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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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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가면 콜라다!

자고 먹고 싸고 걷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순례자의 하루
등록 2009-10-15 14:56 수정 2020-05-03 04:25

고백하자면 하루에 8시간씩, 걷는 내내 내 머릿속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한 건 콜라였다. ‘다음 마을에 닿기만 하면 바로 콜라 마셔야지’ ‘조금만 더 가면 콜라다’ ‘다이어트 콜라를 마실까 그냥 콜라를 마실까’…. 걷다 보면 근사한 깨달음 하나쯤 건질 줄 알았는데, 또렷한 건 콜라를 향한 물밀듯 몰려오는 사랑이었다. 나만 그러냐? 그날도 20km 정도 기듯 걸어 스페인의 작은 마을 비아나에 도착해 작은 바에 널브러져 있는데 곧이어 중년의 진지해 보이는 독일인 베른트가 철퍼덕 짐을 내려놓으며 고백했다. “사실 내 유일한 목표는 밀크커피야.” 이어 얼굴 허물이 벗겨진 레이철이 무너지듯 앉았다.“아! 아이스크림.” 그렇게 콜라와 커피가 흐르는 땅, 초라한 시골 바는 궁상 순례자들의 성지가 됐다.

알베르게 토산토스 앞에 선 순례자들. 공짜 저녁과 잠자리가 제공되니 순례자들은 저도 모르게 살가워진다. 사진 김소민 기자

알베르게 토산토스 앞에 선 순례자들. 공짜 저녁과 잠자리가 제공되니 순례자들은 저도 모르게 살가워진다. 사진 김소민 기자

잘 걸어봤자 사람 다 거기서 거기일 때가 많다. 헉헉거리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으면 몇 사람이 추월해가는데, 내가 다리 끌고 다시 가다 보면 앞섰던 사람이 널브러져 있다. 똑같은 길을 가니 일주일 정도 바에서 눈도장을 찍다 보면 그 사람이 안 보일 때 궁금해진다. 너무 친근한 느낌이 드는 탓인지 포르투갈 할머니 로드리게스는 바에서 만날 때마다 포르투갈어로 언제 끝날지 모르게 긴 이야기를 쏟아냈고 나는 입꼬리가 떨리도록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쏜살같이 앞서 며칠 동안 안 보이던 사람도 어느 날 문득 기적처럼 바에서 물집을 터트리며 앉아 있기도 한다. 아일랜드에서 온 빨간 머리 여자 존은 말도 걸음도 엄청나게 빨랐다. 만날 뭔가 웃긴 이야기를 하고 깔깔거리니까 다들 따라 웃기는 하는데 그 친구가 떠나면 남은 사람들은 “너는 쟤 말 알아들었냐”고 쑥스럽게 확인했다. 너무 빠른 그를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못 본 지 6일째 되는 날 존이 바에서 온몸에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왜 반가운지 모르겠고 지나치게 반가워한 다음에는 할 말이 없어 더 어색해졌다.

순례자의 삶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자고 먹고 싸고 걷는다. 5월 말이었지만 스페인의 태양은 오후 2시부터 사람 살을 뜯어낸다. 그 시간을 피하려고 동트기 전 어스름할 무렵에 짐을 꾸려 걷기 시작한다. 새벽녘 공기가 코끝에 닿고 해가 떠오를 즈음이면 너도나도 자연 앞에서 감격한다. 그거 딱 2시간 간다. 그 뒤부터 어깨가 무너지고 머릿속에서는 콜라에 대한 연정이 아우성친다. 20~30km 걸으면 대충 다들 뻗고 그 마을 순례자를 위한 값싼 알베르게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간다. 침대를 배정받은 뒤 빨래하고 몸을 씻고 나면 저녁 먹을 때까지 딱히 할 일도 없다. 오후 2~5시는 스페인 사람들이 낮잠을 자는 시에스타, 아무리 상점 문을 세게 두드려도 콧방귀도 안 뀐다. 시작은 칼같이 2시인데 끝나는 건 주인장 맘이다. 저녁밥을 아무거나 먹고 나면 숙박비를 포함해 20유로(약 3만5천원) 드는 하루가 저문다. 그런데 그게 참 부족한 게 없다.

하루의 허름한 최종 종착지인 공동 숙소 알베르게에서 순례자들은 서로 이를 잡아주는 한 마리 유인원으로 돌아갔다. 나보다 더 가져봤자 비누 한 개고, 더 빨라봤자 산티아고에 하루이틀 먼저 도착하는 게 다인데다 물집이며 무릎이며 네 고통이 바로 내 고통이니 서로 미워하기도 힘들다. 그러다 보면 밥하는 김에 숟가락 하나 더 놓고, 물집 터트리는 사람에게 반창고를 내밀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알베르게 가운데 기부금으로 운영해 아예 공짜로 자도 되는 그라뇬이나 토산토스에서는 서로에게 저도 모르게 더 살가워진다. 땀에 찌든 순례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자원봉사자들이 큰 팔 벌려 안아주는데다 다 함께 먹는 공짜 저녁까지 차려주니 정도 전염된다. 토산토스에서는 “유비카리타스 에 아모르, 유비카리타스 데우스 이비에스트”(사랑과 나눔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라는 노래를 같이 어색해하며 불렀다. 배까지 두둑한 채 부르니 그 순간 노래는 진실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밤 10시께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누군가는 코를 골고 누군가는 이를 간다. 그렇게 사랑과 나눔 속에 신이 깃드는 동안, 이갈이와 코골이 속에서 고약한 성깔 또한 자라났다.

김소민 기자 한겨레 지역팀 pretty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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