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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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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말하기 전에는


위풍당당하고 예쁜 네덜란드 대학원생 엘리…
알고 보니 가공할 코골이, 말을 트고 나니 자존감 결핍의 연애를 고백해
등록 2009-10-22 17:32 수정 2020-05-03 04:25
엘리는 전형적인 자존감 결핍 여성이었다. 남자와 사귀면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이래도 내가 좋아?’를 확인해대는 게임을 벌였다. 사진 김소민 기자

엘리는 전형적인 자존감 결핍 여성이었다. 남자와 사귀면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이래도 내가 좋아?’를 확인해대는 게임을 벌였다. 사진 김소민 기자

네델란드 대학원생 엘리(26)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심하게 쫄아버렸다. 바에 널브러진 남루한 순례자들 틈에서 그의 어깨 위로 아침 햇살이 걸렸다. 커다란 귀고리가 위풍당당하게 반짝였다. 그는 예뻤다. 두 번째 마주쳐서도 눈을 못 맞췄다. 알베르게 앞으로 그가 허리를 곧게 펴고 성큼성큼 걸어 왔는데 자신감 보강 자양강장제라도 매일 마셔대는 것 같았다. 세상에 꿀릴 것 없어 보이는 그 앞에 서면 나는 몸종같이 쪼그라들 듯했다.

두 명씩 한 방을 쓰는 알베르게에서 그와 짝이 된 날, 나는 긴장했고 안도했다. 괜한 말 꺼냈다 무시당하지 않을까 싶었다. 한편으로 저 아름다운 콧구멍에서는 숨소리만 날 것이니 오늘 밤은 숙면하리라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엘리랑 세 번째 만난 날, 상상과 기대는 유리그릇 같은 것이란 걸 알게 됐다.

그날 밤, 그 콧구멍에서는 가공할 위력의 코골이가 뿜어져나왔다. 그 괴력은 벽을 타고 넘어 이웃의 잠도 모조리 깨놓았다. 잠잠해지는가 싶으면 장밋빛 입술 사이로 살인적인 이갈이가 스며나왔다. 다음날 상쾌하게 “잘 잤느냐”라고 묻는 엘리에게 다크서클을 무릎까지 늘어뜨린 나는 차마 “너는 잠이 오디?”라고 받아칠 수 없었다. 그 뒤 순례자들은 엘리가 머물 알베르게를 점쳐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밤, 말을 튼 그는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의 연애는 자존감 결핍 여성의 전형적인 패턴을 보여주는 듯했다. 괜찮다 싶은 남자도 자기 좋다 하면 시시해진다. 어떤 문제가 있는 남자기에 나 같은 여자를 좋아할까 의심에 사로잡혀 그 의혹에 들어맞는 증거를 샅샅이 찾는다. 사귀게 되면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러시안룰렛 게임’을 벌인다. ‘이래도 내가 좋아?’ 게임이다. 집요한 사랑 확인 시험질로 결국 상대는 나가떨어진다. 슬픈 증거물을 손에 쥔 그는 ‘거봐, 너도 날 사랑하지 않지’라고 되뇐다. 상대가 떠날 것이 거의 확실한 연애만이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그는 순례길에서 나이가 16살 많고 애도 있는 배불뚝이 유부남과 엮이게 됐다. 이 청승맞은 미녀는 약속 장소에서 7시간을 기다린 뒤 바람맞았다. 그는 “그래도 그 사람과 있으면 마음이 불안하지 않아. 그가 나를 떠나더라도 내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 상황 때문일 테니까”라고 말했다.

엘리랑은 이상하게 길에서 계속 만나게 됐다. 걷고 말하는 거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엄마가 아빠랑 날이면 날마다 다툰 뒤 엘리에게 하소연할 때마다 어린 엘리는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가 괜찮은지는 신경써주지 않았다. 그리고 난독증이 왔다. 그걸 극복하니 이번엔 거식증이었다. 살이 뼈에 랩처럼 달라붙었는데도 뚱뚱하다는 강박관념에 며칠씩 굶고 나면 세상이 음식 씹는 소리로 가득 찬 것 같았다고 한다. 겨우 넘어서니 지독한 우울증이 몰려왔다. 몇 달씩 방에서 나오지 않고 콘플레이크를 씹어 연명하던 그는 ‘이러다 죽지’ 하는 공포를 맛봤고 스스로 병원에 전화했다. 1년 뒤 그는 병원에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는 용감하게 노력한 끝에 이제 잘 읽고 쓰며 적당히 살이 올랐고 함박웃음으로 사람들과 놀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자신의 남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뒤꿈치 까지도록 걷는다. 순례자들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써두고 가는, 순례길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곳 ‘크로스 데 페레’에 그는 ‘자존감’이라 적은 돌을 놓았다.

그와 걸을수록 그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 너, 세상을 사랑할 만하고, 살 만하다고 믿으려 애써 버둥대는 건 누구나 매한가지일 테니 말이다. 비가 추적이던 어느 날, 나는 상처투성이 그에게 끈끈한 연대감을 느꼈다. 그리고 두 명씩 짝지워 한방을 주는 다른 알베르게에서 엘리는 그 정을 시험할 큰 시련을 던져줬다.

“너랑 같은 방 쓰고 싶어.”

다음 날 나는 다크서클을 그림자처럼 늘어뜨렸다.

아테네 여신이 아니라 코골이에 눈물 많은 여자 엘리, 그를 처음 봤을 때 내가 만난 건 누구였을까? 어쩌면 이제까지 실제 세상이 아니라 내가 만든 세상을 보고 떨고 있는지도 몰랐다. 엘리를 만난 뒤 무서워 보이는 사람한테도 한번 말 붙여보리라 다짐했건만 변하는 건 쉽지 않아, 내가 쫄아 피한 사람들 명단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자유로운 영혼 같던 영국인 예술가, 반장만 했을 듯한 활달한 미국 청년들….

김소민 기자 한겨레 지역팀 pretty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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