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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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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진정 그 길을 걸었단 말입니까


피곤에 절어 돌아가는 퇴근길, 이 세상 전체한테 사랑받던 나를 떠올리다
등록 2009-12-24 14:11 수정 2020-05-03 04:25

믿을 건가 말 건가? 막판까지 헷갈렸다. 지난 7월6일 아침 9시에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를 떠나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6시께 알베르게를 나서는데 대문이 잠겨 있었다. 담장은 내 키보다 1.5배는 높아 보였다. 게다가 끝에는 뾰족한 작은 창들이 박혀 있었다. 알베르게에서는 들고 날 수 있는 시각이 보통 정해져 있는데 관리인이 어젯밤 통금이 지난 뒤 잠그고 퇴근해버린 것 같았다. 새벽길 걸으며 지난 39일을 돌아보며 막판 벼락치기로 깨달음 한번 얻어보려 했는데 사색이고 뭐고 똥줄 타들어가게 생겼다.

산티아고 길을 나타내는 표시. 조개는 순례자의 상징이다. 한겨레 김소민 기자

산티아고 길을 나타내는 표시. 조개는 순례자의 상징이다. 한겨레 김소민 기자

황당해서 두리번거리는데 층계에 껄렁해 보이는 청년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알베르게 안에 있으니 순례자인 거 같긴 한데 어디서 불량하게 놀았을 법한 행색에 게다가 남루했다. 사실 몰골로 따지면 걔들이 날 무서워해도 모자랄 판인데 불안에 떨다 보면 꼭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게 된다.

“도와줄까? 너 혼자서는 저 담 못 넘어.” 어쩌겠나. 비행기 놓치면 다음 티켓 살 돈이 없었다. 큰 배낭 속에야 썩어빠진 속옷에 침낭밖에 없으니 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갑·여권 등이 든 작은 배낭을 주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꾸역꾸역 작은 배낭을 어깨에 둘러메고 담장을 넘겠다고 덤비니 한 명이 대뜸 나무랐다. “그것도 내려놔야지. 가방 걸려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미쳤어?” 심하게 갈등하면서 또 쟤들이 내가 의심한 거 눈치챈 거 아닐까 하는 눈치까지 봐야 하니 골치가 아팠다. 모르겠다. 가방을 내려놓고 나니 두 명이 손으로 층계를 만들었다. 나는 그들의 손과 어깨를 밟고 담장 꼭대기 창을 잡았다. 그 친구들이 힘을 짜내 내 엉덩이를 밀어올렸다. 뾰족 창에 엉덩이를 찔릴 듯 아슬아슬 위에 서니 그 친구들이 배낭을 들어올려줬다. 그제야 담을 사이에 두고 통성명했다.

산티아고콤포스텔라는 기쁘고 쓸쓸한 도시다. 거의 한 달을 같이 걸어 찐득찐득 가족같이 느껴졌던 길동무들도 도착한 날 감격에 한바탕 놀고 나면 일상으로 흩어진다. 하루 더 남았던 박혜수씨, 이틀 전만 해도 골목마다 아는 얼굴 가득했던 도시에서 졸지에 낯선 혼자가 됐다고 한다. 순례자에게는 산티아고 도착이 일생일대 성취겠지만, 도시는 밥을 먹으면 똥을 누듯 그렇게 매일 한 꾸러미 새로운 순례자들을 뿜어냈다.

함께였던 시간들이 신기루 같아질 때가 있다. 내가 자괴감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때 “사람이 완벽해서 사랑받는 게 아니야”라고 말해줬던 애늙은이 아디, 자기를 평생 지켜줬다는 천사 인형을 선물로 준 엘리…. 헤어진 뒤 한 달 두 달 지나니 전자우편도 뜸해졌다. 아디는 남자친구와 함께 살기로 했다고 한 뒤 감감무소식이다. 엘리는 특수학교 교사가 되겠다고 공부 시작하더니 소식이 뚝 끊겼다. 은행 때려치우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친구한테 “우리 같이 레스토랑을 열자”는 문자를 보냈다가 씹힌 마크는 여전히 은행에 다닌다고 했다.

걸었던 시간이 믿기지 않을 때도 있다. 나, 걷기 전하고 거의 똑같다. 여전히 누구라도 행여 무시하지 않을까 날 세우느라 퇴근해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피곤에 절어 잔다.

하지만 때때로 끝없이 이어지던 밀밭, 인간을 꼬치로 꿰먹겠다는 듯 달려드는 해와 함께 아무 이유 없이도 이 세상 전체한테 사랑받는 기분이 들던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그렇게 즐거울 수도 있는 것이다.

오지 않는 답 메일에 대한 서운함도 잊혀져갈 즈음, 우편물 하나가 배달됐다. 팔리지 않을 그림과 노래만 만들어내던 윌름의 첫 앨범이 들어 있었다. 윌름 작사·작곡·제작·연주 앨범 (산티아고 길을 표시하는 화살표)였다. 들어보니 역시 안 팔릴 것 같았다. 앨범엔 그가 자주 부르던 순례자 구전 노래도 담았는데 사실 그 노래가 가장 좋았다. “우리는 매일 길을 나선다. 아침마다 조금 더 나아간다. 날마다 길이 우리를 부른다. 콤포스텔라가 부르는 소리다. 가자! 가자!” 이 노래를 듣다 보면 그래 까짓거 한번 믿고 가보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도 그렇고 남도 그렇고.

김소민 기자 한겨레 편집팀 prettyso@hani.co.kr

*이번호로 ‘나도 간다, 산티아고’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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