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라는 커피숍을 보았다. 세탁소가 아니기에 이름이 세탁소다. 이 세탁소에는 세탁을 맡기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이 티셔츠에는, 티셔츠 아니랄까봐 ‘티셔츠’라고 적혀 있다. 새파랗게 젊은 학생이 입었는데 ‘젊은이’라고 적혀 있다. 커플이 ‘커플티’라고 적힌 커플티를 입고 있다. 자신이 ‘귀한 자식’임을, ‘멋쟁이’임을, ‘꽃미남’임을 샤방샤방한 글씨체로 드러낸다.
<font color="#00847C">앞뒤가 다른 직급 면티</font>
역할 놀이도 있다. ‘아빠’ ‘엄마’ ‘딸’ ‘아들’이란 글자가 티셔츠 한가운데 100m 떨어져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게 적혀 있다. 직급도 명시한다. ‘사장님’(뒤편에는 ‘지켜보고 있다’·이하 괄호 속은 뒤편 문구), ‘부장’(나도 지켜보고 있다. 사장님 사랑해요), ‘과장’(오늘은 내가 한턱 쏜다! 난 짜장), ‘실장’(칼퇴한다, 잡지 마라), ‘팀장’(고급 인력 월급 인상), ‘주임’(다들 주말 동안 푹~ 쉬세요, 저는 출근하겠습니다), ‘대리’(보너스 주시면 회사에 뼈를 묻겠습니다), ‘사원’(개념 충만 야근 사절), ‘막내’(집에 좀 가자), ‘알바생’(스티브 잡스도 알바생부터 시작했다) 등이다.
‘투명인간’(뒤편에는 ‘못 본 척해줘’), ‘잉여인간’(하루하루 똥 만드는 기계)이라는 현실도피적이고 자학적으로 보이는 문구도 있다. 익숙한 속담의 패러디도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새가 더 피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아 10리도 못 가서 뒈져버려’ 등.
‘한글 글자 옷’을 자주 입는 최윤성(21·대학생)씨는 옷을 입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요약한다. 딱 마주치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다. 딱 3초가 지나면 입꼬리가 올라간다. 지나가면서 빵 터진다. 2초 뒤 뒤를 돌아보면 티셔츠 뒷면에는 뭐가 쓰여 있나 살펴보는 눈과 마주친다. 두 명이서 지날 때는 소곤거리기도 한다. “오빠래, 손만 잡는대.” 최씨는 “웃으면 오래 산다잖아요. 제가 망가지는 건 상관없이 웃길 수 있다면 기분 좋아요”라고 말한다.
‘최악의 면T 판매 사이트, t09.kr’의 김인욱 사장은 “예전에 로고 패러디가 대세였다면 최근에는 명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티셔츠가 유행”이라고 말한다. t09.kr는 2004년 PUMA를 변형한 PAMA가 인기를 끌면서 시작됐다. ‘BEANGONE’ 티셔츠를 거쳐 현재는 ‘잉여인간’ ‘만성피로’ 등의 티셔츠를 판매하고 있다. 이 역사가 ‘패러디 티셔츠’의 역사다.
로고는 그대로 두면서 나이키를 나이스, 푸마를 파마로 영문으로 적던 로고 패러디 시대가 있었다. 웃음을 노렸다기보다는 ‘짝퉁’의 숙명이었고 ‘임기응변’이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영문에 전략적인 웃음을 새기기 시작한다. 변형된 로고에 ‘BEANGONE’ ‘OPPA NAPPA’ ‘NIIGAGARA HAWAII’ 등을 넣는 식으로 업그레이드됐다. 그다음으로 당도한 것이 한글 패러디 시대다. 티셔츠의 글자가 영어라는 공식을 파괴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2005년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호남 향우회’라고 적힌 원피스를 입어서 한국을 웃기며 ‘글자 티셔츠’의 가능성이 활짝 폈다. 원피스는 유명 브랜드 상품이었고, 단지 기호로서 한글을 사용한 것이다. ‘낫 놓고 기역자를 아’는 한국으로 사진이 전달되자 유머 코드화했다. 우연한 웃음은 의도된 전략이 된다. ‘창고 대방출’ ‘수학의 정석’ 등 익숙하게 보아온 문구들이 티셔츠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컴퓨터에서만 사용되는 글자(‘뷁’ ‘햏자’ ‘아햏햏’ 등), 인터넷 유머도 활용됐다.
이후 등장한 것이 ‘자아 티셔츠’다. 반8닷컴(ban8.com)이 올 4월 아빠, 엄마, 아들 호칭 티셔츠와 5월 직급 티셔츠를 출시했다. ‘자아 티셔츠’는 현재 더 예쁘게 진화하고 있다. 반8닷컴의 심성진 디자인팀장은 “예전에는 한글이 신선했다. 예쁘다기보다는 웃겼다. 그래서 가독성 있는 것(글자가 큰 것)이 호응을 얻었다. 지금은 디테일한 부분을 살려 고급스럽게 느낌을 표현하는 라인도 잘 만들려고 한다”고 말한다.
<font color="#C21A8D">내가 나라고 ‘굳이’ 말하는 세대</font>이 티셔츠들의 주요 고객은 학생(고등학생·대학생)과 20대다. 그래서 이들이 동감하는 것을 찾아 티셔츠 제작자들은 헤맨다. 심성진 팀장은 “‘발견’을 하려고 노력한다. 재밌는 말이나 유행하는 말이나 잠깐 살짝 지나가는 말에서 감을 잘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젊은 소비자는 공모를 통해 제작자가 되기도 한다. ‘초절정’ 인기의 직급 티도 그렇게 시작됐다. 사이트 회원 가입 때 항상 하는 ‘어떤 티셔츠를 갖고 싶으냐’는 질문에 “가족 티셔츠가 있으니 직장 티셔츠가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남긴 이의 말에 따라 만들었다. t09.kr에도 직접 디자인한 티셔츠를 올릴 수 있는 게시판이 있다. 많을 때는 하루에 10건도 올라온다.
이택광 문화평론가(경희대 영문학과 교수)는 ‘상징계를 대반사’시키는 이런 티셔츠가 젊은이들의 약해진 자아를 대변한다고 풀이한다. “‘젊은이’라고 규정을 해줘야 자신이 젊은이라고 인식한다. ‘성취’가 불가능해진 시대에, 자신의 지위는 욕망과 불일치하고, 사회가 불러주는 명명도 허망해졌다.”
세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파편적인 행동이 돌출하게 된다. ‘투명인간’ ‘잉여인간’으로 자신을 지칭하는 것은 ‘부드러운 자해’의 일종이다. 하지만 이는 88만원 세대로 통칭되면서도 정체가 모호했던 젊은이들의 문화 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택광 문화평론가는 “우리 내면의 이야기를 드러낸다는 면에서 긍정적이다. 대중문화는 미국의 팝 문화와 동급이다. 우리 문화라고 해봤자 술 문화, 관광버스 문화가 다였다. 그런데 새로운 대중문화의 가능성이 보인다”고 말한다. 이 젊은 문화의 성격은 이렇다. “현재의 20대는 과거처럼 완전히 모든 것을 거부하지는 않고 순간의 냉소를 한다. 누리고 싶으면서 쿨하게 살아가고 싶은 감정의 이중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font color="#008ABD">성별·공간·진품의 경계 없는 신발</font>젊은이들은 옷으로만 퍼포먼스를 하는 게 아니다. 크록스라는 신발도 있다. 크록스는 2002년 미국에서 요트용으로 개발된 신발로, 한국에서는 2007년 7월에 첫 매장을 열었다. 플라스틱도 고무도 아닌 신소재(‘크록라이트’라고 한다)의 가볍고 편안한 신발은 미국에서 급성장했다. 2007년에는 영업실적이 전년보다 3배 증가했다. 크록스는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다. 크록스팬 사이트(crocsfan.com)을 만들어 크록스를 신은 사람을 일일이 열거하는 팬이 있는가 하면(해당 회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아이헤이트크록스(ihatecrocs.com)라는 사이트를 연 대학생은 신발을 태우거나 가위로 자르는 퍼포먼스 동영상을 올렸다. 패션 칼럼니스트들은 “패션의 재앙”이라며 “추악하다”고 말했다. 크록스도 이를 의식해서인지 2005년에는 ‘추악한 것도 아름다울 수 있다’(Ugly can be beautiful) 시리즈 광고를 제작했다.
크록스가 들어오자마자 한국에서는 ‘짝퉁’으로 대응했다(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유사 상품이 넘쳐난다). 마트와 시장에는 비슷한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신발이 진열돼 있다. 급작스럽게 카피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신발이 이전에 화장실에서 신던 신발과 별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신발은 실내화였다. 화장실 슬리퍼였다. 여전히 화장실(그리고 해변가)에서만 플라스틱을 신는 아줌마·아저씨와 달리, 청소년과 젊은이들은 플라스틱을 끌고 거리로 나간다. 플라스틱을 신고 밖으로 외출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크록스의 매출도 신장한다. 크록스 홍보팀은 지난 5월까지 매출이 전년 대비 65% 성장했다고 한다.
현시원 큐레이터는 “크록스는 경계 없는 다양함의 신발”이라고 말한다. 남성이 신었다면 아저씨·촌놈 이미지가 부여되면서 ‘남성적’인 면은 사라지게 한다. 여성도 마찬가지다. 여성적인 느낌은 사라지고 여자아이 혹은 아줌마가 된다. 실외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신발의 성적인 느낌도 무너뜨린다. 실내에서만 신는다는 실내화와 슬리퍼의 강압성을 없애고, 실내화는 하얀색, 슬리퍼는 파란색·하얀색 스트라이프라는 천편일률성도 형광색이 대체한다.
현시원 큐레이터는 한글 티와 크록스 신발을 ‘심플한 퍼포먼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퍼포먼스는 공동체를 대변하던 티셔츠와 경계를 벗어난 신발에서 일어난 변화라 주목된다.
“예전의 한글 티는 공동체를 표현하는 학교, 향우회, 학생회, 회사 티셔츠가 다였다. 그러나 지금 한글 티를 입고 퍼포먼스를 벌이는 것은 개인이다. 자신의 메시지에 동조하는 이들에게 연대를 구하는 몸짓이기도 하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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