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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빈자의 불편한 동거

자선과 기부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8월호
등록 2010-08-11 21:58 수정 2020-05-03 04:26

한국판 8월호는 부자와 빈자의 동거에 관한 이야기를 특집으로 실었다. 남녀의 동거와 달리 빈부의 동거는 끈적끈적하고 불편하다. 특집의 첫 번째 꼭지로 특파원 쥘리앵 브리고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자선파티를 여는 부자들을 취재했다. 그의 글은 현대 자본주의의 트렌드가 돼가고 있는 자선과 기부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font color="#00847C">공공지원 줄이고 기부로 충당?</fon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8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8월호

글래스고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도시다. 제철소, 조선소,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글래스고는 예술과 문화의 도시로 탈바꿈했다. “임대주택을 끔찍이 혐오한 마거릿 대처 전 총리 덕분에” 공공 임대주택들이 민간 기업에 넘어가고 빈곤층은 외곽 지역으로 쫓겨났다. 이어 ‘카푸치노화’라고 부르는 주택 고급화가 시작됐다. 2008년 8월 세계보건기구는 글래스고의 부유한 지역 주민과 빈곤한 지역 주민 간 평균 기대수명 격차가 28살에 달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글래스고는 백만장자가 많은 도시로 유명하고 한편으로 캐슬밀크와 이스터하우스라는 유명한 빈민가를 보유하고 있다. 이곳 출신 청소년들을 언론은 ‘갱스터’라 부른다. 이곳에 150~200개의 갱단이 활동하며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이 실업수당으로 자라나 철이 들면 마약과 칼을 애용한다.

이 도시의 부자들로 구성된 ‘글래스고 로터리클럽’은 자선행사를 정기적으로 연다. 2010년 6월22일 로터리클럽은 성대한 자선행사를 열었다. 바로 그날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2015년까지 공공지출을 1100억유로 감축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마이클 고브 영국 교육부 장관은 빈민가 학교 지원을 동결하는 대신 자선단체 ‘티치퍼스트’에 470만유로를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오른손으로 지원을 대폭 삭감하고 왼손으로 자비를 베푸는 셈이다. 그날 글래스고 로터리클럽의 자선행사에 참석한 수백만장자 윌리엄 호이는 말한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그들이 자선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하도록 납득시켜야 한다.” 1억8천만유로의 재산을 가진 호이가 자선단체에만 기부를 하는 것은 아니다. 호이는 지지율이 부진한 노동당에 130만유로 이상을 후원했다. 영국 일간지 은 “최근 10년 사이에 윌리엄 호이를 비롯해 글래스고 자산이 크게 증가한 것은 공공 재정을 이용해 뒷받침해준 고든 브라운의 후한 인심 덕택이었다”고 지적했다.

글래스고 자선파티의 진실은 단순하다. 개발정책과 세금 감면으로 큰 특혜를 받는 부자들이 재산의 극히 일부를 기부한다. 그동안 빈자에 대한 공공지원은 대폭 축소된다. 그렇게 누군가의 암울한 미래가 누군가의 찬란한 미래와 조화를 이룬다. ‘갱스터’였던 빈민가 소년 마이클은 글래스고 축구클럽인 셀틱의 전 구단주 윌리엄 호이를 ‘진짜 갱스터’라고 부른다.

글래스고 이야기 외에 상류층을 다룬 드라마 , 농촌으로 떠나는 프랑스의 빈민들, 사회 혼란에 기생하는 아프리카 신중산층 등이 특집에 등장한다.

<font color="#C21A8D">기본소득, 가까이 다가온 미래</font>

이번호 한국 특집은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일정액의 소득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의 꿈을 펼친다. 곽노완 서울시립대 교수는 “기본소득은 오래된 미래지만, 앞으로는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기본소득 주장은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상가 토머스 페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77년 네덜란드의 급진당이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내걸어 사회적 반향을 얻었다. 2009년에는 독일 총선에서 약 10%의 지역구 의원이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당선되었다. 미국 알래스카주에서 석유 배당금 형태로 기본소득이 실시되며 2010년 브라질의 산토 안토니오 디 핀할 지방에서도 일부 실시되고 있다.

곽 교수에 따르면 현재 극소수에게 독점되는 막대한 투기·불로소득을 국가가 흡수해 기본소득으로 재분배한다면 고통받는 과반수 인구에게 어느 체제보다 많은 소득을 보장할 수 있다. 사회는 활기차고 다채로워지며,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자유로운 연합을 만들게 될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전면적 무상급식 실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게 될지 누가 알았을까? 곽 교수는 노동계급 권리 극대화를 최우선 과제로 두는 전통적 진보의 원칙이야말로 임금노동자가 전체 인구의 30~40%밖에 되지 않는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실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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