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창단, 1991년 프로야구 1군 진출, 1999년 해체까지 통산 성적 455승 30무 655패, 승률 0.41, 네 번의 시즌 꼴찌, 두 번의 포스트시즌 진출, 나머지 시즌 성적은 6위 아니면 7위. 프로야구팀 쌍방울 레이더스의 발자취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도 만년 꼴찌 쌍방울을 추억하는 이들이 있다.
2008년 가을, 서울 홍익대 앞에서 열린 한 행사장에서 번개 문양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쌍방울 레이더스 유니폼이었다. 만년 꼴찌였던 그 쌍방울? 신기한 마음이 들어 다짜고짜 붙잡고 물어봤더니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 팬클럽’이란 팬카페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지식노점상(33)씨가 2008년 처음 만든 이 카페의 회원 수는 2009년 말 현재 1300여 명. 쌍방울 레이더스를 추억하는 이들이 모여 차곡차곡 자료를 쌓아가고 있다.
지식노점상씨는 재수를 하던 1995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팬이 되었다. 1995년은 쌍방울 레이더스가 세 번째 시즌 꼴찌를 기록한 해였다. 재수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투영됐기 때문일까. 보통 사람이 엘리트 사이에 끼어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연상됐다고 한다. 이후 1996년, 1997년 쌍방울은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노력하면 되는구나, 희망을 주었다. 그러다 1998년 모기업 쌍방울이 부도가 나고, 1999년 시즌 꼴찌를 마지막으로 2000년 1월16일 레이더스는 해체됐다.
팀이 사라지고 마땅히 응원할 팀이 없어지자 고향 부산의 연고팀인 롯데 경기를 보러 다녔다. 그때는 또 롯데가 암흑기였다. “전설의 시즌 97패를 두 번째로 보았죠. 처음 기록은 1999년 쌍방울이었고요. 2002년에는 롯데 경기를 보러 가서 69명이라는 한국 야구 최소 관중 기록에 동참하기도 했어요.” 2003년부터 쌍방울 선수들을 많이 인수한 SK 와이번스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SK는 인천이 연고지라 인천 야구만 강조하는 게 불만이었어요. 쌍방울 선수들이 없었으면 유지되지도 않았을 팀인데 말이죠. 그러다 제대로 화가 난 게 이전 인천 연고 팀이던 태평양 돌핀스를 기념하는 태평양데이 행사였어요. 대놓고 쌍방울의 역사를 부정한 거니까요.” 전북이라는 연고지를 인수한 기아도 쌍방울을 자신의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러다가 쌍방울의 역사는 그냥 사라지겠구나 싶어 팬카페를 개설했다. 꼴찌의 역사지만 소중한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회원들과 레이더스 물건 공동구매를 하기도 하고, 자료도 수집한다. 아무도 쌍방울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니, 팬들이라도 정리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최종 목표는 야구박물관이 지어질 때 쌍방울 레이더스 카테고리에 자료를 기증하는 것이다.
꼴찌 팀에, 그것도 사라진 팀에 애정을 쏟는 이유는 뭘까? “남들은 시류에 따라 자기 신념을 버리지만 최소한 저는 ‘야구’라는 부분에서는 자존심을 지키고 있습니다. 또 레이더스를 같이 응원하셨던 분들과 소중한 추억을 공유하는 게 좋습니다.” 그에게 쌍방울 레이더스는, 소중한 줄 몰랐는데 헤어지고 나니 보고 싶은 기억 속 연인이다. 그래서 팀이 영원히 기억되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야구장에서 쌍방울 레이더스 유니폼을 입은 그를 만난다면 응원해주시길.
김송은 만화월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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