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에게 다리 근육만큼 중요한 건 확실히 요리 실력이다. 알베르게에서 요리를 잘하면 돈도 굳고 사랑도 받는다. 생존의 기본기를 갖추지 못한 성인은 죗값을 치러야 한다.
우선 피 같은 돈을 흩뿌려야 한다. 마을 레스토랑에서는 보통 식사보다 2~3유로 싼 평균 9유로짜리 ‘순례자 메뉴’를 파는데, 싼 게 비지떡이라고 말이 전채·메인·디저트지 그걸 다 섞어서 저어 먹어도 맛에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을 때도 있다. 그래도 배고프니 싹싹 긁어먹는다. 학생 박혜수씨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순례길의 큰 은혜, 카페콘라체(밀크 커피)도 안 마셨다. 그런 그가 큰마음을 먹고 ‘순례자 메뉴’를 한번 시도해보겠다고 나섰다가 지옥불에 시달리다 나온 듯한 지친 샐러드를 보고 경악했다. 그는 어떻게든 돈값은 했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 “그래도 그렇게 맛이 없는 건 아니다”라며 물에 삶은 것 외에는 아무런 조리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게 분명한 고깃덩어리에 소금을 뿌려댔다. 맛없어도 졸아서 티도 못 냈다. 내가 똥 씹은 표정으로 수프를 깨작거리니까 종업원이 ‘그런 식으로 먹으면 바로 접시를 빼버리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맛없어?” 지레 겁먹은 나는 둘러댔다. “아니 전에 뭘 먹어서….” 아직도 원통하다. 다음에 가게 된다면 꼭 스페인어로 당당하게 “맛없다”라고 말할 거다.
때로는 배짱 서비스를 참아야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우리를 쳐다봐주지 않는 종업원에게 복수하려고 다른 집으로 자리를 옮긴 적도 있다.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우리가 가버린 사실도 몰랐을 거 같다. 순례자들끼리 왜 종업원이 불친절한지 진지하게 토론하기도 했다. “어차피 순례자들은 계속 몰려올 테고, 단골이 될 수도 없는 사람들한테 신경 쓸 필요가 있나” 등 현실적 지적부터 “일에 목숨 걸지 않는 문화인가 보지”라는 문화 다양성 차원의 해석까지 나왔다. 손미나 아나운서가 쓴 에선 다들 그에게 친절하던데, 내 생각엔 손님의 매력 정도에 따라 다른 거 같았다. 하여간 스페인 종업원 업계에 한국인의 총알 서비스 정신으로 투신하면 큰 돌풍을 일으킬 수 있을 듯했다.
돈 쓰기 싫으면 낯이라도 두꺼워야 한다. 한국 아주머니한테는 무조건 잘 보이는 게 좋다. 순례길을 시작하고 이틀 만에 한국인 부부를 만났는데 닭볶음탕을 얻어먹었다. 다음날 아주머니는 밥과 고추장을 김으로 만 것을 가방에 넣어줬다. 죽자고 그 부부를 쫓아다녔는데 아쉽게도 그들은 무쇠다리 커플이었다. 뒤처져 홀로 낯선 마을 알베르게에 짐을 푼 날, 어찌나 외롭던지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전부터 친했던 벨기에인 얀이 선물처럼 서 있었다. 사실 나는 얀보다 얀의 요리를 더 좋아했다. 그날 저녁, 이미 밥을 먹은 그는 알베르게의 굶주린 식신들을 위해 올리브기름을 둘러 생선을 굽고 레몬즙을 듬뿍 뿌렸다. 스파게티 국수를 삶고 파프리카를 볶았다. 미친 듯이 접시에 코를 박고 먹으며 이제부터 죽자고 그를 따라다니기로 결심했다.
그렇다고 주는 대로 다 먹다가는 낭패 본다. 그날도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순례자들끼리 내친김에 스페인 전통주 오루호를 마셔댔다. 꽤 독해 금방 취기가 올라왔다. 다들 불콰해지자 장난기 가득한 스페인 청년 네레오가 자기가 몰래 가져온 대마초를 피우겠느냐고 물었다. 박아무개씨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네레오를 따라나섰다. 두세 시간쯤 지나서 알베르게로 달려 들어온 네레오가 자기 좀 도와달란다. 술과 대마초가 시너지를 일으켜 박씨는 땅바닥에 얼굴을 묻고 엎어져 있었다. 더 잔인한 것은 한국인 얼굴에 똥칠했다며 자책할 만큼 그 처참한 순간에도 그에게 이성이 살아 있었다는 거다. 순례자 박씨는 하필이면 성당 바닥에 위 속에 있는 모든 찌꺼기를 속죄하듯 쏟아냈다. 침대로 데려가겠다니까 또 토할지 모른다며 샤워실에 두고 가라고 자존심을 세우던 그는 그날 차가운 타일 위에서 잤다. 그가 입 돌아가지 않은 것만 봐도 카미노 길에 신은 있는 거 같다.
김소민 기자 한겨레 편집팀 pretty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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