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에서 해외문학 마케터로 일하는 이지현(28)씨는 5년 전 운명의 손글씨와 마주쳤다. ‘집안 사정으로 문을 못 열어 죄송합니다.’ 출근길에 있는 구둣방, 굳게 닫힌 셔터 위에 붙어 있는 메모였다. 글씨가 너무 슬퍼 보여서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 들여다봤다. 글씨에서 감정이 전해지다니, 신기해서 디지털카메라로 찍어두었다. 며칠 뒤 문을 열었기에 들어가 물어봤더니, 구둣방 사장님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연락을 받고 황급히 가게 문을 닫고 가느라 휘갈겨쓴 메모라고 했다. 그래서 슬퍼 보였구나. 그때부터 손글씨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손글씨는 유일한 거잖아요. 누가 따라할 수도 없고요. 그런 걸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게 기뻐요. 글씨체와 메시지가 합쳐져 사람마다 개성이 물씬 드러나요. 그걸 쓴 사람을 상상해보는 것도 재밌고요.”
주로 혼자 다닐 때나 출퇴근길에 주변을 둘러보다가 전봇대에 붙은 광고, 명절 때 식당에 써붙인 ‘고향 갑니다’ 같은 메모들을 카메라로 ‘찰칵’ 찍어 보관했다. 헌책방에서 찾은 보물들도 있다. 책 면지에 쓰인 사랑 고백과 시집 뒤에 합산해놓은 수능 점수가 기억에 남는다. “너의 작고 고운 손으로 아이스크림 훔쳐가면 가게 아자씨 혹은 아줌마 마음이 아프다.” 슈퍼 주인의 도둑질 경고 메시지도 훈훈했다. 벽에 적힌 “우리 할머니 병 낫게 해주세요” “동방신기 내 거야!” 같은 낙서도 지현씨의 카메라에 담겼다. 영화 전단지나 미술관 카탈로그 모으기 등 수집 전력도 꽤 있었고, 원체 공감과 연민을 잘 느끼는 성격인데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아 할수록 재미가 붙었다. 덕분에 관찰력이 많이 길러져 누군가 만날 때 관심을 표현하는 ‘접대 센스’도 많이 늘었다고.
이후 어학연수와 장기 여행을 떠나, 수집 영역은 영국과 유럽 일대, 중동 지역으로 확장됐다. 영국에 있을 때 방 구하랴, 정보 얻으랴 열심히 게시판을 보고 다녔더니, ‘For rent’라 쓴 글씨체만 봐도 집주인이 영국인인지 동유럽 사람인지 중동 사람인지 구별이 갈 정도로 손글씨 판독(?)률이 높아졌다. 글씨체도 글씨체지만, 메시지도 나라마다 인종마다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룸메이트를 찾는 광고에서 강조하는 것이 ‘세탁 자유’ ‘무선 인터넷 있음’이라면, 대개 그걸 쓴 주인공은 한국인이다.
이렇게 모아온 ‘물건’들을 싸이월드에서 운영했던 개인 매체 ‘페이퍼’에 연재해 공감도 많이 얻었는데, 페이퍼 운영이 중단되면서 백업을 못해 수집품을 대거 ‘날렸다’. 덧없이 사라지는 순간들, 저마다의 사연들을 붙잡아두었다 생각했는데, 그 역시 덧없이 날아갔다. “안타까웠죠. 하지만 여행을 오래 다니면서 물건에 대한 집착이 많이 사라졌어요. 지나치게 예민했던 마음도 둥글어졌고, 헛된 희망이나 왜곡된 꿈도 많이 정리했어요. 그래서 괜찮아요.”
그럼 이제 수집을 끊은 걸까? “그런 줄 알았는데 서랍을 열어보니 나라별·종류별로 별별 연필을 다 모으고 있네요. 요즘은 업무상 미팅이 많아 카페에 자주 가는데, 카페 상호가 인쇄된 냅킨을 모아볼까 해요. 그건 유용하잖아요. 후훗.”
김송은 송송책방 주인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이승환 구미 콘서트 취소 후폭풍…“김장호 시장은 사과하고 사퇴하라”
[단독] 입법조사처 ‘한덕수, 총리 직무로 탄핵하면 151명이 정족수’
윤석열 쪽 “엄연한 대통령인데, 밀폐 공간에서 수사 받으라니”
‘내란 비선’ 노상원 수첩에 정치인·언론인 ‘사살’ 표현 있었다
이승환 “‘정치 언행 않겠다’ 서약 거부, 구미 공연 취소 통보 진짜 이유”
윤상현, 트랙터 시위에 “몽둥이가 답”...전농 “망발”
12월 24일 한겨레 그림판
[속보] 헌재 “윤석열 통보서 받은 걸로 간주…27일 탄핵심판 개시”
계엄의 밤, 사라진 이장우 대전시장의 11시간…“집사람과 밤새워”
[단독] 윤석열, 3월 말 “조만간 계엄”…국방장관·국정원장·경호처장에 밝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