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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당신도 떠나

1년 일주일 3대륙 여행한 손수진씨
등록 2010-08-04 15:45 수정 2020-05-03 04:26
1년 일주일 3대륙 여행한 손수진씨. 손수진 제공

1년 일주일 3대륙 여행한 손수진씨. 손수진 제공

스무 살, 손수진씨는 서른 살의 자신을 상상했다. 경제력도, 커리어도 괜찮은 당당한 서른. 스물아홉에는 1년간 세계여행을 해야지. 지도로만 보던 세상을 자신의 발로 직접 밟고 서른을 맞으리라. 대학을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한살 두살 나이를 먹었다.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스물아홉이 지났지만 아직 돈이 모자라서, 커리어가 부족하니까… 그렇게 꿈을 “액자에 걸어놓고” 야근과 철야로 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사표를 내고 전세를 뺐다. 엎지르고 나니 다음은 쉬웠다. 여행을 떠나든 안 떠나든 삶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 아닌가 생각하니 무작정 내린 결정에 확신이 생겼다.

가야 할 곳에 관한 기준을 세웠다. 변화가 심해 10년 뒤에는 모습이 완전히 달라질 곳. 체력은 넘쳐나니, 조금 험한 곳이어도 괜찮겠지.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를 여행하기로 했다. 봄에 떠나 북반구에 겨울이 올 즈음 남반구로 내려가 겨울을 피하는 루트이기도 했다.

첫 여행지로 인도네시아를 골랐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귀었던 친절한 가족이 헤어지기 직전 잭나이프를 들이댔다. 1일 인출 한도만큼 현금을 털렸다. 그때 여행을 포기했다면, 옆방의 교성으로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벽이 얇았던 타이의 게스트하우스, ‘쩌거 이거’(이거 한 개)라는 마법의 한마디로 버틸 수 있던 중국 여행, 19시간을 미친 듯 널뛰는 지프를 타고 올라가 마주한 라다크의 황량하고 아름다웠던 하늘, ‘개새끼야’가 어디서든 통한다는 걸 알게 해준 여러 나라의 치한들, 대여섯 번 청혼을 받았던 아랍 국가, 여행자 사이에서 누가 더 천사 같은지 논란을 빚었던 이란과 시리아 사람들, 기니피그 구이를 먹었던 페루, 고산증을 견뎌내고 마주했던 볼리비아의 끝없이 펼쳐진 우유니 소금사막…. 그런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깜깜하게 모른 채 살았을지 모른다.

“혼자 다니니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어요. 이란에서 테헤란 대학생 두 명을 만난 적이 있어요. 둘 다 이름이 모르테자였는데, 하루 종일 저를 에스코트해서 이스파한 관광도 시켜주고 맛있는 것도 사줬어요. 헤어질 때 제가 서른이라고 하니 엄청 놀랐죠. 하하!”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 보이는 ‘해외형 베이비 페이스’가 빛났던 순간이다. 탄자니아에서 만난 한국인 노부부도 기억에 남는다. 중국부터 육로로만 아프리카까지 왔다는 그들은 콩고 난민캠프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위험한 지역이지만 살 만큼 살았으니 두려울 것 없다던 그들의 의지와 강단이 인상 깊었다고.

서른한 살, 수진씨는 세상의 진기한 풍경, 온갖 좋고 나쁘고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고 1년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하얗고 작고 통통한 서른에서 까맣고 여전히 통통한 서른한 살로. 서른둘, 수진씨는 지금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로 또다시 야근과 철야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돌아온 지 석 달 만에 재취업을 했어요. 1년간의 무모한 여행을 나름의 경력으로 봐주기도 했고, ‘그 녀석 강단 있네’란 시선을 받기도 했어요. 떠나기 전 내가 여행 간 사이에 남들보다 뒤처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돌아와보니, 남들도 그리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고, 저도 여행 다니는 동안 자랐더라고요.”

수진씨는 올가을 여행기를 내려고 준비 중이다. 많은 진귀한 경험이 담길 테지만 결국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이런 거다. “그러니까 당신도 떠나.”

김송은 송송책방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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