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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은 밥상을 뒤집고 자학은 시를 쓴다

만화 <자학의 시>
등록 2010-02-25 15:32 수정 2020-05-03 04:26
만화 〈자학의 시〉

만화 〈자학의 시〉

살림살이 좀 쪼그라드셨습니까? 통장 잔고 마이너스로 자유낙하하고, 치솟는 전셋값에 숨이 턱에 차고, 구직의 길은 변비처럼 꽉 막혔나요? 사람들은 경제 좀 피었다는데 나만 빼놓고 그런 것 같고, 친구들도 하나둘 나를 피하는 것 같고, 그러니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불행한 듯 여겨지십니까? 그렇다면 이 사람을 만나보세요. 자학이 넘쳐 시를 쓸 경지에 이른 여자입니다.

고다 요시이에의 네 칸 만화 의 주인공 유키에는 불운에 둘러싸인 여자다. 어린 시절 엄마는 도망갔고, 아버지는 신문 배달하는 딸을 등쳐먹었고, 동네 아이들 사이의 별명은 드라큘라, 추녀 순위 1·2위를 다투며 청소반장을 도맡아 했고, 마늘장아찌 하나밖에 없는 도시락이 부끄럽지만 그나마도 못 싸가는 날이 허다했다. 지금이라고 나을 게 없다. 새벽부터 밤까지 식당 주방에서 일하다 돌아오면 무위도식하는 남편이 돈을 빼앗아 주점으로 향하고, 어쩌다 붙잡아 밥이라도 먹일 참이면 밥상을 뒤집는다.

유키에의 자학과 체념은 보기만 해도 답답할 노릇이다. 그러나 만화가란 참으로 놀라운 존재다. 그런 상황 하나하나를 절묘한 개그로 만든다. 유키에는 밥상 뒤집기가 특기인 남편에게 “당신, 밥상 뒤집는 거 벌써 열세 번째예요”라고 했다가 “일일이 세지 마!”라는 고함과 함께 열네 번째 밥상 뒤집기를 당하고, “당장 나가!”라는 남편의 호통에 집을 나간 뒤 지하철 순환선을 타 한 바퀴 돌고 태연스레 들어온다. 그렇게 구박받으면서도 남편에 대한 사랑은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는다. 달관에 이른 그녀의 비굴함을 보며 동정보다는 폭소가 먼저 나오는 게, 꼭 내가 비뚤어진 인간이어서는 아닐 것 같다.

주변의 인간들도 하나같이 정상은 아니다. 유키에를 사모하는 식당 주인은 ‘사원 여행’을 가자고 나서지만, 사원이라고는 그녀밖에 없다. 혼자 사는 옆집 아주머니는 마을 회장님과 사귄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소개하는 온갖 전화 판매 상품으로 집안이 미어터진다. 똑같이 유키에를 부려먹고 살아온 두 남자, 아버지와 남편이 서로 잘났다고 툭탁거리는 꼴도 웃기다. 한편으로는 인간적이고 한편으로는 비참하기까지 한 이 상황들을 ‘웃음’으로 뒤덮다니. 정말 유머의 힘은 놀랍다.

최고의 코미디는 결국 그걸 들여다보는 우리를 코미디언으로 만든다. 지하철 한쪽에서 만화책을 든 채 미친 듯 킬킬거리던 나는 갑자기 석유 시추공이라도 뚫린 듯 콧물과 눈물을 쏟아댄다. 만화의 종반부로 다가가며 유키에의 과거와 현재가 겹쳐진다. 그리고 그녀가 그 지독한 불운과 고통 속에서도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는 강변에 진정으로 동감하게 된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이제 상관없다. 양쪽 모두 가치는 같다. 인생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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