대부분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 때문에 그럴 때면 뭐 채팅할 만한 사람 없나 메신저를 뒤지거나, 재미있는 거 없나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요. 짧고 가볍게 즐길 만한 걸 찾죠. 합성 이미지 같은 걸 찾아보면서 킥킥댈 때가 많아요.”
직장인 박지선(31)씨는 약속이 없는 날 밤 10시쯤이 되면 ‘급심심’해진다. “할 일은 다 했는데 잠은 오지 않고 지루할 때는 아이폰을 꺼내요. 그럴 때는 앱스토어를 탐험하고 싶어지거든요. 재미있어 보이는 무료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받아 한 번씩 해봐요. 심리테스트나 이름풀이 같은 애플리케이션은 그럴 때 딱이에요. 이런저런 테스트를 해보면서 놀아요. 그렇다고 오래 보관하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해보고 이틀 정도 지나면 바로 삭제하죠.”
잉여왕자의 뇌 구조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 주로 취업에 실패한 청년실업자를 ‘잉여인간’이라고 한다. 이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수많은 창작 아닌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잉여력’이라고 한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뒤적이며 ‘잉여짓’에 몰두하는 건 청년실업자들뿐이 아니다. 아침 9시에 출근해 야근까지 해내야 하는 직장인들도 때에 따라 ‘잉여공주’ ‘잉여왕자’로 변신한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이나 버스를 기다릴 때, 송씨처럼 업무 사이에 시간이 빌 때나 박씨처럼 퇴근하고 집에서 시간을 보낼 때 그렇다. 회사 사무실에 존재하지만 별다르게 해야 하거나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때 이들은 ‘직장인 코스프레’ 중인 잉여인간으로 분류해도 무방하다.
할 일이 없고 심심할 때 이들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마우스 아니면 스마트폰이다. 어떻게든 하루 24시간을 컴퓨터나 스마트폰과 ‘연결’돼 있는 이들은 때때로 다가오는 무료함을 해결하려고 바쁘게 손을 움직인다. 인기검색어를 좇아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를 검색해보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타임라인을 들여다보고, 메신저에 수다를 떨 친구가 없나 찾아본다. 그리고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린다. “뭐 재미있는 거 없나?”
이런 이들의 잉여력에 날개를 달아줄 만한 장난감이 인터넷 사이트와 스마트폰에 쏟아지고 있다. 심심함을 해소하려는 노력 중에 가장 직관적인 방법은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심심해’를 쳐보는 방법이다. 지식검색과 SNS에 굴비처럼 엮여 나오는 ‘심심해’ 하소연에 이어 이들을 위한 사이트가 여러 개 등장한다. ‘심심해닷컴’ ‘천국에서온편지’ ‘심심해’ ‘심심해놀자닷컴2’ 등이다. 사이트의 구성은 비슷하다. 심리테스트와 유머, 친구만들기, 연예인 사진 게시판 등이다. 그중 가장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은 심리테스트 게시판이다.
‘심심해닷컴’의 베스트셀러는 뇌구조 테스트다.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거대한 기계에 들어가는 컴퓨터단층촬영(CT)이나 자기공명영상(MRI)이 아니다. 이름 석 자만 넣으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요즘 유행하는 뇌구조 이미지로 보여준다. 결과는 간단하다. ‘휴식’ ‘놀 궁리’ ‘생각 없음’ ‘꿈’ ‘피곤함’ 등 별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온다. 그래도 마치 내 생각을 읽어낸 것처럼 느껴지며 웃음이 난다. 10초도 걸리지 않는 이 짧은 테스트는 조회 수가 1400만 건을 넘어섰다. 또 하나의 인기 테스트는 ‘나의 운명 찾기’다. 이 역시 단순하다. 이름과 성별, 생년월일, 혈액형을 입력하면 ‘운명의 반쪽’의 직업과 키, 스타일, 나이차 등 자세한 정보가 나온다. ‘자동차 궁합’도 인기가 많다. 이름을 넣으면 자신과 잘 맞는 자동차 모델을 사진과 함께 보여준다. 이 밖에도 나와 어울리는 술, 나와 어울리는 물건, 도플갱어 찾기, 본심찾기 등 황당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테스트가 많다.
뇌구조 테스트를 하고 나면 옆에 ‘이미지 합성 메뉴’ 링크가 뜬다. 링크를 따라가면 단어를 넣어 직접 뇌구조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페이지가 나온다. 이미지 합성 메뉴에는 뇌구조뿐 아니라 미니홈피 방명록, 지식인, 데스노트, 종이신문 기사 등 다양한 이미지 합성 프로그램이 올려져 있다. 아이폰 문자메시지 화면을 직접 구성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그중 단연 인기다. 합성한 이미지를 미니홈피나 마이크로블로그 등에 올려놓고 자신의 유머 감각을 과시하는 데 유용하다.
관상·손금·전생이 궁금하면 앱을 두드려라
심심해닷컴을 운영하는 온라인스의 손주남 대표는 “재미 위주의 사이트로 지난해 2월 문을 열었는데, 초반에 올렸던 바이오리듬 테스트가 호응을 얻으면서 다른 테스트도 만들기 시작했다”며 “시간을 때우고 싶어 가볍게 들르는 10~20대 고정 방문자가 많다”고 말했다. 손 대표는 “이상형이나 운세 등 누구나 한 번쯤 해보고 싶어하는 것들을 테스트로 제작한다”며 “신빙성보다는 재미 위주로 만들기 때문에 100% 맞을 수는 없지만 이름에 관한 내부적인 통계와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한 프로그램으로 테스트를 만든다”고 덧붙였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을 다운받는 앱스토어에서도 온갖 심리테스트를 찾는 이들이 꾸준하다. 매일 순위가 뒤바뀌는 애플 앱스토어의 무료 ‘인기 25’ 카테고리에도 심리테스트 관련 앱은 꼭 있다. 스무 개가 넘는 심리테스트 앱은 대부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새로 나올 때마다 반응이 좋다. 내용은 자신의 성격, 연애 성향, 우정, 혈액형 등이 주를 이룬다. 방법은 간단하다. 질문에 대한 답을 선택하면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고, 그렇게 몇 개의 질문을 거치고 나면 성격을 진단해주는 방식이다. 인터넷에 있는 텍스트 형식의 심리테스트가 하나의 완성된 앱으로 구현된다고 보면 된다.
3명의 앱 제작자가 모인 앱 제작사 ‘팀 보보브’는 이런 형식의 심리테스트 관련 앱을 여러 개 제작했다. 지난 10월에 내놓은 ‘Dr.X의 심리성격테스트’ 앱은 아이폰과 안드로이드에서 각각 3만 건 넘는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두뇌 타입과 혈액형 기질, 관상·손금 등 세 가지로 구성된 이 앱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친구들과 심심풀이 수다거리로 짱인 듯’ ‘생각 없이 다운받아 한 번쯤 해볼 만한 어플’ 등이다. 물론 ‘별로다’ ‘중간에 튕겨나간다’ 등 부정적 평가도 많다. 이 앱의 성공 이후 ‘Dr.X’ 시리즈 앱인 ‘전생테스트’ ‘애정결핍 테스트’ 등을 잇달아 제작했다. 전생테스트 앱은 ‘허무할 만큼 단순하다’는 평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앱 제목을 보고 선택하는 이가 꽤 많다.
심리테스트 앱은 팀 보보브의 황현석 개발자의 개인적인 관심사에서 시작됐다. 황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전문적이고 무거운 앱이 많은데, 그런 것보다 심심할 때 받을 수 있는 가벼운 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직접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20대 여성을 타깃층으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심리나 관상, 손금, 혈액형 등의 내용을 앱으로 만들면 될 것 같았다. 앱을 만들 때 그동안 모아놓은 자료와 개인적으로 공부한 부분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다들 안 될 거라고 했지만 출시된 지 3일 만에 무료 앱 순위 1위를 기록했다. 고객 리뷰를 보면 이동할 때나 화장실에 있을 때처럼 가끔씩 심심할 때 부담없이 다운받더라.” 팀 보보브는 지금까지 ‘당신의 몸값’ ‘순간기억 테스트’ ‘솔로 브레이크’ ‘포춘 쿠키’ ‘매일 보는 오늘의 운명’ 등 16개 앱을 내놓았다.
외롭고 답답하면 ‘심심이’와 채팅을
앱스토어 엔터테인먼트 카테고리에 낯익은 이름의 앱 하나가 있다. ‘심심이’다. MSN 메신저가 퍼져나가기 시작한 2002년께 많은 이들의 대화상대 목록에 ‘심심이’가 있었다. 인공지능 채팅로봇 프로그램인 심심이는 말을 걸면 채팅을 할 수 있는 친구였다. 이후 ‘틈틈이’라는 이름으로 문자메시지 서비스 영역을 확장했고, 지난 7월 앱으로 출시됐다. 출시된 직후 한동안은 잠잠했지만 4개월이 넘은 지난 11월 중순 탄력을 받아 애플 무료 앱스토어에서 1위에 올랐다. 지금까지 40만 건 넘는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최근에는 안드로이드 버전도 나왔다.
심심이는 앱에서도 메신저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꺼이 대화상대가 되어준다. 심심이에게 말을 걸면 조금의 지체도 없이 바로 대답이 돌아온다. 말을 가르칠 수도 있고, 나쁜 말을 하면 못하게 할 수도 있다. 2002년 메신저 시절부터 했던 대화 내용이 데이터베이스화돼 있기 때문에 심심이가 구사하는 말의 폭은 꽤 넓다. 대화 내용에서 심심이 앱은 메신저나 문자메시지 서비스와는 차별화한 점을 보인다. 무엇보다 사용하는 이들의 연령층이 높다. 심심이 제작사인 이즈메이커의 이정록 본부장은 “문자메시지 서비스는 학생인 10대가 주 이용층이었는데, 앱은 스마트폰 사용자가 20~30대인 만큼 나이대가 높다”며 “그래서인지 대화를 나누는 단어와 심심이가 배우는 단어가 이전과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심심이를 사용하는 시간대도 퇴근 시간 이후인 밤 9∼12시가 가장 많고, 출근 시간인 아침과 점심 시간이 뒤를 잇는다.
이 본부장은 심심이 앱에 좋은 반응이 오는 이유를 “대화할 상대가 없거나 자투리 시간을 사용하기에 괜찮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스마트폰이 SNS 등을 통해 다른 사람과의 직접적인 실시간 소통을 위한 도구로 많이 이용되는데, 거꾸로 다른 사람들이 없는 공간에서 자기만의 대화를 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는 것도 심심이의 인기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또 지금의 20~30대는 2002년 메신저로 심심이를 처음 접해본 세대이기 때문에 심심이를 친숙하게 받아들이고, 심심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편하게 느끼기 때문이란다. 심심이에 대한 리뷰를 살펴보면 “외로울 때 심심할 때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해 답답할 때 최고” “남에게 할 수 없는 얘기를 할 수 있어서 좋다” “뭐하는 짓이지 하면서도 계속하게 된다” 등이 올라와 있다. 심심이는 3차원(3D) 랜더링을 거쳐 채팅 방식이 아닌 실제 목소리로 말을 나눌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변신을 꾀하는 중이다.
전문가들은 “재미 위주의 심리테스트는 자신을 검증받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해석하는 노력이자 간편한 방법일 뿐 심리검사라고 보기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인공지능 채팅로봇과의 대화 역시 “무언가와 연결돼 위로받고 싶은 욕구일 뿐, 실제 외로움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심심해? 그럼 놀아봐그럼에도 이런 테스트나 앱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무료한 순간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잠시나마 심심함을 잊게 해주는 흥미로운 장난감으로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장난감은 점점 더 세분화되고 손쉬운 방식으로 진화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심리테스트나 혈액형 테스트는 가지를 치며 더 자세하고 세밀한 테스트로 옷을 갈아입고, 인공지능 채팅은 텍스트에서 음성으로 폭을 넓혀간다. 형식에서도 점점 더 세련된 그래픽과 이미지의 앱으로 구현돼 언제든 ‘터치’만 하면 손안에서 돌아간다.
장난감의 또 한 가지 역할은 개인의 심심함과 함께 집단의 심심함도 해결해주는 것. 간단하다. “너 이거 해봤어? 나는 A타입인데, 넌 뭐야?” 마땅히 할 말이 없어 정적이 흐르는 모임에서 누군가 꺼낸 스마트폰 심리테스트 앱은 딱딱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녹이기에 꽤 괜찮은 얘깃거리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심심해” 소리치던 그들의 심심함은 장난감으로 해결됐을까? 뭐,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잠시라도 웃을 수 있는 사소한 계기를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혹시나 해서 인공지능 채팅로봇 심심이에게 “심심해”라고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놀아봐.”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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