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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나눌 친구 같은 선생님, 없어요?

성관계 시작 연령 14.2살,
아이들의 고민은 구체적인데 선생님은 옳고 그름만 따지는 현실을 ‘내숭 뚫고 하이킥’
등록 2010-02-25 16:58 수정 2020-05-03 04:26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현아(가명)는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 고민이 있다. 남자친구의 스킨십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다. 키스할 때였다. 남자친구의 손이 현아의 가슴을 더듬었다. 싫지 않았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다. ‘계속 만지게 하면 날 헤픈 아이로 볼까. 만지지 말라고 하면 얘가 상처받을까. 학교에 소문나면 어쩌지….’
서울 동대문구 한 중학교의 나아무개 선생님은 당황했다. 중학교 3학년인 반 아이가 대학생 오빠와 사귄다고 고백한 것이다. 10대들의 연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그도 머릿속이 하얘졌다. “축하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최대한 ‘꼰대’답지 않게 한다는 말이 “남자는 모두 늑대니 단둘이 골방에 들어가지 마라”였다.

비밀 나눌 친구 같은 선생님, 없어요? (한겨레 신소영 기자)

비밀 나눌 친구 같은 선생님, 없어요? (한겨레 신소영 기자)

“연애해요”는 “사고 칠 것 같다”?

10대들의 성의식은 어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신체 성장 속도가 빨라져 성적 에너지를 주체하기 어려워진 아이들은 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다. 어떤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연애를 시작해 중학생 때 이미 첫 성관계를 경험하기도 한다(표1 참조).

성에 일찍 눈뜬 아이들이 막힘없이 섹스를 얘기하자 선생님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성교육이 필요하듯 선생님에게도 아이들을 지도하기 위한 성교육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아이들을 ‘무성(無性)의 존재’ ‘보호할 대상’으로만 볼 게 아니라, 아이들이 주체적이고 책임감 있는 성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해보자는 인식에서다.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교육 환경을 변화시켜보자는 뜻에서 모인 ‘여성주의교사모임’이 10대들의 성문화 공부에 나섰다.

지난 2월17일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전국국어교사모임 사무실. 여성주의교사모임·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한국성폭력상담소가 함께 ‘10대의 연애’를 논하는 워크숍을 열었다. 주제는 ‘사랑하는 학생들과 내숭 뚫고 하이킥’이다. 30여 명의 학생과 선생님이 허심탄회하게 속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먼저 선생님에 대한 서운함을 비쳤다.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 활동을 하는 ‘난다’(19·별칭)는 고교 시절 일화를 소개했다. “학교 내에 유명한 커플이 있었는데 학생주임 선생님이 얘들을 각각 따로 전학 보냈어요. 이러니 애들이 선생님과 사적인 얘기를 안 하려고 하죠.” 레즈비언인 ‘날토’(17·별칭)가 말을 이었다. “선생님들은 애들에게 지금은 연애할 시기가 아니라 공부할 시기라고만 해요. 기껏 (부모님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을 얘기하고 나면 부모님에게 말한다고 하고요. 선생님과 가깝다고 해도 벽이 느껴져요.”

10대들의 성의식은 어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연애를 시작해 중학생 때 이미 첫 성관계를 경험하기도 한다. 한겨레 박미향 기자

10대들의 성의식은 어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연애를 시작해 중학생 때 이미 첫 성관계를 경험하기도 한다. 한겨레 박미향 기자

선생님들도 할 말이 많다. 나아무개 선생님은 “교사 입장에선 ‘연애해요’라는 이야기가 ‘사고 칠 것 같아요’로 들린다”며 “연애 잘 하라는 응원보다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서울 구로구 경인고 조영선 선생님은 “사고는 니들이 내고, 수습은 우리가 한다”며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 같은 선생님을 바라는 아이들과 딸 가진 부모나 언니 같은 심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선생님들의 마음은 금세 통했다. 10대 연애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선생님의 질문이 쏟아졌다. “한 반에 성관계를 경험한 아이들이 얼마나 되니? 연애는 언제부터 하니?”(조영선 선생님) “성관계는 어디서 하니? 피임은 잘 하고 있니?”(서울 소재 초등학교 해직교사 최아무개 선생님)

아이들이 쑥스러워하며 질문에 답했다. “보통 초등학교 때부터” “주로 집이나 멀티방(노래방·PC방·비디오방 등의 기능을 한데 모은 곳)에서” 따위 답변이 툭툭 던져졌다. 어른들이 모르는 세계의 베일이 한 꺼풀씩 벗겨졌다. 경기도의 한 외고에 다니는 지현(18·가명)이는 “남녀공학이라 학교 친구들끼리 사귀는 경우가 많다 보니 아이들 사이에선 학교를 ‘외고’가 아닌 ‘애고’라고 부르기도 한다”며 웃었다.

성인잡지 섹스 칼럼과 다르지 않은 고민들

아이들이 말하는 10대 연애 현실은 청소년 성행태 조사 자료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2007년 보건복지가족부가 발표한 ‘청소년 건강행동 온라인 조사통계’를 보면, 설문에 응답한 13~18살 중고생 8만 명 가운데 성관계 경험이 있다는 대답은 전체의 5.2%였다. 이들의 성관계 시작 연령은 평균 중학교 2학년 나이인 14.2살이었다. 성관계 때 피임을 했다는 대답은 38.2%뿐이었다.

10대의 성고민은 이미 어른들의 성문화와 보폭을 맞추고 있기도 했다. “‘밝히는’ 여자애로 볼까봐 남자친구와 성관계 때 좋아하는 체위를 말하지 못하겠어요” “오랜 연인이라 그런지 만나면 섹스만 하고 달리 교감하는 게 없어 고민이에요” “한 사람만 좋아하는 게 안 돼요” 등 아이들의 고민은 성인잡지에서 보던 섹스 칼럼 주제와 다르지 않았다. 탈학교학생 ‘윤티’(18·별칭)는 “어른들은 10대의 연애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것 같다”며 “아이들은 선생님과 다양한 연애 문제를 공감하고 싶어하는데 선생님들은 지도하려 든다”고 불만을 얘기했다.

하지만 10대의 성을 오롯이 인정해달라고 하는 아이들에게도 딜레마는 있다. ‘연애를 허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하지만 10대의 성 문제를 죄악시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어쩔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특히 여학생들이 그렇다. 윤티는 “여자아이들은 주위의 평가를 두려워해 남자아이들처럼 섹스나 자위, 야동 같은 얘기를 터놓고 하지 못한다”고 했다.

학업 성적에 따른 섹슈얼리티의 양극화도 보인다. 이른바 ‘범생이’는 연애 문제를 혐오하고, ‘날라리’는 성적으로 좀더 개방된 문화를 즐긴다. 전북 군산의 한 고등학교 전아무개 선생님은 “연애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지만 아이들이 연애와 성을 접하는 태도가 극명히 나뉘어 서로 어울리지 못하게 벽을 쌓는 모습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성경험 청소년 중 첫 성관계 연령의 평균

성경험 청소년 중 첫 성관계 연령의 평균

10대에 성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하면 인생에서 큰 혼란을 겪을 수 있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선 잘못된 과시욕과 성지식이 넘치기도 한다. 여자친구와의 스킨십 진도를 ‘정복’의 단계로 보거나 콘돔을 쓰지 않는 게 남자의 자존심처럼 통하기도 한다.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나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성경험과 성태도를 갖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선 교사들이 학업 성적 대신 아이들의 성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향심 상담원은 “10대들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입장에서 선생님과 얘기를 하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며 “아이들의 고민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데 반해 선생님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급급하더라”고 했다.

선생님이 ‘학생 연애 금지’라는 학교 방침과 이미 자유로운 연애와 성관계를 시작한 아이들의 입장 사이에서 고민하는 동안, 아이들은 성폭력에 노출되기도 한다. 인터넷을 통해 어른들이 모르는 자신들만의 성문화를 만든다. 현재 논란 중인 졸업식 뒤풀이가 그 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유정(가명)이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된 게 문제지 졸업식 뒤풀이는 하나의 문화일 뿐”이라고 말한다. 선생님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서울 중구 소재 고등학교 우아무개 선생님은 “10대 서클에서 강요와 성폭력이 가해졌다는 측면에선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고 했다. 서울 구로구 소재 초등학교 조아무개 선생님은 “아이들은 자신만의 문화를 갖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동안 자신을 억압한 학교를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한 일탈 행동을 언론이 선정적으로 다루며 더 문제시된 것 같다”고 했다.

10대들이 음란물의 소비자를 넘어 제작자로 등장하는 현실도 문제로 지적된다. 성경험을 자랑 삼아 찍거나 급우들을 성적 폭력 상태에 몰아넣고 찍은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물의를 빚기도 한다. 박현이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 기획부장은 “몸에 대한 아이들의 주인의식이 떨어지면서 알몸을 드러내는 걸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며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는 행동이 성폭력적 상황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만큼 성교육을 통해 올바른 성지식과 성태도를 갖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사제 간의 관계를 떠나 ‘내숭 뚫고’ 나눈 솔직한 섹스 토크는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서울 구로구 소재 고등학교 김아무개 선생님은 “10대들의 연애와 성 문제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현실인데 선생님들조차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다”며 “교사 집단 사이에서도 공유와 소통이 안 돼 같은 문제도 따로 고민하던 것을 이런 모임을 통해 함께 나누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다”고 말했다. 행사를 준비한 우아무개 선생님은 “선생님들도 아이들을 성적 충동과 욕구가 있는 한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기회가 됐길 바란다”며 “보건교사가 아닌 선생님들에게도 성교육 관련 연수 등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지난 2월17일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전국국어교사모임 사무실에서는 여성주의교사모임,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한국성폭력상담소가 함께 ‘10대 연애’를 논하는 워크숍이 열렸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지난 2월17일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전국국어교사모임 사무실에서는 여성주의교사모임,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한국성폭력상담소가 함께 ‘10대 연애’를 논하는 워크숍이 열렸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보건교사 아니어도 성교육 연수 필요해

자신의 연애사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졌던 아이들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지현이는 “청소년들의 사랑을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꾸 억누르려 하니까 왜곡된 사랑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며 “이 자리에서 만난 선생님들처럼 비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 같은 선생님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덧붙여 “연애한다고 해서 사고 치는 것은 아닌 만큼 어른들 먼저 건전한 눈으로 10대들의 연애를 봐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들이 원하는 성교육은
성폭력 말고 연애를 알고 싶어요


학교 성교육 시간은 아이들에게 ‘수면시간’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아이들에게 1년에 10시간씩 성교육을 하도록 학교 쪽에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보건교육 시간의 선택교과인 성교육은 시간과 내용 면에서 부실하다는 지적이다.
초등학교 성교육 시간은 2007년 10.1시간에서 2008년 9.2시간으로 줄었다. 중학교는 11.3시간에서 10시간으로, 고등학교는 10.5시간에서 8.9시간으로 줄었다. 아이들의 첫 성관계 연령이 낮아지고 10대 미혼모가 늘고 있지만 학교에서는 콘돔 사용법 같은 구체적인 피임법 교육을 꺼리기도 한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흥미를 줄 수 있는 내용이 없다 보니 아이들의 반응도 좋을 리 없다. 고등학생인 지현(가명)이는 “성매매, 성폭력 예방법 같은 수업을 의무적으로 듣긴 하는데 재미없어 그 시간엔 애들이 모두 잔다”고 말했다.
청소년 성상담기관인 푸른아우성의 김애숙 이사는 “정부부처가 정한 성교육 지침과 의무조항이 생기고 성교육 교재·교구가 다양해지면서 예전보다 성교육 수준이 나아진 측면이 있지만 여전히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실질적 교육은 더딘 편”이라고 말했다.
‘2007년 10대 청소년의 성경험 및 성태도에 관한 실태조사’를 실시한 아하!성교육문화센터는 아이들에게 원하는 성교육 내용을 물었다. 연애방법(14.2%)이 가장 높은 대답이 나왔고, 성관계(11.5%), 임신과 출산(10.9%) 등이 뒤를 이었다. 또래 이성에게 관심이 많은 아이들은 성매매나 성폭력 예방법보다는 연애문제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정보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건교사나 외부 전문강사들에게 맡겨진 의무적인 성교육을 일선 교사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경인고 조영선 선생님은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상담을 원할 때는 이미 심각한 관계나 상황에 빠져 있을 경우가 많다”며 “교사들이 정확한 성지식과 성 가치관을 갖춘 상태에서 당황하지 말고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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