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의 도시.’ 1703년 표트르대제가 세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정신적 삶의 위업’이라 한다. 아무것도 없는 발트해 어귀의 황량한 늪지에 건설된 이곳은 ‘정교적 러시아의 영혼과 유럽의 모더니티가 착종된 이종접합’의 인공도시다. ‘나의 것’과 ‘남의 것’이 뒤섞이면서 만들어낸 ‘이종교배’의 문화가 그 도시의 고갱이다. 이덕형 성균관대 교수(러시아문학)가 (산책자 펴냄)에서 그 ‘환영의 도시’에서 살다 간 위대한 작가의 삶과 문학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몽환의 공간 ‘판타스마고리아’“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던 모순과 역설, 이율배반과 정신착란, 환각과 환영의 판타스마고리아를 누구보다도 먼저 민감하게 느꼈던 사람이었다.”
유럽 열강으로 도약하려던 표트르 대제의 욕망은, 종교개혁 이후 나락으로 떨어진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곧추세우기 위해 시작된 서구의 웅장한 바로크 문화로 이어졌다. 이를 단기간에 모방·이식하려는 시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낳았다. 지은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와 유럽, 가톨릭의 바로크와 정교의 슬라브주의 사이에서 태어난 몽환의 공간, 곧 판타스마고리아”라고 지적한다. ‘환영’(幻影)이란 뜻의 ‘판타스마’에서 유래한 ‘판타스마고리아’는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발명된 환등기의 투사 이미지를 일컫는다.
“이 도시에 기하학이 등장했다!” 도시 건설 초기 러시아 정부의 회계 감사관이 도로를 측량하면서 이렇게 말했단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합리적 이성의 은유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등장한 것은 결국 서구 라틴 가톨릭 문화권의 핵심 코드인 ‘합리성’과 ‘이성’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로 대표되는 비잔티움 정교 문화권에선 합리성과 이성보다 이를 초월하는 ‘침묵’과 ‘관조’를 인식의 기초로 삼아왔다. 이런 이질적인 두 문화의 충돌이야말로 도시를 휘감은 모순과 부조리의 뿌리였다. 지은이는 이렇게 썼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합리적 이성이 도입되자 러시아 사람들의 눈에는 이 도시가 기이하게 보였을 것이고, 타락한 로마 가톨릭 문화에서 건너온 유클리드 기하학은 적그리스도의 학문으로 비쳤을 것이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해 거의 적대적이라고 할 만큼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삶은, 세계는, 신은, 인간은 ‘2X2=4’라는 합리성의 도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2X2=4’라는 상징은 합리적 이성이자 자유가 박탈된 서구 가톨릭 세계의 그리스도교였다.”
그 판타스마고리아의 도시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스무 번 이상 이사를 다녔다. 도박과 현시적 소비의 굴레를 벗어내지 못했던 그는 평생 한 번도 그 도시에서 정주처를 갖지 못했다. 지은이는 “마치 환영이나 그림자처럼 그는 ‘집’의 실체를 모르는 부초였고 그 자신이 이 도시의 판타스마고리아 자체였다”며 “도박에 몰입하다가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섬망 상태에서 소설을 쓰다가 어슴 새벽의 여명에 겨우 잠드는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더니티의 한 현상이었다”고 표현했다.
스무 번 넘게 이사하며 정주 못 해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 대한 평론이자 전기이기도 한 이 책은 또한 현란한 지적 기행문이기도 하다. “산책자의 눈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살던 구석방과 모퉁이 집들을 바라보고, 냄새 맡고, 만져보고 싶었다”는 지은이는 실제 상트페테르부르크란 ‘판타스마고리아’를 일평생 배회한 거장의 흔적을 발품 팔아 더듬었다. 1837년 5월 공병학교 입학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첫 밤을 보낸 ‘모스코프스키 대로 22번지 네아폴 호텔’에서 출발해, 최후의 걸작인 집필을 마친 뒤 탈진해 1881년 2월 숨을 거둔 ‘쿠즈네치니 골목 5번지’까지 땀으로 그 도시를 주유했다. 이만한 헌사도 드물 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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