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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도착, 눈물, 눈물… 아 콧물!


39일 만에 여장을 풀고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성당에서 감동의 진한 국물을 우려내다
등록 2009-12-17 18:54 수정 2020-05-03 04:25

지난 7월4일 낮 12시께, 걷기 시작한 지 39일 만에 도착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성당은 땀내와 열기로 달떠 있었다. 매일 그 시각에 열리는 순례자를 위한 미사에는 지금 막 길을 끝낸 낯익은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가 함께 해냈다’는 묘한 열기에 들떠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도 서로에게 달려들어 얼싸안으려 하는 찰나, 코를 타격하는 땀내, 쉰내에 멈칫하며 대충 등만 두들기기도 했다.

산티아고에 도착해 신이난 순례자 친구들. 한겨레 김소민 기자

산티아고에 도착해 신이난 순례자 친구들. 한겨레 김소민 기자

우리는 이 길을 끝내서 기뻤고, 이 길을 떠나야 해서 슬펐다. 휘몰아치는 온갖 감정과 독한 체취에 취해 모두 알딸딸한 순간, 한 수녀가 홀로 성가를 불렀다. 11~12세기에 지어진 성당 안으로 노래가 공명하자 눈물이 솟구쳤다. 콧물은 더 솟았다. 연방 소매로 닦아내던 그때, 그렇게도 누군가에게 무조건 고마웠던 거 같다. 살아 있게 해줘서.

감동의 진한 국물을 우려내려는데, 신부가 설교를 시작했다. 성당 바닥에 앉은 채로 나는 심하게 졸고 말았다. 감격의 눈물이 그렇게 빨리 하품의 눈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순례길의 공식적인 마감 행사는 성당 안에 있는 야고보상을 뒤에서 껴안는 것이다. 긴 줄에 서 있는데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는 야고보상을 안을 수 없단다. 스페인에서는 동상도 오후 휴식 ‘시에스타’를 즐겼다.

도가니 빠지게 걸었으니 공식적인 증서 하나는 챙겨야 뿌듯하다. 그거 없으면 누가 믿어주겠나. 순례자 사무소에 들러 스탬프 가득 박힌 순례자 여권 ‘크레덴시알’을 보여주니 외국어 잔뜩 적힌 종이에 내 이름을 써줬다. 담아갈 종이 상자는 사야 한다기에 앞에 있던 통에 1유로를 넣었는데 아뿔싸 그건 기부 통이란다. 감격해 울고불고할 때는 언제고 1유로가 아까워 “꺼내주시면 안 돼요?”라는 말이 목구멍 직전까지 올라왔다.

골목마다 순례자로 넘실거렸다. 이산가족 상봉하듯 그간 안부와 길동무 소식을 물었다. 순례길에서 5살 딸, 13살 아들과 함께 걷는 스페인 부부와 자주 마주쳤는데 말은 안 통했다. 오직 아들 이름을 부르며 “알렉산더야, 안녕”이라고 말하면 꼬마가 얼굴이 시뻘게졌던 것만 기억났다. 딸이 힘들다고 투정 부리면 아기용 수레에 싣고 아빠가 끌며 걸었고 수레에는 해적 깃발이 펄럭였다. 그 ‘펑크 가족’도 산티아고 골목에서 마주쳤는데 엄청나게 반가웠다. 손짓·발짓을 하며 수선을 피운 뒤 사진도 찍고 나니 과한 건 아닌가 싶고 쑥스러워 그 집 아들 이름 한 번 더 불러보고 얼른 헤어졌다.

이후 아무 때나 웃는 정동희씨, 존재만으로도 동희씨에게 큰 기쁨을 준 박혜수씨 그리고 나, 이른바 ‘거지 삼형제’는 돈을 최대한 아끼며 산티아고의 밤을 즐기기로 했다. 술집에 가면 비싸니까 제일 싼 포도주를 샀다. 그런데 병따개가 없다. 정씨는 술집에 들어가더니 병만 따왔다. 박씨와 나는 약간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엔 잔이 없었다. 정씨는 자신이 아까 쓰레기통에 생수 페트병을 하나 버렸는데 그걸 잘라 컵을 만들자는, 참으로 추접스러운 아이디어를 내놨다. 그래도 돈이 없어서 모두 동의했다. 축제 분위기가 한창인 산티아고의 밤, 우리는 이 쓰레기통 저 쓰레기통을 뒤졌다. 지쳐 병나발을 불고 싶어질 즈음, 정씨는 자신이 버렸던 곳으로 추정되는 쓰레기통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근거는 없었으나 피곤해서 믿기로 했다. 그는 쓰레기통을 뒤지더니 페트병 하나를 찾아내 자기가 버린 게 확실하다고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끝까지 믿기로 했다.

불 밝힌 산티아고 성당은 위엄 있고 고혹적이었다. 그 앞 광장에 앉아 우리는 페트병을 잘라 만든 컵 하나로 포도주를 돌려 마셨다. 여기저기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불콰해져 셋이 셀카도 함께 찍는데 꼭 한 사람 들어가면 한 사람이 빠졌다. 셀카도 제대로 못 찍는 서로를 비난하는 재미에 빠져들 때쯤, 애늙은이 이스라엘 친구 아디, 겉모습만 선지자인 벨기에인 윌름, 공주 몰골에 무수리 마음을 지닌 엘리가 광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하루이틀 사이 모두 흩어져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우리, 한동안 서로를 가족보다 가깝게 느꼈지만 결국 다시 보기 힘들어질 걸 아는 우리는, 그날 한순간의 불꽃놀이처럼 공중분해했다.

김소민 기자 한겨레 편집팀 pretty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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