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을 국자에 담고 불 위에 올린다. 불은 은근해야 한다. 쇠젓가락으로 휘휘 젓다 녹으면 재빨리 소다를 넣는다. 아메리카노 커피처럼 진한 갈색이 라테 커피처럼 부드러운 베이지색으로 변하며 부풀어오른다. 이때, 재빨리 국자를 철판 위에 뒤집는다. 굳기 전에 설탕을 얇게 펼치고 모양 틀을 찍는다. 모양 틀을 떼면 별 그림이 선명하다. 추억의 설탕뽑기, ‘달고나’다. 만들어지는 시간은 불과 30여 초. 달고나는 ‘쇼핑 1번지’ 서울 명동에서 흔히 보는 대표적인 길거리 군것질이다.
토종 vs 생전 처음 보는 음식
‘길거리 음식 1번지’로도 불리는 명동은 골목 사이사이 다양한 음식을 파는 노점들이 쇼핑객을 유혹한다. 한국의 대표 길거리 음식 ‘떡볶이’는 물론 터키 ‘케밥’, 벨기에 ‘와플’, 일본 ‘다코야키’, 중국 ‘만두’ 등 다양한 국적의 먹을거리가 즐비하다. 명동 골목마다 판매되는 음식의 국기를 꽂으면 세계 맛지도가 펼쳐질 판이다. 길거리 음식의 성찬은 명동에서 멈추지 않는다. 인사동,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 홍익대 입구 등에서도 지역색에 맞는 길거리 음식이 뜨고 진다. 길거리 음식이 발달한 타이와 홍콩처럼 한국의 길거리 음식도 이제 관광안내 책자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하다. 길거리에 차려진 다양한 음식을 즐기다 보면 흡사 길을 걸으며 골라 먹는 뷔페 식당에 온 느낌을 받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음식을 파는 노점상을 보는 건 주로 밤이다. 명동의 밤거리에서 길거리 음식 문화가 꽃핀 건 한국의 먹을거리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들 덕분이다. 저녁 7시 무렵이면 노점상이 하나둘 자리를 잡는다. 롯데백화점 맞은편 명동 입구부터 명동역 밀리오레 앞까지 즐비한 노점은 한 집 건너 한 집이 음식을 판다. 마치 오징어배처럼 리어카마다 불이 환하다. 노점상들은 제각기 지글거리는 철판 위에 기름을 붓고 후다닥 음식을 만들어낸다. 극장 앞에서 흔히 팔던 오징어와 문어, 인천에서 상륙해 별미가 된 계란빵, 거리 음식에서 빠지면 서운한 떡볶이와 닭꼬치, 기름에 튀겨 윤기가 흐르는 핫바와 소시지가 흔히 보는 토종 길거리 음식이다. 상인들은 음식을 만들어내며 끊임없이 중국어와 일본어로 호객 행위를 한다. 부르는 소리가 아니더라도 식욕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로 고개가 휘휘 돌아간다.
먹을거리가 다양해지고 사람들의 입맛도 까다로워지다 보니 변함없는 고전 길거리 음식이라도 시대 따라 맛과 모양은 조금씩 달라졌다. 계란빵 속에 숨었던 달걀은 빵 위에 노르스름하게 자리했고, 핫바는 깻잎·고추·김 등 20여 가지 맛으로 다양해졌다. 요즘 길거리 음식의 대세는 단연 꼬치류다. 들고 다니며 먹기 좋게 간편해서다. 기름에 구운 떡갈비와 소시지 꼬치, 회오리 모양의 튀긴 감자인 ‘회오리감자’ 등은 맥주를 한 캔씩 손에 든 외국인들이 술안주로도 곧잘 사가는 메뉴다. 명동 CGV 극장 옆 골목에서 반찬가게처럼 다양한 군것질거리를 파는 한 아주머니는 “떡볶이는 일본인이, 순대볶음은 중국인이 좋아하다”며 “외국인이 관광책자를 들고 와 찾을 정도로 길거리 음식을 좋아한다”고 했다.
길거리 음식도 유행이 있다. 순대·떡볶이·어묵·호떡이 변함없이 인기를 유지하는 베스트 음식이라면 한때 흥했던 ‘빠스’(고구마 맛탕), ‘만득이 핫도그’(감자튀김을 묻힌 핫도그), ‘왕슈’(주먹만 한 슈크림), 버터구이 오징어, 풀빵 등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중이다. 고급스럽고 색다른 맛을 찾으면서 글로벌한 메뉴가 토종 음식처럼 자리잡기도 한다. 벨기에 와플, 멕시코의 타코와 브리토, 베트남 월남쌈 등 종류도 다양해졌다. 길거리 노점 음식의 진화다.
포화시장에선 맛보다 마케팅
홍익대 근처에 세운 노란 트럭에서 멕시코 음식 타코를 파는 전기남씨는 “길거리 음식으로 멕시코 음식을 들고 나온 건 내가 처음”이라고 자신한다. 미국에서 일식요리사를 하다 귀국한 전씨는 타코 프랜차이즈 창업을 준비하다 여의치 않자 트럭을 몰고 9개월 전 길거리로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매운 고추라는 ‘하바네로’의 이름을 걸고 타코와 브리토를 한국인의 입맛에 맞춰 개발해 팔았다. 밥과 고기, 채소가 섞여 한 끼 식사로도 든든한 브리토를 한국 사람들은 특히 좋아했다. “홍익대 주변의 특징은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나 맛에 관심이 높아 길거리 음식이라도 승산이 있다는 것”이라는 그는 조만간 여의도 일대까지 영역을 넓힐 생각이다.
인기 있는 길거리 음식은 길을 따라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간다. 노점상 김창신씨는 차이나타운에서 인기 있던 화덕빵 ‘용알’을 배워 인사동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인도의 ‘난’처럼 기름 없이 화덕에 반죽을 붙여 구워내는 빵은 숯불고기맛과 호두를 넣은 고구마 무스맛 2가지를 판매한다. 글로벌화하는 길거리 음식의 변화를 따라 새롭게 개발된 메뉴다. 인사동에서 시작한 지 1년6개월이 됐는데 반응은 나쁘지 않다. “인사동의 대표 길거리 음식인 ‘꿀타래’도 처음부터 인기를 얻진 않았어요. 판매는 10년 전부터 하다 불과 4~5년 전에야 유명해졌거든요. 용알도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을 만큼 인기 있는 날이 언젠간 오겠죠.”
김씨 말대로 인사동의 대표 먹을거리가 된 꿀타래는 지금 시장 포화상태다. 인사동 큰길에서 10곳 이상이 성업 중이다. 그렇다 보니 꿀타래는 맛보다 마케팅이 우선이 돼 판매가 된다. 기교가 우선되는 길거리 음식이기에 가능한 상술이다. 상인들이 딱딱한 꿀덩어리를 셀 수 없이 많은 가닥의 실로 뽑아 땅콩·아몬드·호두를 넣는 과정을 쇼처럼 보여준다. 손님과 주고받는 적당한 농은 덤이다. “곤니치와” 하고 관광객을 불러 세우면 십중팔구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하며 돈을 손에 거머쥔다. 때론 쇼와 상술도 길거리 음식을 즐기는 재미다.
인사동을 안내하는 관광책자에 꿀타래와 옥수수 호떡이 소개돼 있다면, 동대문시장은 채 썬 양배추를 기름에 구운 만두피로 싸먹는 납작만두와 비빔국수가 그만큼 유명하다. 종로는 ‘김떡순’으로 불리는 김밥·떡볶이·순대가, 남대문시장은 잡채를 넣은 채소호떡과 핫바가 대표 길거리 음식이다. 젊음의 거리인 홍익대 인근은 칵테일, 크레페 등도 길거리 음식으로 나올 만큼 가짓수가 많다.
최근 등장한 서울 지역 길거리 음식의 다크호스는 ‘잡채찰바’다. 잡채를 쌀과 찹쌀을 섞은 반죽으로 싼 채소호떡의 변형물인 잡채찰바는 두 가지 맛으로 승부 중이다. 버섯이 든 매운맛과 돼지고기가 든 순한맛이다. 쌀피가 호떡보다 단단하고 기름지나 잡채가 풍성하게 들어 맛이 좋다. 남대문시장에서 먼저 판매됐다 외국인을 비롯한 시장의 반응이 좋아 다양한 거리 음식으로 납품 중이다. 시장에 정식 출시된 게 7월인데 반응도 좋다. 벌써 서울 지역을 벗어나 경기도 일대와 부산까지 내려갔다. 9월20일께면 고구마와 호박맛 2가지 신제품도 나온다. 잡채찰바를 만든 로뎀푸드 나승찬 영업총괄팀장은 “길거리 음식의 유행은 1년 정도로 짧다”며 “끊임없이 새 메뉴를 개발하고 시장의 흐름을 알아야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길거리 음식의 요즘 트렌드는 잡채다. 한국인과 외국인, 남녀노소를 떠나 모든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았다고 했다. 채소호떡, 잡채찰바, 만두 등 잡채가 활용되는 길거리 음식이 많고 오래가는 이유다. 길거리 음식에서 ‘음식의 한류’가 보인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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