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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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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사랑에 빠지다


함께 걷고 자주 마주치다가 자연스레 눈 맞는 중년 남녀들…
비싸거나 답답하거나 골치 아프거나 ‘갖가지 연애의 방식들’
등록 2009-11-20 04:35 수정 2020-05-02 19:25
길에서 사랑에 빠지다. 한겨레 김소민 기자

길에서 사랑에 빠지다. 한겨레 김소민 기자

카미노 순례자의 주류는 40대 이상 중년이다. 특히 이제껏 죽자고 달렸는데 정신 차려보니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중년이 꽤 많다. 결핍도 제각각이라 발 묶인 사람들은 떠나고 싶어하고 떠났던 사람들은 구속되길 갈망한다.

20대부터 이제까지 은행에서 숫자를 만진 독일인 마크는 상관한테 엿 먹인 뒤 탈출하는 걸 꿈꾼다. 레스토랑을 차리고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한다. 막상 레스토랑 주인인 영국인 던컨은 식당만 생각하면 뒷골이 당긴다고 한다. 제대로 굴러가게 하는 데 30대를 몽땅 갖다 바쳤는데 아직도 말썽이 끊이지 않으니 애물단지를 팔아버리고 싶을 때가 많단다. 16살에 학교를 자퇴하고 감정에 충실하게 세상을 떠돌았던 벨기에인 디디에는 넥타이를 매고 애를 낳아 아빠로 살아보려 한다. 살아 있다는 느낌으로 닭살 돋게 하는 새로운 전환점을 꿈꾸며 그들은 걸었다.

이 질풍노도의 시기, ‘중년의 위기’를 건너는 어른들은 두 살짜리 엎어지듯 길에서 사랑에 빠져버렸다. 같은 목적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를 향해 가고, 물집·관절통·근육통이라는 공통 소재 3종 세트를 기본으로 갖춘 무리가 툭하면 바나 숙소에서 마주치게 되니 눈 맞기 이보다 알맞은 곳도 없다. 풍광 끝내주지, 마음 흔들리지, 짜릿한 삶의 감각에 목마른데다 순례자끼리 끈끈한 정까지 흐르니 여기저기서 연애가 이어졌다. 문제는 계획하기 어렵다는 거다.

그래서 때로는 큰돈 드는 수가 있다. 40대 독일 여자 사비나와 스페인 남자 밀란은 한 알베르게에서 위침대 여자, 아래침대 남자로 만났다. 침대야 알베르게 자원봉사자가 배정하니 그들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날 밤, 그들은 침대 곁에 서서 밤새 수다를 떨었다. 사비나는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하여간 밀란의 모든 말이 그렇게 웃겼다고 했다. 사비나는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중이었고 밀란은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다음날 밀란은 짐을 꾸려 사비나와 함께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그들은 순례길이 끝난 뒤에도 독일과 스페인을 비행기로 오가며 연애 중이다. 하늘에 돈을 뿌리고 있는 사비나는 항공사에서 은밀히 카미노를 후원하며 원거리 연애를 조장하고 있을 거라는 음모론을 내놓았다.

속 터지는 수도 있다. 캐나다인 스티븐(52)은 애인을 갈구했다. 화학을 전공해 잘나가는 국책연구소에 다니던 그는 20대 후반에 과학이 지겨워져버렸다. 그는 철학으로 전공을 바꿔 대학에 다시 들어가 철학과 교수도 됐다. 이과·문과를 섭렵한 그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으니 ‘모든 여자는 날 싫어해’ 콤플렉스다. 고등학교 때 왕따를 심하게 당한 경험이 있는 그는 ‘모두 날 싫어해’를 극복하느라 안간힘을 쓴 끝에 ‘몇몇 남자들은 날 싫어하지 않아’ 경지까지는 도달했다. 하지만 마지막 고지는 만만하지 않아 그는 여전히 ‘여자들은 날 싫어해’를 후렴구처럼 되풀이했고 그 말이 매력을 심각하게 깎아먹고 있었다.

그런 그가 카미노에서 한 여자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안타깝게 상대는 영어를 거의 못하는 멕시코인이었다. 스티븐의 박식함은 완벽하게 무용지물이었다. 그래도 그는 노력했다. 항상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소통을 시도했다. “콜라 마실래, 커피 마실래?” “뜨거운 거 마실래, 차가운 거 마실래?” 대화는 언제나 이 범주를 맴돌다 사그라졌다. 스티븐이나 애인이나 답답할 만도 하겠지만, 장점도 있으니 애인이 그의 매력 감퇴용 후렴구를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니면 골치 깨질지도 모른다. 60대 독일인 힐트우드는 생각을 정리하려 카미노를 걷기로 했다. 그의 남편은 그가 반평생 줄기차게 사랑한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최근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한 남자한테 반해버렸다. 남편을 떠나자니 이제까지 살아온 정이 울고, 애인을 버리자니 사랑이 슬펐다. 마음을 다잡으려고 온 이 길에서 힐트우드는 고민에 귀기울여주던 또 다른 남자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들 누구도 이렇게 엮일지 예상하지도 앞일을 확신하지도 못했다. 다만 지금, 상기된 얼굴로 심장 박동 소리에 귀기울일 뿐이었다.

김소민 기자 한겨레 편집팀 pretty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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