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흥미로운 섬이다. 따뜻한 기후, 안식 같은 휴양시설, 깨끗한 풍광 때문은 아니다. 독특한 방언, 육지와 다른 풍습 때문도 아니다. 제주는 1만8천의 신이 깃들어 있는 섬이다. 가신이나 잡신을 뺀 숫자라는데, 작은 땅덩어리에 이 정도면 모든 사물의 틈새마다 신의 기운이 배어 있다는 말이다. 만신의 섬이다.
이 중 제주의 ‘어머니 자연’이라 일컬을 만한 신은 설문대할망이다. 미국에서 신화학을 공부한 고혜경씨는 문고본 책으로 접한 설문대할망 신화를 읽고 짜릿함을 느꼈다. 많은 학자들의 해석과 편집 과정을 거치지 않아 설문대할망 신화는 가공되지 않은 원형으로 남아 있었다. 고씨는 그를 마음에 꼭꼭 품어 두웠다가 (한겨레출판 펴냄)에서 신화의 감성으로 전설 같은 이야기를 굽이굽이 풀어냈다.
<font color="#00847C">명주 5900필로 속옷을 만들라</font>
제주민에게 “설문대 시절에”는 “옛날 옛적에”와 동일하게 기능한다. 제주도 곳곳에 세워져 섬을 오래도록 지킨 돌하르방은 타지인에게 제주를 대표하는 신처럼 여겨지지만, 신화에 따르면 돌하르방도 설문대할망에게서 분화됐다. 하르방이 돌을 깎아 만든 형상으로 자신을 호소하고 있는 것에 비하자면 설문대할망은 한 수 위다. 돌하르방이 서 있는 영역을 제외한 제주의 대부분의 장소에는 설문대할망의 흔적이 가득하다. 제주 땅은 설문대할망에게 공간이라기보다는 작은 도구 정도로 여겨졌던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설문대할망은 성산 일출봉에 불을 밝혀 길쌈을 하고, 수수범벅을 먹고 360발 설사를 쏘아 오름을 만들고(그러니까 지금 숱하게 제주를 들락거리며 오름을 오르는 우리는 설문대할망의 설사 흔적을 부지런히 다져 밟고 있는 거다), 거센 오줌발로 땅을 밀어 우도를 만들고, 폭풍 같은 오줌으로 홍수를 일으켜 고래와 물개가 헤엄치는 바다를 만들었다. 그의 일상과 자연스런 생리 현상은 인간에게는 거대한 창조의 위업이었으니 그 앞에서 개발 등을 논하는 인간의 논리는 그래서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인다.
설문대할망이 자신의 생리 현상으로 제주의 자연을 창조한 바탕에는 그의 큰 키가 있다. 설문대할망은 한라산이 무릎 밑에 오는 거신이다. 그는 세계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들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맥을 같이한다. “통제불능의 탐욕,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동시에 어마 무쌍한 창조력을 지녔다. 그러나 “그리스나 켈틱 신화에 등장하는 통제불능의 야성의 거인보다 훨씬 진화한 창조 거신”이다. 설문대할망이 야성과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이유, 혹은 매력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인간을 압도하는 힘보다 인간에 친화적인 성격에 있다. 명주 5900필을 들여 자신의 속옷을 지어주면 육지까지 가는 다리를 놔주겠다며 내기를 제안하는 그는 폭군이라기보단 친근하고 사교적인 그야말로 ‘할망’이다.
저자는 설문대할망 신화와 세계 구석구석의 신화들을 엮어 비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길쌈하는 설문대할망을 두고 러시아의 여신 바바 야가와 미국 인디언 호피족의 거미 여신, 한국의 직녀 등을 같은 선상에 놓는다. 더불어 물레에서 길쌈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자연에서 문명으로의 전환으로 해석한다. 이 밖에도 빛, 신의 숫자 100, 인간의 숫자 99, 배변을 통한 창조, 남근과 다산, 불, 잠이란 원형적 신화소에 주목해 꼼꼼하게 분석한다. 그러나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다. “옛날 옛날”의 이야기를 밑바탕에 두는 신화는 문맥을 따라 불쑥 솟아날 때마다 재미있기만 하다.
<font color="#C21A8D">설문대할망의 잠자는 죽음</font>
설문대할망 신화의 끝은 죽음이다. 큰 키를 자랑한답시고 한라산에 있는 물장오리에 들어섰다가 끝없는 깊이에 빠져 그만 죽고 말았다. 영원불멸의 존재인 신이 죽는다니, 그것도 키 자랑을 하다가. 하지만 설문대할망은 그래서 더 인간에 가깝고 친근하다. 한편으론 신이기에 그 죽음이 끝은 아니다. 저자는 그의 죽음을 “잠을 잔다”고 해석했다. 머리를 제주 최북단에 두고 다리를 반대쪽에 늘어뜨린 채 제주 땅을 온몸으로 뒤덮고 누워 잔다. 할망은 죽었지만, 혹은 잠들어 있지만 온몸으로 그렇게 제주를 품고 그 땅에 자꾸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온화한 매력을 불어넣었는지도 모르겠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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