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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짚고 공책 든 구보씨 따라 걷기



서울문학산책 ① 1934년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온 ‘광교에서 서울역까지’
등록 2010-10-06 16:56 수정 2020-05-03 04:26
전세계 문인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쓴 (Stay)에, 소설가 김영하가 서울에 관해 쓴 글의 제목은 ‘단기 기억 상실증’이다. “만약 도시를 치료하는 의사가 있다면 서울에는 아마 이런 진단을 내렸을 것이다. 단기 기억 상실증. 마치 알츠하이머병 환자처럼 서울은 현재로부터 가까운 기억부터 점차 잃어버리는 질병을 앓고 있거나, 혹은 그런 척하고 있다.” 가끔 우리는 기억상실을 극복하려 애쓰는 소설을 만난다. 주인공이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시킬 수 없어서 자신의 몸에다 기억해야 할 일을 문자로 새겨넣는 영화 처럼, 그런 소설의 글귀는 도시의 육체에 새겨넣는 문신과 비슷하다. 도시의 기억을 보존하려고 하는 소설의 안간힘, 몇 번의 연재로 그 안간힘을 좇아가보려 한다. 서울을 그린 소설로 걷기 코스를 만들어서 실제로 그 문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때는 또 바야흐로 가을이다. 책 읽기 좋고, 걸어다니기 좋다. 편집자
서울문학산책 ① 1934년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온 ‘광교에서 서울역까지’

서울문학산책 ① 1934년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온 ‘광교에서 서울역까지’

구보는 스물여섯 살인데도 장가를 가지 않았다. 직업도 딱히 없고 버는 돈도 시원찮지만, ‘가지 못했다’보다 ‘가지 않았다’ 쪽이다. 어머니에게는 “그 애(지난해 여름에 만난 색시)면 저두 싫다구는 않겠지” 짐작하는, 빠질 것 없는 자식이다. “보통학교만 졸업하고도, 고등학교만 나오고도, 회사에서 관청에서 일들만 잘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또 동경엘 건너가 공부하고 온 내 아들이, 구하여도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긴 하지만 말이다. 그 아들은 낮에 집을 나서 늦은 밤이 돼서나 들어온다. 어머니는 자리도 펴지 않고 맨바닥에 누워 아들을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곤 한다. 은 어머니 걱정도 아랑곳없이 이 구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를 알려주는 단편소설이다.

구보는 박태원의 호다. 1909년생 박태원은 글이 쓰인 1934년에 역시 스물여섯이었다. 도쿄에 건너가 공부하고 글을 쓰며 살았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일본 호세이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2년 만에 중퇴한다. 서울로 돌아와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유정, 정지용, 김기림 등과 함께 ‘구인회’ 활동을 했다. 6·25 전쟁 뒤 월북했고 북에서 등을 썼다. 1986년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1988년에야 그의 이름이 해금돼 남한 국문학사에서 떳떳하게 불리게 되었다.

은 ‘고현학’(考現學)에 입각해 모더니즘 소설의 경지를 개척한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고현학이란 고고학(考古學)의 반대쪽에 있는 말이다. 고고학이 과거 유물을 통해 그 시대를 재현해내는 것이라면, 고현학이란 현대를 들여다보고 시대를 대변하는 것이다. 응용하자면, 고현학으로 재현한 구보의 일상은 76년이 지나 고고학이 된다. 충실한 고현학이 고고학의 중요한 재료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소설은 박태원의 개인사와 소설사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둔다.

구보는 낮 12시께 집을 나와 새벽 2시까지 경성 시내 곳곳을 들른다. 조이담이 계산하 바에 따르면, 도보 이동 거리는 9.6km, 전차 이동 거리는 5.7km로 총 15.3km다. 14시간 동안 움직였으니 시속 1.1km에 조금 못 미친다. 그의 산보는 물속에 뜬 꽃가루의 브라운운동처럼 목적이 없다. 경성역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두 개의 찻집을 두 번씩 들른다. 집에서 출발해 집 부근을 지나쳐 가기도 한다. 구보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새벽에 지하철이 끊겨 집에 도착해 피곤한 몸을 눕히기 곤란하다. 문학산책 코스는 지난해 박태원 탄생 100년을 맞아 구보학회가 개최한 ‘구보 따라 걷기’의 코스를 따른다. 광교에서 서울역까지다.

구보의 집-광교 다옥정 7번지

“구보는 집을 나와 천변 길을 광교로 항하여 걸어가며, 어머니에게 단 한마디 ‘네’ 하고 대답 못했던 것을 뉘우쳐본다.”

집을 나올 때 그의 행색은 한 손엔 단장을 짚고 다른 한 손엔 공책을 들고 있다. 아랫주머니에는 전차 타고 차 마실 돈이 들었을 테고, 윗주머니에는 만년필도 꽂혀 있을 것이다. 머리 꼭대기를 일자로 자른 ‘갓빠 머리’의 구보는 ‘댄디’했다. 나팔바지를 입는 ‘모던보이’보다 점잖은 서울 멋쟁이였다. 그가 멋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집이 약국을 한 자산가인 덕이 크다.

박태원의 집은 다옥정 7번지로 현재의 광교 가까이에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어 형 부부가 공애당약방을 운영했다. 담을 맞댄 옆집(길에서 보면 옆옆집)은 숙부가 하는 공애의원이었다. 조이담에 따르면, 청계천의 물길 폭이 넓어지고 정비되면서 그의 집은 청계천과 도로에 포함돼버렸다. 현재 위치상으로는 한국관광공사와 LG다동빌딩 사이다.

부유하기도 하였으나, 약 가까이 사는 탓에 ‘건강염려증’, 혹은 신경쇠약이 걱정되기도 한다. 초장부터 그는 그에게는 효험 없다는 ‘삼비스이’(3B水) 처방을 외우고 자신이 만성의 ‘중이가답아’(中耳加答兒)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질적인 피로와 고독, 권태, 우울감을 지녔다.

“그는 갑자기 걸음을 걷기로 한다. 그렇게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것의 무의미함을 새삼스러이 깨달은 까닭이다.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는다.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 아무런 사무도 갖지 않는다. 처음에 그가 아무렇게나 내어놓았던 바른발이 공교롭게도 왼편으로 쏠렸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발걸음은 정처 없다. 그리고 “동경 유학 기간을 제외하고는 내내 청계천변에서 살았던 박태원을 생각한다면, 그가 그날 돌아다닌 모든 곳들은 전혀 새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소설에 그렇게 많은 지명이 나오면서도 그가 실상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은 일단 이에서 연유한다.”(채호석)

구보가 걸었던 경성. 1 화신상회(종로타워) 2 제비다방 3 경성부청(시청) 4 낙랑파라 5 남대문 6 엔젤카페 7 일본생명 8 조선은행(한국은행) 9 조선총독부(경복궁) 10 종로서(제일은행 본점) 11 조선호텔

구보가 걸었던 경성. 1 화신상회(종로타워) 2 제비다방 3 경성부청(시청) 4 낙랑파라 5 남대문 6 엔젤카페 7 일본생명 8 조선은행(한국은행) 9 조선총독부(경복궁) 10 종로서(제일은행 본점) 11 조선호텔

1. 화신상회 앞 전차

“구보는 약간 자신이 있는 듯싶은 걸음걸이로 전차 선로를 두 번 횡단하여 화신상회 앞으로 간다. 그리고 저도 모를 사이에 그의 발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기조차 하였다.” 화신상회는 현재 종로타워가 들어서 있는 자리에 있었다.

종로 네거리(종각역)는 남북(남대문통∼안국동), 동서(동대문∼서대문)로 가는 전차가 만나는 곳이었다. 그는 곧 서대문 방향에서 온 전차에 탄다. “갈 곳을 갖지 않은 사람이, 한 번 차에 의탁하였을 때, 그는 어디서든 섣불리 내릴 수 없다.” 그는 전차를 타고 종로2정목, 빠고다공원, 창덕궁 앞, 종묘 앞, 종로4정목, 종로5정목, 초교를 지나 동대문에 이르고, 전차 안에서 만난 일전에 맞선 본 여자를 따라 청량리행 열차를 탈까 망설이다가 아차, 하고 놓치고 만다. 그의 전차길을 따라가려면 지하철 1호선을 타면 되겠으나, 우리 산보객은 광화문 방향으로 향해보자.

2. 제비다방

소설의 산보객이 전차에서 내려 가배차(커피)를 한잔하러 들른 곳은 ‘낙랑파라’(樂浪 parlour)다. 하지만 코스를 따라 걷는 산보객은 제비다방을 먼저 만난다. “종로네거리에서 종로경찰서(현 제일은행 본점)를 지나 서대문 방면으로 가다 보면 청진동 골목이 나온다. 청진동 골목 첫 번째 자리”(의 ‘끽다점탐방기’)다. 청진동 127번지로 추정되는 곳에 제비다방이 있었다. “유리창 너머 페이부먼트 우로 여성들의 구두빨이 지나가는 것이 아름다운 그림을 바라보듯 사람을 황홀케 한다. 살색 스톡킹으로 싼 가늘고 긴-각선미의 신여성의 다리다리다리-.”(같은 글) 아마 제비다방은 반지하였을 것이다.

구보는 이곳에 초저녁에 간다. “좁은 서울이었으나, 밤늦게까지 헤맬 거리와, 들를 처소가 구보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대체 누구와 이 황혼을… 구보는 거의 자신을 가지고 걷기 시작한다. 벗이 있다. 황혼을, 또 밤을 같이 지낼 벗이 구보에게 있다. 종로경찰서 앞을 지나 하얗고 납작한 조그만 다료엘 들른다.”

밤을 지낼 벗은 이상으로, 둘은 짝패로 통했다. 조용만은 에서 이렇게 회고한다(‘1934년 경성, 행복 찾기’에서 재인용). “이상과 구보는 참으로 짝패이었다. 우선 풍채부터 이상의 더벅머리와 수염에 대해서, 구보의 갓빠 머리가 한 쌍이었고, 언변에 있어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결말을 들으면, 포복절도할 만담가의 흥행을 보는 것 같았고, 술집에서 둘이 주거니 받거니 주인여자를 농담으로 웃겨놓으면, 다음부터 외상술 먹기는 문제없었다. 둘이 다 한가한 몸이므로 밤낮 붙어다니면서 노닥거렸다.”

이상은 소설에 ‘벗’이라는 정겨운 이름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이 연재된 에 ‘하융’이란 화명으로 삽화를 그려넣었다.

3. 4. 광화문∼대한문∼낙랑파라

장곡천정(소공동)의 ‘낙랑파라’는 화가 이순석이 운영한 최초의 커피다방이다. 위층은 화실로 썼고 아래를 다방으로 썼다. 구보는 요즘의 카페족처럼 다방을 다니며 글을 썼다. 낙랑파라에서 썼던 것이 다. 지금의 조선호텔 부근에 있었다.

소설에서 낙랑파라를 나온 구보는 벗의 얼굴이 보고 싶다 생각한다. 벗들을 마음속에 헤아려보지만 이 시각에 집에 있을 사람이 없어서 난감하다. “어디로-, 구보는 한길 위에 서서, 넓은 마당 건너 대한문을 바라본다. 아동유원지 유동의자에라도 앉아서…. 그러나 그 빈약한, 너무나 빈약한 옛 궁전은 역시 사람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여주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앞에서 말했듯 그가 쏘다닌 경성 길은 그가 잘 아는, 그래서 전차를 따라 걸음을 따라 흘러갈 뿐인 배경이다. 배경 속을 움직이는 전차 속 1년 전 맞선 본 여성, 양산을 다리 사이에 놓은 분명 처녀가 아닐 것임이 분명한 여성, 그와 부딪힐 뻔한 자전거 남성, 화신상회 승강기를 기다리는 가족 등, 그의 감정을 추동한 것은 사람들이었다. 그가 대한문을 바라보며 느낀 ‘우울감’은 감정 없던 세트 서울을 향한, 건물에서 느낀 보기 드문 감정이다.

가까운 골목의 젊은 화가가 운영하는 골동품점을 생각해낸다. 이 골동품점의 방문은 자기가 할 일에 대한 꾀로 이어진다. “구보는 그 방면에 대한 지식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하여튼, 그것은 그의 취미에 맞았고, 기회 있으면 그 방면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생각한다. 온갖 지식이 소설가에게는 필요하다.” 어머니에게는 백수로 보이지만 그는 나름 투철한 ‘직업정신’과 그를 향한 연마의 자세가 있다. 하지만 골동품점 주인은 없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가진 소일거리의 ‘목적’을 떠올린다. “구보는 포도 위에 서서, 문득 자기도 창작을 위하여 어디, 예하면 서소문정 방면이라도 답사할까 생각한다. ‘모데르노르지오’를 게을리하기 이미 오래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과 함께 구보는 격렬한 통증을 느끼며, 이제 한 걸음도 더 옮길 수 없을 것 같은 피로를 전신에 깨닫는다.”

격렬한 통증은 창작을 생각하며 생겨나는 통증이다. 어쨌든 직업 없는 구보 역시 직업인인 것이다. 모데르노르지오는 고현학을 말한다. 그의 걸음은 남대문길을 향한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구보와 만나 카페를 가는 벗은 이상이다. 이상은 ‘허융’이란 화명으로 신문연재 소설의 삽화도 그렸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구보와 만나 카페를 가는 벗은 이상이다. 이상은 ‘허융’이란 화명으로 신문연재 소설의 삽화도 그렸다.

5. 명동∼남대문∼서울역

“그는 저 불결한 고물상들을 어떻게 이 거리에서 쫓아낼 것인가를 생각하며, 문득, 반자의 무늬가 눈에 시끄럽다고, 양지로 반자를 발라버렸던 서해(최학송)도 역시 신경쇠약이었음에 틀림없었다고, 이름 모를 웃음을 입가에 띠어보았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둔 서울시의 마음이 이랬을까. 남대문으로 가는 태평로 길은 고물상 거리였다. 그의 바람대로 고물상이 정리된 것은 해방 이후 한참 뒤였다. 그는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으로 나아간다. 현재 불에 탄 남대문은 벽으로 둘러쳐져 있는데, 둘러쳐지기 전에도 접근 엄금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남대문 밑을 걸어다녔다. 남대문 밑에 쉬고 있는 맥없는 서너 명의 지게꾼이 또 센티한 구보를 자극한다.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는 눈앞의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도회의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 도회의 항구와 친하여야 한다.”

경성역은 구보가 본 건물이 현대화한 서울역의 한켠에 있다. 그는 대합실에서 관찰을 시작한다. 쇠잔한 노파, 그 옆 중년 시골 신사의 내력을 짐작하고 40여 살의 바세도우씨병(갑상선기능항진증)이 걸린 노동자를 살피며 공책을 펴든다. 수다가 꽃피는 같은 인물 묘사가 이어진다. 구보의 산책은 아직 많이 남았다. 다시 돌아 낙랑파라를 가고, 제비다방에서 벗을 만나 술집을 가고, 어리디어린 여급에게 수작을 건다. 산책 끝의 그의 결심은 훌륭하다. 마치 영화 의 김상경이 중얼거리는 말(“생각을 하자.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 담배도 끊을 수 있다.”)과 비슷하다. 소설은 어머니의 독백으로 시작해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는 구보의 생각으로 끝나는 해피엔딩이다.

“이제 나는 생활을 가지리라. 생활을 가지리라. 내게는 한 개의 생활을, 어머니에게는 편안함 잠을-.”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구보는 지금 제 자신의 행복보다도 어머니의 행복을 생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그렇게 바빴을지도 모른다. 구보는 좀더 빠른 걸음걸이로 은근히 비 내리는 거리를 집으로 향한다. 어쩌면, 어머니가 이제 혼인 얘기를 꺼내더라도, 구보는 쉽게 어머니의 욕망을 물리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에 마지막 연재가 난 게 9월19일인데, 박태원은 다음달 10월27일에 숙명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김정애와 결혼한다. 1936년에 어머니가 바라던 손자도 태어난다. 개인사만이 아니라 소설사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권태’ ‘피로’가 젖어든 소설 대신 같은 웃음기 가득한 세태소설로 넘어간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참고 문헌 (조이담 지음·바람구두 펴냄), (민족문학사연구소 엮음·창비 펴냄) 중 ‘1934년 경성, 행복 찾기’(채호석), ‘에 나타나는 산책자 연구: 모더니즘 소설의 전형에 대한 일고찰’(최혜실·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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