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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 아닌 게 ‘순위’라니 긴장되네

등록 2010-02-10 15:28 수정 2020-05-03 04:25
〈순위 정하는 여자〉QTV 제공

〈순위 정하는 여자〉QTV 제공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웃음도 석차순이 아니다. 하지만 순위만 잘 매겨도 웃음꽃이 터진단다. 어느 ‘공부의 신’ 집안 이야기냐고? 아니, 요즘 버라이어티쇼가 가장 잘 써먹는 필살기 ‘순위 정하기’ 말이다.

시즌을 마무리하고 있는 SBS 는 이 순위 정하기로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시골에서의 좌충우돌 소동은 웃겼다 말았다 기복이 적지 않았지만, 남녀별 순위를 정하는 마지막 순간만큼은 항상 긴장감이 철철 넘쳤다. 유재석·윤종신이 다투는 하위권은 그 나름대로, 초대 손님 중심의 상위권은 그 나름대로, 치열한 경합에 부끄러운 줄 모르는 아부질로 시청자의 배꼽을 잡았다.

최근 ‘걸그룹이 떴다’ 편에서는 아예 이효리 진행의 작은 ‘순위 정하는 여자’ 포맷이 만들어졌다. 인기 걸그룹 스타들이 대거 등장해서 ‘키스를 가장 잘할 것 같은 남자’부터 이 프로그램의 최고 벌칙인 ‘새벽 식사 준비’까지 남자들의 순위를 정하는데, 별것도 아닌 것이 그래도 ‘순위’라는 긴장감 속에 툭툭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웃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사실 이러한 순위 포맷의 최고봉은 일본 버라이어티쇼인 의 ‘순위 매기는 여자’다. 여자 연예인 10명이 등장해 ‘맨얼굴이 제일 못난 여자’ ‘뭘 해도 안 될 것 같은 여자’와 같은 주제로 자신을 포함한 출연진 10명의 순위를 작성한다. 그중 특정 출연자가 매긴 순위를 발표하고 일반인이나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매긴 순위와 비교하는데, 이 신경전이 독한 멘트를 마구 토해내게 한다. 카리스마로 후배들에게 직언을 넘어 비수를 꽂는 대선배, 방글방글 웃으며 할 말 다 하는 신예, 조신한 설정으로 공격을 피해가지만 결국 내숭을 폭로당하는 타입…. 다양한 캐릭터들이 서로를 귀엽게 물어뜯는 재미가 장난이 아니다. 특히 성적인 면이나 된장녀 생활에 대해서도 대놓고 말해버리는 솔직함은 한·일의 문화적 내성 차이를 깨닫게 해준다.

지난해 말부터 QTV에서 이 포맷을 가져와 한국판 를 내보내고 있다. 당연히 적지 않은 기대를 갖고 찾아보게 되었는데, 아직까지는 ‘글쎄올시다’다. 답답한 것은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가 다들 비슷하다는 데 있다. 도도한 내숭의 ‘엄친딸’ 이인혜 정도가 눈에 뜨일 뿐, 케이블을 돌리면 계속 보게 되는 출연진들의 변별력이 부족해 보인다. 게다가 이미 케이블엔 등 자폭형 프로그램이 적지 않은 상태여서, 웬만해서는 ‘충격 고백’ 효과를 얻기도 어렵다. ‘쿨한 척하면서 뒤끝 작렬할 것 같은 여자’의 순위에는 별로 관심이 안 간다. 대부분 뒤끝 많을 것 같다.

그런 때문인지 과 의 대진표식 순위 코너인 ‘이상형 월드컵’이 문을 닫게 된 게 너무 아쉽다. 김건모와 진정으로 감정이입하고, 한채영의 선택을 기다리며 두근두근하던 즐거움이 이젠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또 다른 ‘순위 매기기’가 우리의 선택을 받기 위해 찾아오겠지. 우리는 리모컨으로 순위를 매기면 된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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