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라고 인간성 검사받나? 걷다보면 별로 필요한 것도 없고, 남들 배낭이나 내 거나 궁색하긴 매한가지니 탐할거리도 없다. 안면 다 텄는데 삿대질도 못할 일이다. 그래도 별별 군상 다 부대끼는 순례길이니, 안전하다고 해도 뒤로 넘어져 코 깨지는 수가 있다.
‘그래! 오늘 한번 제대로 걸어보는 거야.’
걷기 시작하는 아침 6~7시에는 이렇게 결심한다. 스페인 시골마을 돌담이 동틀 녘 보랏빛으로 물들지, 바람은 코끝에 살랑대지…. 그 순간만큼은 8시간 뒤 다리 질질 끌며 머리는 땀으로 뒤범벅되어 있을 나를 까먹는다. 중소도시 아소프라를 떠나는 날 아침에도 그랬다.
똥차 한 대가 길 옆에 서더니 스페인 젊은이 두 명이 고개를 내밀며 손짓으로 이리 와보란다. 젊은 남자가 부르면 꼭 그렇게 가고 싶어진다. 커다란 파이를 주기에 덥석 받았다. 눈은 좀 풀리고 술 냄새도 났지만 순례자들한테 먹을거리 나눠주는 행인을 몇 명 만난 터라 호의를 의심하지 못했다. 게다가 점심값도 굳게 생겼으니 망설일 리 없었다. ‘고맙다’ 하고 가려는데 이 젊은 남자들이 차를 몰고 계속 쫓아왔다. 생색내는 거야? 모른 척하고 걸으니 이번엔 상스러운 기운이 충만한 스페인 욕설을 나한테 퍼붓기 시작했다. 계속 가니 이제는 앞을 가로막으며 대놓고 지분거렸다.
성질나면 뵈는 게 없는 터라 나도 대거리했다. 가방에 매달아놨던 파이를 낚아채 차 앞 창문으로 냅다 집어던져 버렸다. ‘먹고 떨어져라 호랑말코들아!’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이성이 덜미를 잡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 소중한, 단 하나밖에 없는 생필품 수건, 그것도 스포츠 타월이 파이와 함께 그 ‘막돼먹은 녀석들’ 차 속으로 쑥 말려들어 가고 말았다.
내가 누구냐. 온몸부터 빨래까지 비누 하나로 씻는 순례자다. 단 두 벌밖에 없는 바지 중 하나를 걷기 이틀 만에 잃어버린 뒤 잠옷을 겉옷처럼 입고 활보한 나다. 마지못해 산 싼 티 줄줄 나는 바지는 한국에서 1960년대 이후 자취를 감췄을 디자인으로, 한국인 순례자들은 그 바지를 볼 때마다 “서커스나 해라”라고 야유했다. 그런 굴욕도 견뎌낸 내가 타월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단 하나의 지상명령어 ‘타월을 사수하라’에 지배당했다.
내가 손을 차 안으로 쑥 집어넣고 여기저기 헤집어 타월을 찾기 시작하자 이런 사태를 예상해본 적 없는 ‘막돼먹은’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살짝 들어 밑에 낀 타월을 빼줄 만큼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타월을 집자마자 나는 뒤로 돌아 냅다 달음질쳤는데 그제야 제정신 든 녀석들이 후진해서 쫓기 시작했다.
새벽 3시도 아니고 아침 7시에 술주정뱅이들에게 쫓기다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도와줘”라고 소리치다 순례자 클라우디아와 그의 아버지 오토, 애인 로베르토가 나타났다. 그들도 큰 힘은 없는지라 우리는 바로 옆 문 연 가게로 숨었다. 경찰을 불러달라는데 주인 아줌마는 심드렁했다. “냅둬. 불러봤자 다 도망간 다음에 와.”
‘나사 하나 빠진 애들’이라 온 동네를 뺑뺑이 돌더니 재미없어졌나 보다. 그날 클라우디아 일행은 나랑 같이 걸어줬다. 내가 고마워서 클라우디아한테 “에마톰슨 닮았다” 했더니 좋아서 죽는 모습이었다. 그도 역시 중요한 내용은 다 까먹는 카미노 특유의 풍토병에 걸려 막상 에마 톰슨이 나온 영화 제목을 기억해내지는 못했다. 하루 종일 만나는 사람마다 “에마 톰슨 나온 영화 알아?”라고 묻는 클라우디아를 보고, 아버지 오토는 “그 영화 엄청나게 중요한 모양이네”라고 중얼거렸다.
이스라엘 여자 아디(24)도 경을 친 적이 있다. 알베르게에서 샤워하는 동안 돈을 몽땅 도둑맞았다. 카드 비밀번호 적어놓은 종이까지 잃어버려 그는 거지꼴이 됐다. 그래도 태평해 보이기에 ‘괜찮냐’고 물으니 이 애늙은이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길을 걷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도와줬어. 지금 딱 한 명 나쁜 사람 만났다고 내가 왜 우울해해야 해?” 길에서 만난 친구들은 그에게 돈을 꿔줬고, 밥을 해줬다. 그는 계속 걸을 수 있었다.
김소민 기자 한겨레 편집팀 pretty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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